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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이라면 많은 사람이 차밭과 영화 〈서편제〉를 떠올릴 것이다. 서편제의 비조 박유진의 뒤를 이어 오늘날 조상현, 성창순 등 판소리 명창을 길러낸 송계 정응민이 보성군 회천면 도강마을 태생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보성에서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강골마을이 이번 목적지다.
강골마을은 조선 시대 한옥의 참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마을 가운데 하나다. 39개 가옥에 지나지 않지만 3개의 가옥과 1개의 정자가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이금재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157호), 이용욱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159호), 이식래 가옥(중요 민속자료 제160호), 열화정(중요 민속자료 제162호)이 그것이다.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집성촌으로 원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유명하지만 여타 전통 마을처럼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더욱 매력적이다. 강골마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국도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관광 코스에서 비켜난 데다 한반도 남쪽의 끝자락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변이 대숲으로 둘러싸여 가까이 다가가도 마을의 전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은닉되어 있다. 대나무가 많은 이유는 마을이 해변에 접해 있으므로 방풍림으로 심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강골마을 앞에 놓인 철로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다시 말해 어촌 마을이었는데 1937년 완공된 득량만 방조제로 인해 해변이 아니라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농촌으로 변했다. 방조제의 완공으로 득량면의 농경지가 순식간에 2배 이상 늘었고 이를 토대로 쌀의 생산이 획기적으로 증가했다. 이를 반영하듯 '득량'이란 말은 양식을 얻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일제 강점기에 생긴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과 관련 있다. 임진왜란 당시 비봉리 선소마을 앞섬, 즉 지금의 득량도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대치하던 중 아군의 식량이 떨어져 비봉리 선소에서 최대성 장군의 도움으로 식량을 조달해 왜군을 퇴치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가 펼쳐졌던 동남쪽을 제외한 마을의 삼면은 산이 감싸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마을 뒤에는 주산, 앞쪽에는 안산, 그 앞 너머에는 조산인 오봉산이 있는 것이다. 오봉산은 해발 345미터의 큰 산과 305미터의 작은 산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현지에서는 큰 산을 칼바위라 부르고 작은 산을 오봉산이라 부른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다 해서 오봉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그리 높지 않지만 곳곳에 특이하고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이 있어 많은 등산객이 찾는다.
오봉산을 배경으로 한 강골마을 앞에는 간척 사업에 의한 광활한 논이 펼쳐져 있으며 이렇게 주거지와 농경지가 맞물린 모습은 우리의 전통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강골마을에는 돌담, 탱자나무 산울타리, 죽책, 흙 돌담, 죽책과 산울타리의 복합 형태, 흙 돌담과 산울타리의 복합 형태 등 다양한 담장이 존재한다. 이 담장들이 마을의 아름다운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며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마을 중간중간 보이는 돌담들은 큰 돌들을 쌓고 사이사이 작은 돌을 끼워넣었다.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토석 담으로 기단부, 본체, 지붕으로 구성되며 빗살무늬토기처럼 돌을 비스듬히 얹고 흙을 짓이겨놓은 데다 위로 갈수록 얇아지기 때문에 안쪽으로 약간 기울었지만 안정된 모습이다.
강골에는 11세기 중엽 양천 허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원주 이씨를 거쳐 16세기 말에 경기도 광주에 뿌리를 둔 광주 이씨가 들어왔다. 광원군 이극돈은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추후에 영의정으로 추존되었는데, 그의 손자 대가 보성으로 들어온 후 그의 증손인 이유빈이 처가가 있는 강골마을에 정착해 광주 이씨 광원군파 집성촌이 되었다. 현재 광주 이씨들은 서울, 경기 다음으로 전라도에 많이 거주한다. 강골마을의 39호의 가구 중 세대주가 타성인 경우는 10호 미만이지만 대부분은 광주 이씨와 혼인 관계다.
강골마을은 다른 전통 마을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방조제로 인한 현대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전통 마을에서는 종가를 비롯해 크고 격식을 갖춘 집들이 마을 주거지의 뒤쪽, 즉 위계가 높은 지점에 위치한다. 그러나 강골마을에서는 위계가 있는 집들이 마을 앞쪽 중앙부를 차지한다. 씨족 사회의 딱딱한 규범 안에서 은연중 자신들의 위세를 발휘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강골마을의 또 다른 특징은 주거지의 밀집 현상이다. 일반적인 전통 한옥에서는 문간채의 긴 면을 보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데 반해 박준균 가옥은 문간채 박공 방향, 즉 마구리 방향으로 진입한다. 또한 문간채를 따라 담장이 바싹 설치되어 있다. 길과 가까워 바깥마당을 둘 여유가 없을 정도로 공간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안영전 가옥은 남향의 마당을 두기 위해 안채 뒤쪽에 출입구를 냈는데 일반 전통 마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른 마을의 경우 대지에 한계가 있으면 강골마을 같은 방식을 채택하지 않고 근처에 새로운 마을을 개척했다. 즉 기존 마을의 주거지 밀도를 높이기보다 새로운 환경을 찾았는데, 이곳에서는 분가하지 않고 좀더 작은 공간을 찾았다. 씨족 마을의 원칙에 맞게 좁더라도 함께 사는 것을 고수한 것이다.
마을 중앙에 있는 이용욱 가옥은 이곳의 종가 집안으로 헌종 1년(1836) 건설되었으며, 강골마을에서 유일하게 솟을대문을 갖고 있다. 강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 전형적인 남도식 평면 구조이며 담장으로 막아서 사랑 마당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다. 특히 안채, 사랑채, 곳간채, 행랑채, 중간문채, 사당 등을 모두 갖춘 사대부 집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채와 사당은 원래 초가로 지었으나 파손되자 기와집으로 개축했고, 다른 솟을대문과는 달리 3칸이었던 것을 5칸으로 개축했다. 토석 담과 한옥의 기와 선이 끊어지다 이어지면서 상승하는 구조로 마치 성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솟을대문을 세운 이유가 흥미롭다. 원래 현재의 중간채가 정문이고 사랑채 오른쪽에 연못이 있었는데, 이 집에서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 나오자 연못을 메우고 중간채 앞에 현재의 솟을대문을 세웠다는 것이다. 당대 과거 급제자의 위세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팔작지붕으로 된 사랑채로 가는 길은 두 개의 계단을 올라 온돌방 앞에 하나, 대청마루에 하나 놓인 섬돌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격식을 강조하는 사당이나 관청 건물의 기단 같은 규율이 느껴진다. 넓은 사랑채 마루에 앉으면 솟을대문 위쪽 오봉산 정상으로 책을 보며 앉아 있는 듯한 형상의 바위가 보인다. 따라서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이곳에 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동쪽에 부엌을 두었고 다음이 큰방, 중앙 2칸은 대청, 맨 끝이 작은방이다. 기둥은 사각기둥이고 주춧돌은 사각으로 화강암을 가공했다. 합각에는 물결무늬를 새겼다.
안채 옆에 곳간, 전면에 광으로 사용하는 중간채가 있는데 광에는 일반적으로 옹기와 쌀뒤주를 비롯한 각종 살림 도구를 비치한다. 곳간은 곡식을 저장하는 곳이며 이곳의 곳간은 당대의 대갓집답게 대단히 큰 규모다. 중간채의 배치도 흥미롭다. 대부분의 가옥은 평평한 지반 위에 건물을 세우는데 이 집의 중간채는 지반의 높이를 한 단계 낮춰 지었다. 중간채의 높이를 낮춰 본채에서는 사랑채와 솟을대문을 볼 수 있지만 솟을대문에서는 안채를 볼 수 없다. 반면에 본채의 안방마님이 주거하는 방에서 중간채 건물 너머 솟을대문을 보면 손님이 사랑채까지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반의 높낮이로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는 구조다.
안채 오른쪽에는 '연암', '원암'이라는 현판과 '효제충신' 등 다양한 주련이 걸려 있는 사당 겸 서재 건물이 있다. 이 가옥에서 집주인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관리하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집이다. 일반 사당과는 달리 방이 두 개인데 왼쪽과 오른쪽의 용도가 판이하다. 오른쪽은 불천지위로 모시는 분이 없으므로 4대 봉사를 위한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정통적인 사대부 집안의 예다. 왼쪽 방은 부엌도 있는데 용도가 놀랍다.
과거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 동안 묘를 지키는 것이 자손의 도리였다. 그런데 묘지 옆에서 3년을 지낸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묘지 옆에 초막을 지어 잠자리를 확보한다 해도 양반 신분에 직접 밥을 짓지도 않으니 먹을거리를 해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3년 동안 묘를 지킨다는 것은 집안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하며, 다시 말해 집안사람들이 매우 고통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 산소가 집에서 멀다면 묘를 지키는 양반을 위해 매일 식사 등 생필품을 전달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유교 사상으로 똘똘 뭉친 조선 시대에 3년 동안 묘지를 지킨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 이용욱 종가에서는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했다. 부모의 묘 옆에서 3년을 지내는 것이 아니라 집 안의 사당에 머물면서 효도를 다한 것이다. 바로 옆에 있는 안채에 부인이 살고 있지만 주인은 사당의 작은 방에 기거하며 매일 부모에게 효를 드리고 3년상을 치른 뒤에야 비로소 안채로 돌아갔다. 당대의 종갓집 장손이 얼마나 어려운 생활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가옥에는 도시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농기구들이 가득해 마치 옛 물건으로 가득 찬 박물관에 온 것 같다.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옥 연계 추천 여행 코스 30선'에 선정되어 숙박이 가능하며, 관광버스 2~3대가 정기적으로 머물며 한옥 체험을 만끽하고 돌아가는 명소로도 활용된다.
이용욱 가옥에서 흥미로운 것은 우물과 맞대고 있는 담에 뚫린 조그마한 구멍이다. 이 우물은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것인데 아름다운 담장 가운데 구멍이 뚫린 연유가 있다. 이용욱 가옥은 워낙 마을에서 뼈대가 있는 집안이라 동네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가 주인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용욱 집안에 청할 것이 있을 때 우물에서 이야기를 하면 이를 하인들이 듣고 주인에게 전해 해결했다는 것이다. 집주인으로서는 소원을 부탁하는 사람을 직접 만나는 부담을 덜 수 있고, 소원을 청하는 사람은 소위 상전을 직접 보지 않아도 되므로 마음껏 소원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통 마을에 이런 해학이 담겨 있다는 것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나온다.
집 앞에 연못과 조그마한 섬이 있고 버드나무가 있다. 얼마 전까지 연못이 메워져 밭이 되었는데 다시 복원된 것이다. 버드나무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흔한 동시에 유용하기 그지없는 나무다. 기우제를 지낼 때나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점칠 때 사용되었고, 곤장도 버드나무로 만들었다. 또한 옛날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주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버드나무 가지는 산들바람에도 쉽게 흔들려 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게 아니냐는 투정이 포함되어 있다.
강골마을에서 이용욱 가옥에만 솟을대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 강골마을은 지역적인 위치상 부농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는데, 현대화의 물결로 농기계가 보급되자 농기계를 대지 안으로 들여오기 위해 대문간을 넓히면서 솟을대문이 철거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사대부를 의미하는 솟을대문보다 농업 경영, 즉 실용성을 중요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다.
이용욱 가옥의 담장을 따라 좀더 들어가면 초가집으로 된 사랑채와 담장을 一자형으로 연결한 이식래 가옥이 나타난다. 이 집에는 별도의 바깥 대문이 없다. 사랑 마당 앞 텃밭 주위에 싸리나무 울타리가 있는 것을 볼 때 죽담이 아닌 나무로 이어 엮은 바자 울타리에 사립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위에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집 안에 별다른 정원수가 없음에도 그윽한 느낌을 준다. 상량문에 의거하면 1891년에 건설되었지만 안채의 동쪽 아랫방은 후대에 증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채는 부엌, 큰방, 대청, 작은방이 一자형으로 배치된 전형적인 남도식 4칸 집이었으며 아래쪽에 1칸을 덧달아 5칸 집이 되었다. 안채 서쪽에 담을 쌓아 뒤쪽의 휴식 공간을 보호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주택의 공간 구성법 중 하나다.
사랑채는 넓적하고 큰 판석을 한 줄 돌린 뒤 납작하고 평평한 돌을 얹은 기단 위 전면 네 칸 규모이고, 측면 한 칸에 앞뒤로 반 칸 규모의 툇간을 이은 형식이다. 초석은 자연석을 약간 가공해 사다리꼴 형태로 만들고, 그 위에 네모난 방주 기둥을 세운 납도리집이다. 서쪽부터 부엌, 아랫방, 툇방, 대청 순으로 배치하고 대청 앞은 개방해 칸막이를 두지 않았다. 굴뚝은 키가 작은 와편 굴뚝이다. 사랑채에는 넓은 마당이 마련되어 있다. 사랑 마당 뒤에 사랑채가 앉아 있고, 서쪽에는 행랑채가 동향으로 배치되었는데 누마루가 없는 사랑채 대청이 소박한 느낌을 준다.
대청마루와 두 개의 온돌방인 아래 사랑방에서 안채로 갈 수 있는 문을 각각 만들고 섬돌을 놓았는데, 더운 여름에 문을 열면 바람이 직선으로 사랑채를 통과하도록 한 지혜가 돋보인다. 문간채는 사람의 허리 높이까지 추녀를 낮추고, 흙으로 벽을 쌓고, 널빤지 문을 달았다. 이곳은 문간채이면서 동시에 소 외양간으로도 사용되었다. 문간채에 들어서면 장독대 담장이 내부 시선을 가리고 넓은 안마당이 펼쳐진다.
안마당 서쪽에 있는 곳간채는 중앙에 세 칸을 두고 한 칸은 대청마루로, 두 칸은 판벽으로 만든 판문의 곳간을 두었다. 3분의 1칸 규모의 퇴를 끝에 두어 한쪽은 안 측간으로, 다른 한쪽은 기둥만 내세운 우진각 지붕 기와집으로 만들어 좀처럼 보기 드문 구조다.
안채는 다섯 칸의 납도리집으로, 2고주 5량인 초가집에 둥근꼴 판대공이다. 기둥은 방주이고 자연석을 약간 네모나게 가공한 주춧돌을 사용했으며, 2벌대 자연석 막쌓기로 하고 갑석을 한 줄 더 올린 기단을 만들었다. 서쪽으로 툇마루를 두고, 앞 칸에 작은 방, 뒤 칸에 뒷방을 두었다. 안채 중간에는 부엌이 딸린 두 칸의 온돌방과 마루를 달았으며, 건넌방을 두고 툇마루를 설치해 밖에서 방으로 들고나도록 했다.
특이한 점은 본채와 사랑채는 초가인데 광은 기와로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곡식과 농기구 보관이 무엇보다 중요해 사람은 초가에서 살더라도 광만큼은 우대해 기와로 지었는지도 모른다. 건물도 중요성에 따라 대우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광만큼 독특한 것은 이 집에서 가장 화려한 장독대다. 여타 마을이 장독대를 개방적인 공간에 설치한 것과 달리 강골마을의 대부분 집에서는 장담을 쌓고 문을 달아 장독을 보관했다. 이곳 역시 옆집인 이용욱 가옥의 곳간채에 기대 기와 담장을 막고, 그 사이에 일각대문을 따로 마련했다. 그만큼 장을 소중히 여겼다는 뜻이다.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불길한 일이 생긴다'는 말도 있지만, 강골마을이 전통을 계속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다름 아닌 장맛에서 나왔는지도 모른다.
현재는 사라졌지만 사랑채 앞으로 '가랍집(호지집)'이 있었다고 한다. 가랍집은 머슴이 사는 살림채로 별도로 살림을 하는 집이라는 점에서 살림을 따로 하지 않는 하인들의 공간인 행랑채와 다르다. 강골마을은 부농 마을이므로 넓고 광대한 농지를 경작하기 위해 머슴이 중요하긴 했지만, 이들에게 주인집 안에 독립된 집을 따로 배려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금재 가옥은 오봉산을 바라보면서 남향해 있는데, 사이에 위치한 '소리샘'이라는 공동 우물을 꼭 보아야 한다. 소리샘이 있는 땅은 원래 이용욱 가옥 소유이지만, 워낙 마을에 식수가 귀하다보니 우물을 파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개방했다 한다.
사랑 마당에 약간 돌출되어 만든 이 우물에서는 담에 구멍을 뚫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예부터 우물가는 동네 아녀자들이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여러 소문을 전달하던 곳이므로 동네 사람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 이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이 터에는 광주 이씨 입향조 이유번의 장인인 안수령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1900년 전후에 새로 지어진 안채는 일반적인 형태와 달리 날개가 덧붙여졌다. 평면 구성은 남도식으로 부엌, 안방, 대청이 꺾이지 않고 일렬로 배치되는 一자형을 기본으로 한다. 대문채와 곳간채, 아래 곳간채는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은 동네의 다른 집들과 달리 화단을 만들어 아름답게 조경해놓았다. 강골마을에서 발견되는 이런 독특한 주거형을 凹자형이라고 하는데, 집 앞에서 바라보면 주택 평면이 凹자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凹자형 주택의 경우 후면은 凹자형 퇴로 둘러싸며 나머지 한 면은 경사진 지형으로 규정되는 내밀한 뒷마당이 있다. 또한 채마다 하나의 마당이 대응하는 전통적인 구성에서 벗어나 하나의 채에 사방으로 여러 개의 마당이 대응한다. 채의 앞쪽에는 안마당, 뒤쪽에는 뒷마당, 옆쪽에는 사랑 마당, 부엌 뒤쪽에는 가사 작업 마당이 있다. 따라서 이런 집에서는 삼대가 한 채에 모여 살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다.
한옥의 경우 대부분 특별한 변화가 없는 一자형이나 ㄷ자형, ㅁ자형으로 규정된다고 생각하겠지만 凹자형 집을 보면 한옥의 유형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 수 있다. 작은방은 사랑방의 용도로 측면에서 드나들도록 했는데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안마당의 정원은 옛 멋을 잃었지만 뒤뜰과 사랑방 동쪽의 후원, 굴뚝이 아름다운 한옥의 분위기를 돋운다.
凹자형 가옥은 강골마을의 이금재 가옥과 마을 서쪽 인근에 있는 예동마을의 이용우 가옥에서도 보인다. 이용우 가옥에서는 뒤로 꺾여 돌출된 2칸이 각각 신혼 자녀의 방과 음식을 보관하는 찬방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들 간의 연계가 재미있다. 예동마을도 강골마을과 마찬가지로 광주 이씨 씨족 마을이며 이금재는 이용우의 둘째 아들이다. 원래 예동 마을 출신인데 강골로 분가해온 것이다. 이를 두고 한필원 교수는 凹자형 가옥은 광주 이씨 문중에서 근대기에 개발한 주거 유형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凹자형 가옥을 특허 신청했다면 충분히 인정받았을 것이라는 뜻이다.
후원은 외부인이 직접 출입하지 못하도록 안채와 광채 모퉁이를 담장으로 막았다. 작은방 동쪽에는 담장 아래에 반 칸 정도 나지막한 화단을 조성했다. 담장 중앙에는 협문을 만들어 안채의 아낙들이나 자녀들이 대나무 숲이 무성한 후원으로 출입하도록 만들어놓았다. 뒤 울타리 안에도 축대를 쌓고 동백나무 등을 심었다. 남도의 특징의 하나인 동백나무를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도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다.
강골마을의 가옥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지어졌기 때문에 현대화의 물결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근대에는 주거 공간의 수요가 크게 증가해 건물 칸수가 늘어났다. 5칸 이상의 큰 집이 되자 난방이 중요해 부엌 양쪽에 방을 두어 一자형 구성을 유지했다. 부엌 양쪽에 온돌방을 두면 부엌 하나에 아궁이를 모아놓을 수 있어 난방이 편리해진다. 이런 평면형을 흔히 중앙 부엌형이라고 부르는데 충남에서 다소 보이기는 하지만 전남 지역 이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형식이다.
또한 건물 곳곳마다 장식적 요소가 가미되었다. 부를 과시하려는 의도로 보이며 이용욱 가옥의 솟을대문 홍살대는 물론 대문 중간의 돌쩌귀를 철물로 보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길래 가옥에서도 대문간이 홍살대로 장식되었고 반준균 가옥에서는 안채 지붕 합각벽을 꽃 기와로 장식했다. 이 같은 장식은 유교적인 분위기가 철저하게 흐르던 조선 중기까지 금기시되던 것이다.
실개울을 따라 마을 뒤편으로 올라가면 깊숙한 숲 가운데 중요 민속자료 제162호인 열화정이 자리 잡고 있다. 헌종 11년(1845) 이진만이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것으로 자연을 그대로 살려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하는 풍류각이다.
한국의 전통 마을에는 두 종류의 정자가 있다. 첫째는 마을 앞에 조성되어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이다. 또 하나는 마을 뒤쪽에서 경치를 감상하며 마음을 닦는 공간이다. 전자가 마을의 협동성을 강조했다면 후자는 양반들의 유교적 자연관을 보여준다. 열화정은 이 둘을 복합한 독특한 정자다. 동향에 위치한 정자에는 '백사문(白沙門)'이라는 현판이 걸린 일각대문이 서 있다. 문을 들어서면 ㄱ자형 누마루를 갖춘 집이 있다.
온돌방 전면은 툇마루를 두었으며, 대청마루와 누마루를 하나로 연결하고, 뒤쪽으로는 헛기둥을 일렬로 세워서 헛퇴를 달아 정자에서 사방의 경치를 감상하기 좋게 만들어놓았다.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는 자연석 막쌓기의 기단 위에 위치하며, 높은 덤벙 주초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는 둥글게 만든 도리에 장여를 받치고, 소로(접시받침)를 끼워 장여 모양의 창방을 받쳐 고졸한 정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종도리는 장여만 받쳤으며, 사다리꼴 판대공으로 지지하는 들보는 네모꼴로 모서리를 두르고 굽은 부재를 사용해 생동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평면 중앙에 있는 두 칸의 온돌방은 아랫방과 윗방으로 구분하고 앞쪽으로 돌출해 두 칸은 누마루로 만들었다. 누마루의 앞과 양쪽에는 쪽마루를 내밀어서 계자 난간을 시설했다. 돌출된 난간 밑에 누마루를 세웠고, 그 앞에는 활주를 두 개 세워 안정감을 더하고 있다.
마당 앞에는 연못이 있는데 주변에 여러 개의 괴석과 벚나무, 목련, 석류, 대나무 등을 심어 주변 숲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했다. 그러나 연못의 형태가 다소 이례적이다. 조선 시대 연못은 대체로 천원지방의 관념을 따라 사각형 연못에 원형 인공 섬을 조성했다. 그러나 열화정의 연못은 ㄱ자형으로 못 안에 섬을 두지 않았다. 열화정이 건설될 때 다소 외진 강골마을에까지 근대정신이 스며들어 유교 사상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열화정은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큰 정자이지만 시야가 시원하게 펼쳐지지는 않는다. 이곳은 학문을 수양하는 공간인 동시에 씨족끼리의 종회나 마을사람들의 동회 등 각종 모임을 여는 만남과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므로 굳이 특정 사대부의 조망만을 강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는 '열화'라고 이름 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열화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말로 씨족의 화합과 결속을 염원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친척들과 정담을 즐기고 거문고 타고 글을 읽으며 즐기니 시름이 사라진다."
이와 같은 결속은 보다 승화되어 강골마을은 대한 제국 말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해 싸웠던 이관희, 이양래, 이웅래 등 여러 지사를 배출하기도 했다.
큰 가옥마다 앞뜰에 연못을 만든 것도 특징이다. 강골마을에는 연못이 4개 있다. 열화정 앞을 제외한 3곳의 연못은 모두 이금재 가옥, 이용욱 가옥, 이채원 가옥 등 개인 주택 앞에 위치해 독특한 경관을 조성한다. 일반적으로 전통 마을에서는 마을 앞쪽 공동 공간에 연못을 조성하는데 이곳에서는 연못이 개인 소유인 것이다.
마을 뒤쪽 오솔길을 따라가면 선사 시대에 만든 고인돌을 볼 수 있다. 2,000년 전 이곳에 터전을 잡은 선조들의 삶을 잊지 않고 공원으로 조성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공원 자체는 작지만 대나무로 둘러싸여 숲에서 나오는 정기를 마음껏 느낄 수 있다.
강골마을은 현대화의 물결을 따라가는 것에도 남다른 순발력을 보인다. 인터넷 등의 보급으로 국민 간의 정보 격차가 벌어지자 이를 해소하기 위해 2004년부터 '정보화마을'을 추진했는데 강골마을이 지정되었다. 한 집당 컴퓨터 2대씩 지원받은 결과 나이 많은 주민의 컴퓨터 실력이 여느 젊은이에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강골마을에서는 옛 가락 음악회를 주기적으로 열고 있다. 대금, 가야금 연주는 물론 애끓는 우리 소리와 전통 춤까지 즐길 수 있으므로 공연 날짜를 사전에 체크하기 바란다.
득량만 오른쪽에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느껴지는 비봉리 선소마을이 있다. 선소마을은 천연기념물 제418호로 지정된 '비봉리 공룡 알 화석 산출지' 현장이다. 근래 비봉 공룡원이 인근에 건설되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마을 담장을 거의 공룡 벽화로 채웠다. 또한 2001년 해양수산부가 지정한 '어촌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살아 있는 꼬막, 쏙 등을 잡는 체험 학습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인근에 율포 관광지, 보성 녹차 밭, 한국 차·소리문화공원도 있으니 함께 답사하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