닭 울음소리
한미정
비 온 다음날은 하늘로 솟아오르고 싶은 푸름을 만난다. 한 점 구름을 보고 있자면 가슴속 진보라 빛 솜덩이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다. 어느새 흔적 없이 사라진 구름 자리에는 말간 순수함만 남아있다.
‘꼬끼오! 꼬끼오!’
창밖으로 귀를 모은다. 뒤이어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주변의 거무스름한 건물들에 빛을 잠시 뿌리고서는 이내 흰 꼬리로 멀어진다. 아직은 여린 어둠이 소복하게 쌓인 시간에 닭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뜬금없기는 했지만 콘크리트 덩어리들만 빼곡히 들어앉은 도심 가운데서 나온 소리였다. 닭은 마당을 가로질러 다니며 부리로 땅을 콕콕 쪼아대고 재빠른 두 발은 구멍 파고 흙 헤집기를 좋아하는 가축으로 알고 있다. 땅이 없는 시내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나. 윤기 없고 팍팍한 일상을 시작하는 아침에 수탉이 지르는 소리를 들으니 숨이 탁 트이는 듯했다. 언제부터였는데 이제 들었을까. 하늘을 향해 한껏 고개 세우고 목청 돋우는 닭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신선했다.
도시 사람들은 하늘을 얼마나 자주 쳐다볼까. 1년 365일 중에서 눈, 비 오는 날이 100일을 넘는다 하고 불청객 황사 있는 날이 평균 잡아 15일이고, 구름 낀 흐린 날도 며칠 있다. 이래저래 3일에 하루는 새파란 하늘을 볼 수 없다는 통계다. 도심은 해가 뜬 날도 멀리서 보면 언제나 우중충한 잿빛을 낮게 깔고 있다. 터벅거리며 메마른 아스팔트가 위로 내뱉은 뿌연 회색 공기. 그 가운데 감정 없이 서 있는 무수한 벽체 사이를 미로 찾듯 오늘도 출구를 향해 바삐 다닌다. 시끄럽고 딱딱한 이곳에서 마음의 여유를 무엇으로 찾아야 할지.
어느 날 아침, 딸아이는 닭 우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도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남들처럼 방학 때라도 다녀올만한 친척집이 시골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번번이 작은 곤충을 보고도 벌레라고 질겁하여 소리 지르고 아무 데나 살충제를 뿌려대곤 했다.
하늘은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차별 없고 변함이 없어서 좋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도 높고 푸른 하늘은 늘 평화로운 그 모습이었다. 나 역시 아이들처럼 도시 여자이지만 초등학교시절에는 외곽에서 살았다. 대문을 열면 논밭이 바로 보이고 낮은 풀숲이 길 따라 이어져 가을이면 코스모스 머리를 손바닥에 훑으며 걸을 수 있었다. 여름날은 숨바꼭질하느라 해진 후 어머니가 부르실 때까지 맘껏 뛰어놀았다. 양쪽 무릎이 많이 까졌을 때도, 발가락 살점이 벗겨졌어도 꾸지람 들을까 봐, 그것보다는 놀이의 즐거움이 주는 행복감에 어머니 몰래 바른 빨간약(머큐로크롬) 하나면 충분했다. 눈이 부셔 구름을 바로 볼 수 없는 날 풀숲에 들어가 있으면 온갖 곤충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비 한 마리 잡아보려고 따라다니다 정신 차리고 보면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다시 돌아가 이번에는 여치, 메뚜기 잡으러 이리저리 다녔고 망사보다도 얇아 손에 힘을 주면 찢어져버리지 않을까 살짝 잡은 잠자리 날개가 생각난다. 빠져나가려고 한 번씩 퍼덕거릴 때마다 손가락에도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뱅글거리며 도는 투명한 눈동자에 애처로움이 들었지만 방학숙제를 내기 위해서 측은지심은 뒷전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아침을 깨우는 꼬끼오! 소리가 도시에서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딸아이처럼 밥 먹을 새도 없이 나가기 바쁜 시간에 그 소리는 귀찮은 소음공해로 여겨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인터넷 어느 아파트 카페에는 닭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민원으로 올라와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우리의 아이들은 다정하고 풍요로운 정서를 몸으로 배워야 할 성장기에 자연의 여유로움을 체험하지 못한 탓일 테고, 어른들은 오늘 해야 할 일도 차고 넘쳐서 하늘 담을 눈도, 마음을 여는 귀도 챙기지 못하는 것 같다.
몇 해 전에 읽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동화책이 생각난다. 좁은 양계장에 갇혀서 죽도록 알만 낳다가 이제는 늙어서 제대로 된 알도 못 낳게 된 주인공 암탉인 ‘잎싹’ 이야기이다. 한 번이라도 알을 품어 엄마가 되고 싶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양계장을 탈출했다. 시시때때로 목숨을 위협 당하는 거친 자연 속에서 잎싹이 본 하늘은 천둥치는 번개였으리라. 비록 청둥오리 알이었지만 소원대로 알을 품어 자신의 새끼로 키웠다. 때가 되어 같은 철새 떼를 따라 청둥오리를 떠나보낸 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신의 몸은 족제비에게 바치는 희생을 보여준다. 잎싹은 차갑고 냉정하면서도 용기 없고 도전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전하는 것 같았다. 시들고 황폐한 영혼의 아침을 깨우는 것이 아니었을지. 우리 동네 수탉은 매일 물리적인 아침을 깨운다. 도시의 안개를 뚫고 퍼져 나가는 그 울림에 잠시나마 고향집을 그리며 평안함을 찾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졸린 잠 깨우는 수탉의 목청은 하루의 작은 위안이 되고 어느 날 잎싹 같은 따뜻한 영혼의 전도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돌아보니 닭 울음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던 작은 바탕은 어릴 적 풀숲과 들에서 느낀 자유로움과 다양함에서였던 것 같다. 파란 바탕에 흰 구름이 점점이 떠다니는 하늘 그곳은 가식 없는 본연의 흐름이 펼쳐져 있었다. 이따금씩 초록 풀밭에 돗자리 깔고 누워 구름을 헤아리는 것도, 작은 냇물에 들어가 손바닥에 송사리를 넣어보는 것도 아이들과 함께 많이 만들어두고 싶다. 하루를 일으켜 세워주는 새벽 울음이 아이들에게도 반가움과 신선함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으로.
마음이 힘들 때면 나도 모르게 하늘을 보고 더 괴로울 땐 혼자 있고 싶어진다. 그보다 더 고통스러울 때면 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고 싶어질 때도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순간에는 하늘을 보고 싶지 않았다. 숨이 찰 때, 내 안의 깊은 나와 대화를 나누어본다. 진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여 가다듬으면 마른 가슴에 촉촉한 생기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회색 구름을 걷어내면 청명한 하늘은 언제나처럼 그대로 있다. 눈에 보이는 하늘을 보고 마음까지 누르지 말고 열린 가슴으로 내가 여는 푸른 하늘이기를 빌어본다.
마음속 여유는 우물에서 퍼 올리는, 한 두레박의 물이라고 여기고 싶다. 두레박을 아래로 내릴 밧줄은 내 마음의 빗장일 것이다. 어릴 적 자연의 품에서, 포근한 가족의 품에서,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만들어진 깨끗한 물이 빗장만 풀리면 줄을 타고 올라올 수 있을 것 같다. 때로는 목 타는 나를 살리기도 하고 함께하는 사람도 힘내어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순수한 기억의 물. 우물은 마르지 않았고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일이 남아있다. 우물 안 동그라미는 나를 보며 저 아래 찰랑대는 맑은 물이 아직 충분히 남아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오늘 누군가도 아침 닭 울음소리를 듣고 따뜻한 숨결을 한 두레박 퍼 올릴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