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5일(예수 성탄 대축일 밤) 루카 2,1-14
허무 속의 빛
우리는 오늘 밤, 한 아기의 탄생을 기념합니다. 지금 우리가 들은 복음은 나자렛의 한 서민 요셉과 그 아내 마리아에게서 아기가 태어났고,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루카 2,6-7)고 말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만삭인데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호적등록 명령에 따라 남편인 요셉과 함께 먼 길을 떠났습니다. 타향인 베들레헴에서 아기는 태어났고, 그 아기를 영접한 이들은 그 부근에서 밤을 새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만들어 기록으로 남긴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주님이라 부르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기 위해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명령을 따라 무리한 길을 떠나야 하는 보잘것없는 서민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여관에는 자리가 없어 그 아기는 가축을 위해 만들어진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그 시대 천민이었던 목자들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천사의 입을 빌려 선포합니다.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를 위한 큰 기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초기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오늘까지 성탄의 풍습이 기쁨의 표현들을 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쾌한 성탄 음악들과 화려한 장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 사이에 오가는 ‘성탄절을 기뻐하자는’ 인사말과 선물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이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체험한 초기 신앙인들이 역사 안에 남겨 놓은 풍습들입니다. 어둠이 가장 길어진 동지섣달의 한밤중에 빛을 밝혀 놓고, 우리는 어둠의 한가운데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이 세상 우리의 삶에는 어둠이 많습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웃에게 무자비합니다. 권력을 탐해서 소신을 접어두고 윗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기 한 사람 입신양명할 길을 찾기도 합니다. 베풀어진 우리 생명의 의미를 보지 못하고, 자기 한 사람 잘되는 것이 구원이라 착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절망 가운데서 헤맬 때도 많습니다. 지구촌을 강타한 금융 위기, 여기저기에 발생한 지진, 태풍과 해일 등의 피해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우리의 성실한 노력이 실패로 끝나는 절망도 우리는 겪습니다. 우리가 헤매는 어둠들입니다. 구약성서 코헬렛은 이렇게 외칩니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코헬 1,2 ) | | | (사진 출처 = pixabay.com) |
이런 어둠의 한가운데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빛으로 오신 사실을 기념합니다. 그분은 율법을 잘 지키는 데에 구원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병든 이, 가난한 이, 불행한 이들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은 것이라고 가르치는 유대교가 지배하던 땅에서, 그분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면서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가 행복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재물의 유무에 인간의 가치와 행복의 잣대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특별한 고행을 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죄인이라는 사람에게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은 고치고, 용서하고 살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진실을 보여 주는 빛이었습니다. 성탄 축일은 예수님이 빈약하고 허약한 인간으로 오신 사실을 기념합니다. 호화롭고 호사스런 삶에는 흔히 허세와 허영이 끼어들어 인간 삶의 진실을 외면하게 합니다. 허세와 허영은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려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는 어둠 안에 살게 합니다. 인간 생명이 살고 자라는 건전한 온상은 이웃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보살핌이 지배하는 현장입니다. 재물만, 혹은 높은 지위만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보살펴야 하는, 허약한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시선은 인간 욕심이 뿜어 내는 어둠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고 요한 복음서(1,5)는 말합니다. 그런 우리의 어둠 안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 삶의 진실을 보여 주는 빛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참다운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그들의 권위에 맹종할 것을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맹종이 사람을 하느님에게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자유로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 생명이 하시는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는 사람이 될 것을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인간이 자유롭게 실천할 것을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진실을 당신의 삶으로 충분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요한 14,9)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우리 욕심의 어둠이 만드는 각종 차별과 갈등을 그 근원에서 없애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복수의 어둠이 만드는 악순환도 그 근본에서 차단합니다. 나눔은 가진 이와 갖지 못한 이의 차별을 없애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버림받은 이와 버린 이의 차별을 없애는 힘입니다. 용서는 잘못한 이가 은혜로움을 체험하게 하는 창조적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데에 당신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차별 안에 안전과 보람을 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져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아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심이 두터워서, 비로소 안심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헤매는 어둠입니다. 오늘의 초라한 구유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약하게 다가갑니다. 위세 당당하게 군림하겠다는 사람 안에는 나눔도, 자비도, 사랑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구유의 초라함과 연약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 생명의 진실입니다. 오늘 밤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평화가 무엇인지, 또 거룩함이 무엇인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아기가 태어난 밤입니다. 우리 앞에 던져진 연약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차별을 없애는 보살핌을 실천할 때만, 성탄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되는’ 축일일 것입니다. 이웃에게 기쁨이 되는 자비와 사랑의 보살핌이 보이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어둠을 넘어서 하느님 생명의 빛을 보아야 합니다. 그 빛이 오늘 밤 어둠의 한가운데에 비치고 있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생활 속의 복음] 이렇게 작고 가난한 분이 하느님이십니까?
1. 예수님 탄생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겨 계십니다. 아버지 요셉도 옆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두 분은 이 탄생의 비밀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 아드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신기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하시는 전혀 새롭고 최고 절정을 이루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다니요! 하느님과 함께 살던 낙원을 떠나서 비참하게 살고 있는 인간을 찾아서 하느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근본적으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무한의 세계를 떠나서 죄인들이 사는 이 세상에 도착하셨습니다. 먼 여행길이었습니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쉽지 않은 여행을 마치신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끊임없이 불충실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더할 수 없는 엄청난 사랑으로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은 인간 없이 사실 수 없으셨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그 낙원에서 함께 살던 인간을 한시도 못 잊으셨나 봅니다. 그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시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2. 구유에 제일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
이 탄생 소식은 제일 먼저 목자들에게 전해집니다. 밤중에도 가축들을 돌보느라고 들판에 있던 이들이지요. 이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가난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무시당하면서 살아갑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마치 하느님한테서 벌을 받는 사람들처럼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그 성탄의 기쁜 소식을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그 엄청나게 기쁜 소식을 말입니다. 오늘도 단순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별로 배운 것이 없는 그 사람들이 먼저 똑같은 초대를 받아서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아 모두 잠든 밤에 고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하러 따뜻한 방을 박차고 길거리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은 내가 찾아 나서야 만날 수 있습니다. 멀리 있지도 않습니다. 나와 함께 매일 같이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3.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를 바라봅니다.
영원한 하느님의 모습을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그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인간이 되셨으니 우리는 이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가난한 목자들과 함께 저희는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아기의 울음소리도 듣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작은 분이십니까? 이렇게 마구간 구유에서 보듯이 가난한 분이십니까? 인간은 더욱 위대한 존재가 되고자 합니다. 보다 더 큰 힘과 끊임없이 더 많은 돈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보잘것없는 가난한 분이시군요.
우리는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무진장 애를 쓰면서 일생을 살아왔는데, 하느님께서는 가장 작은 사람, 가난한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군요. 바로 보잘것없고 내세울 것이 없다고 여기는 내 안에 예수님께서 오늘 밤 탄생하셨군요. 그리고 보니 바로 내 곁에, 내가 깔보던 그 작은 이들 안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새롭게 탄생하셨군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수욱 베드로 신부님
[아! 어쩌나] 324. 파리 테러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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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많은 분이 IS가 왜 파리 테러를 일으켰는지, 혹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들 하십니다. 심지어 앞으로는 비행기도 못 타겠다고 불안해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IS가 지금 저지르는 일들은 어떤 목적으로 하는지, 그들이 가진 전략이 무엇인지요.
답: 잘 아시는 것처럼 IS는 이슬람 광신도들입니다. 자신들이 장악한 지역주민들을 종교적 노예로 삼는 일종의 종교 폭력집단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일반적인 무슬림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제가 경험한 무슬림들은 기도를 자주 하고 선한 일을 하고 특히 자선행위를 잘하는 종교인들입니다. 또한 이들은 다른 종교에 관대합니다. 터키와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에는 그리스도교 유적지가 잘 보전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공경하는 성인들, 특히 성모님에 대한 존경심은 지극할 정도입니다. 자기 종교 사람들은 아니지만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면 종교를 떠나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무슬림들입니다. (특히 중동 국가 사람들이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는 상당히 높습니다.)
IS는 이런 무슬림들과는 전혀 다른 광신도들이기에 동일시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들은 세계를 자신들의 영역과 서구 영역으로 이분화하려는 의도로 테러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서구 각국 사람들이 무슬림에 대하여 피로감을 느끼고 나중에는 적개심을 갖게 해서 무슬림들이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을 펴고 있습니다. 지금 서구 사회는 시리아를 비롯한 내전이 발생한 지역의 난민들로 인하여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들은 전쟁으로 인한 공포를 피하려고 서구로 피난 온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자 서구 사회 안에서도 거부감이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관대하다고 평판이 좋은 독일에서 히틀러 대역배우가 깜짝쇼를 하였는데 사람들이 히틀러처럼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더랍니다. 극우파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도 난민들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파리 테러가 일어나자 아무 관련도 없는 무슬림들이 피해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더 문제는 현대판 히틀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같은 무슬림 혐오주의자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지지를 받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IS가 문제가 아니라 무슬림 자체를 혐오 종교 집단으로 여기는 병적인 사회 현상이 유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조성하였던 히틀러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인데 바로 이것이 IS가 바라는 구도인 것입니다.
무슬림과 반무슬림 구도 양쪽 모두 괴물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 IS라는 괴물과 히틀러의 아바타 같은 괴물들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무기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구도- 그래서 일부 영성가들은 적 그리스도가 이들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랑으로 세계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주님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를 하는 이들이 바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의 후예들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런 예측이 조금씩 현실화되어가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이런 반인륜적인 현상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무슬림에 대하여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면서 내 마음 안에서 울컥울컥 올라오려는 내 안의 괴물을 통제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누구나 괴물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분노와 적개심을 먹고 자라기에 기도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IS나 현대판 히틀러들이 던지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평화 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우리나라에서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은 적습니다. 서구 사회를 피로감에 젖게 만들려는 IS의 전략에 적당치 않은 나라이기에 그렇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IS가 문제가 아니라 북한이 문제이지요. -홍성남 마태오 신부님(가톨릭영성심리상담소장, 상담전화: 02-727-2516)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9>
국가와 나누는 대화 2014년 12월 18일. 미국과 쿠바가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54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하였다.
2015년 9월 23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을 사목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우리가 쿠바인들과 새로운 시작을 하는데, 귀중한 도움을 주신 데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이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교회의 노력이 결실로 맺어진 데 대해, 교황은 겸손하게 기쁨을 표현했다.
교황은 권고문에서 세상을 ‘복음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대화’라고 했다. 세 가지 분야로 크게 나누어 필요한 대화를 설명했다. ‘국가와 나누는 대화’, ‘사회와 나누는 대화’, ‘다른 신앙인과 나누는 대화’가 그것이다.
| ▲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태극기를 흔드는 어린이. 교회는 모든 것을 복음의 빛으로 재해석하여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을 국가 권력에 제시하고 그들이 나아갈 방향을 밝혀주어야 한다. 【CNS】 |
평화의 복음을 위한 협력
먼저 ‘국가와 나누는 대화’를 살펴보자.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평화의 복음’(에페 6,15)이다. 평화, 이 위대한 보편 가치를 수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교회는 모든 국가 권력과 국제적 권위에 협력하고 있다. 교회의 협력은 너무도 당연하다.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 그 자체가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나아가 인간과 자연, 우주와의 온전한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평화를 위해 사셨고, 부활하신 뒤에도 나타나셔서 평화를 기원해 주셨다. 그래서 교회는 국가와 평화를 위한 대화를 나누고자 노력한다.
| ▲ 2014년 대한민국 사목방문을 위해 서울 공항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맞는 박근혜 대통령. |
국가, 사회 공동선과 평화 증진해야
국가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설명해 본다. 국가는 모름지기 사회의 공동선과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적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기관이다. 교황은 이 모든 것을 국가의 책무로 설명하면서 교회도 최선을 다해 국가를 도와야 한다고 했다. 2014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그리고 동방정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까지 로마로 불러함께 올리브 나무를 심으며 평화를 다짐하던 교황의 모습은 교회의 역할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유엔이나 유럽연합 의회에서 한 연설과 활동도 그렇다. 그동안의 역대 교황들의 노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전 세계 모든 대륙을 여행하며 대화를 나누고 정치인들의 대화를 주선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쉽지 않은 문제
국제 질서 안에서 평화 문제는 그리 쉽지 않다. 국가 간의 과거 역사적 문제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질서와 이익이 상충되어 있어서, 모든 이의 희망처럼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위정자들의 부패와 부정 그리고 독재정권의 출현 등이 가세될 때에는, 엉킨 실타래를 바라볼 때처럼 난감하기만 하다. 어디에서 평화를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지, 어떤 시도를 해야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지, 참 어렵다. 이럴 때 우리는 기도한다. 성령께 지혜의 영을 내려 주십사 기도한다.
교황은 교회가 국가와 대화하며 도울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먼저 국가와의 대화에서는 보조성과 연대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국가가 모든 사람의 전인적 발전을 추구하도록 촉구한다. 또한 인간 삶의 근본 가치들을 분명히 제시하고, 정치 활동으로 옮겨질 수 있는 확신들을 전달하며, 그들의 정당하고 고유한 역할을 적극 지지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240항 참조). 모든 것을 복음의 빛으로 재해석하여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을 그들에게 제시하고 국가 권력이 나아갈 방향을 밝혀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인 것이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해야 한다. -홍기선 히지노 신부님
교황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해설 <23> 제5장 - 접근법과 행동 방식 ②환경에 관한 국제 공동체의 대화 “보다 더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이 정직하고 용기를 내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숨기려 하고 있는 그 문제가 야기할 비극들을 몸소 겪어야 할 사람들은 (곧 사회적 약자와 미래 세대는) 이런 양심의 실패와 책무의 실패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169항).
‘지난 세기 중반’부터 우리는 ‘하늘과 땅과 물과 뭇 생명’에서 중병의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연 환경의 악화가 무수한 사람의 삶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렸고, 사회를 고장 나게 했고, 불평등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았으며, 그 범위가 지구촌 차원으로 확산되었음을 고통스럽게 목격하고 있다.
이처럼 자연 환경과 인간 환경과 사회 환경에서 중병의 증세가 심각하게 악화된 덕분에(?) ‘이성과 지성과 책임감’을 지닌 사람들이 점점 더 강하게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이 행성은 우리 모두의 고향이며, 인류는 하나의 공동 가정에 살고 있는 한 백성”이라는 확신이다. 또 “지구촌 차원의 환경 및 사회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몇 나라만의 이해 관계”가 아니라 “지구촌 차원의 전망”에서 “하나의 공동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도 자각하게 되었다(164항 참조).
이 고통스러운 자각(19항 참조)은 ‘시민 사회’의 ‘대중적 토론과 헌신적이며 활발한 응답’을 이끌어냈지만, 세계 공동체의 ‘정치 및 경제 영역’에서는 그 대응 방식과 시의성에 있어서 시민 사회의 열망을 거의 담아내지 못하고 있음이 현실이다(165항 참조). 예를 들어, ‘1992년 리오 데 자네이로 지구 정상회의’는 ‘생태계를 돌보기 위한 국제적 협력’과 ‘오염 유발자의 비용 부담 책무’와 ‘환경 충격 평가의 의무’ 등을 명문화했다. ‘지구 온난화’ 추세를 되돌리려는 노력으로 ‘온실 가스의 대기 집중을 제한한다는 목표’를 설정했고 ‘생물 다양성에 관한 행동 계획을 갖춘 의제’를 채택했으며, ‘삼림에 관한 원칙’도 밝혔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일부 분야에서 ‘긍정적인 결실’을 맺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그 성적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협정 이행 감시 장치’와 ‘정기적 조사’와 ‘협정 불복종에 대한 제재 수단’ 같은 ‘효율적이고 유연하며 실질적인 협정 이행 수단’을 아직까지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67-169항 참조).
‘효율적이고 유연하며 실질적인 협정 이행 수단’을 마련하지 못한 원인, 곧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루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교종은 ‘공동의 책임’과 함께 다음과 같이 ‘차등의 책임’을 분명히 밝힌다. “보다 더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이 정직하고 용기를 내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지구촌 차원의 공동선보다 자국의 이해관계”를 앞세울 정도로 ‘보다 더 힘이 세고 [지구를] 가장 많이 오염시키고 있는 나라들’은 어느 나라를 말하는 것일까?(169항) 특정 국가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조사하면 다 나온다.’
회칙의 언어를 빌면, 이들 나라의 태도는 정직하지 못하고 비겁하며 무책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교종은 이를 “양심의 실패와 책무의 실패”라고 단언한다. 그런데 그 실패의 대가를 지불하는 데 있어서, 말을 만든다면, 일종의 ‘역차등의 고통’이 발생한다. “우리가 숨기려 하고 있는 문제들”이 야기할 비극은 누가 더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있는가? “오늘날 국제 공동체에서 벌인 토의에서 우리가 경솔하게 미뤄놓았고, 그에 따라서 우리가 초래한 나쁜 결과들”의 고통을 누가 짊어질 것인가? 오늘날 사회적 약자이며, 내일의 세대다. 그래서 회칙은 단호하게 경고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무책임한 시대”로 기억될 수 있으며, ‘부정직과 비겁함과 무책임과 실패’를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169항 참조). 일부 진영에서 교종을 격렬하게 비난한 배경을 짐작할 만하다.
우리가 일상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차별적 언어가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 말이다. 흔히 경제적으로(물질적으로) 앞선 나라와 뒤쳐진 나라를 지칭한다. 그러면서 일부는 그 ‘선진국’을 동경하고 그 ‘후진국’을 무시한다. 그 나라 국적의 시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우리가 동경하고 닮으려 하는 그 ‘선진국’ 가운데 일부 나라는, 회칙의 문맥을 따르면, ‘정신적 도덕적 후진국’이라 부를 만하다.
회칙은 경고에 그치지 않고 경계와 고발로 이어진다. 그대로 옮겨놓는다. “‘탄소 배출권 거래 전략’은 새로운 형태의 투기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 투기는 세계 차원에서 오염 가스 배출을 감소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전략은 일종의 ‘환경에 대한 책임이라는 가면’을 쓴 것일 뿐이며, 빠르고 쉬운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 전략은 단순히 일부 나라들과 영역들의 과소비 유지를 허용하는 술책이 될 수 있습니다”(171항). 그런 전략들은 겉으로는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더 나쁜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될 수 있다. ‘산업화된 나라’의 과소비를 유지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나라들과 사회적 약자를 ‘궁지’로 내몰 수 있기 때문이다(170항 참조).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 투기와 가면과 술책은 언제나 ‘더 나쁜 불의’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님
[그림으로 보는 복음묵상] 물음표와 느낌표]
사랑도
가정도
신앙도
모두 모두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어가는 방법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51)
-임의준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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