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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문화탐방을 함께 하다가 중간에 개인 사정으로 먼저 귀가하신 이해진 학우님이 아쉬움을 홀로 다시 탐방하여 기행문까지 제게 보내 주셨습니다.
함께 하지 못해 문우 가족 모두 아쉬웠는데, 이렇게 멋진 글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ㅡ 도봉 문화 탐방기 ㅡ
2020년 11월 21일(토) 아침 일찍 묵주기도를 마치고 조반식사 든든히 채우고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지난 주말에 스터디 (문우사랑)에서 도봉구 방학3동에 위치한 김수영 문학관과 연산군, 정의공주 묘지를 들러보고, 간송옛집과 함석헌 기념관을 방문하는 ‘도봉 문화 탐방’에 참가한 28명 중의 일원이 되어 김수영 문학관을 관람하고, 도중에 개인적인 사정에 의하여 귀가하게 됨으로 대열에서 이탈한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나 홀로 탐방’에 도전하는 것이다.
혼자라는 것은 쓸쓸한 외로움이 있는 반면, 그 이면에는 홀가분한 자유로움이 있다. 이렇듯 인간은 이중성의 감정의 뇌를 가진 덕택에 또 다른 ‘로뎅의 조각상으로 움직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주말 11월 14일 ‘문우사랑 문화 탐방대’의 참가 일행 중 재학생은 ‘국어국문학과 학생회장’ 투표가 있는 선거일로서 서울지역 본부가 있는 뚝섬 역에 08시 35분에 도착, 학교 투표소에서 잠깐 대기하며 09시가 되자 제일 먼저 투표를 하며 느낀 점이 있다면, ‘국어 국문과 학생회’에서 ‘선거관리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면 사전에 회의를 하여 만반의 준비를 갖췄어야 함에도 투표 진행과정이 매끄럽지 못하였고, 두 사람의 회장후보자들은 각 스터디를 찾아 얼굴을 보이고 공약정도는 제시되어야 회장선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해서 심히 유감스러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3학년 김영선 선배께서 ‘국어국문과 학생회’ 사정에 밝은 탓에 투표 전에 후보자들의 간단한 신상이 파악되어 망설이지 않고 투표를 할 수가 있었다. 그 시각, 빛샘 학우인 김임생씨는 문화탐방을 가는 것도 아닌데 투표하러 투표장에 나타났다. 국어국문과 학생으로서 당연한 권리로 의무를 행사하겠다는 열의가 공부하는 학생으로 기본적인 자세가 갖춰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문화탐방의 재학생 모두 투표를 마쳐야 출발할 수가 있기에 대기실에서 모여 있을 때였다. 김승환 대표의 머리에 쓴 ‘빨강 카우보이모자’ 가 내 눈에 보이기에 “참 잘 어울림니다.” 하고 말 하였는데 갑작스레 모자를 벗으면서 내 머리에 그 ‘빨강 카우보이 모자’를 씌워 주더니 “아! 괜찮네요, 어울리는데 가지십시오.” 하는 게 아닌가!
“아니 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하였더니 “또 있습니다.” 하면서 여러 개가 들어 있는 박스를 가리키는데 어느새 모자박스에는 모여 든 학우들이 자기들에게 어울리는 모자를 찾느라 분주하다. 등산모, 중절모, 카우보이(보안관)모자가 세 가지의 형태로서 ‘문우사랑 스터디’ 선배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에 모두가 즐거운 마음이었다. 애써 주신 선배님께 지면으로 나마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나는 평소에 모자를 쓰면 어울리지 않아서 잘 쓰지를 않는데 그 날의 ‘빨강 카우보이모자’는 어떻게 괜찮아 보였는지 쳐다보는 학우들 마다 ‘잘 어울린다’는 말을 이구동성으로 하기에 ‘모자에 따라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모자’가 있는가 하면, 또는 ‘사람에 따라 그 모자에 어울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에 어느 쪽이 맞을까 생각을 하면서 선뜻 내게 모자를 건네 준 김승환 대표에게 재삼 고마움을 전한다.
다시 뚝섬 역에서 09시 40분 출발, 10분후 동대문 역에서 당고개 방면으로 환승하여 종착지 쌍문 역에 도착된 시각은 10시 10분, 2번 출구에서 합류하고자 하는 소수의 탐방대원 중 짝궁인 최숙자씨가 시간에 맞추어 반가운 모습으로 상면하면서 이현수씨가 챙겨 준 카우보이모자를 건네주고 있을 때, 마을버스(06)가 마침 도착되었으나, 인원이 많은 까닭에 두 팀으로 나누어 ‘김수영 문학관’에서 집결하기로 하였다. 아! 이때에 최숙자 씨와 카우보이모자를 함께 쓰고 사진 한 장 찍어 둘 것을! 머리 회전이 늦어 기회를 놓쳤다.
10시 50분에 탐방대원의 인원을 확인하며 ‘김수영 문학관’의 현관에 도착하자, 앞서 답사를 하고 오신 이용로 선배님께서 “코로나19 전염 확산으로 한꺼번에 입장하지 말고 두 팀으로 나누어 1층과 2층으로 번갈아 가며 관람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고 하신다. 전시장에는 김수영 시인의 삶에 대한 일대기가 적혀 있는 곳과 그의 작품과 사진, 유품의 진열대 앞에서 최숙자 씨가 찍어 준 사진은 ‘김수영 문학관을 관람한 인증사진’으로 그 사진 한 장이 ‘도봉문화 탐방’의 기념사진이 되었다. 왜냐? 얼마 후 아내에게서 온 전화는 “내가 있어야 해결될 일”이라는 연락에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문우사랑 기수별 소개인사’를 끝으로 ‘김수영 문학관’ 관람을 마치면서 이용로, 김영선 두 선배에게 간단히 말씀드리고 중도에 이탈한 시각이 12시였다.
1차 탐방으로 ‘김수영 문학관’을 관람한 내용을 보도록 하겠다.
김수영 시인의 프로필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1921년 11월27일 서울 출생 ~ 1968년 6월16일 교통사고로 사망.
학력은 연희 전문학교 중퇴.
데뷔 시 ‘묘정의 노래’ 1945년
수상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1999년 한국예술 평론가협의회)
금관 문화훈장 2001년
경력 평화신문 문화부 차장
선린상고 영어교사
작품으로 25권의 도서가 있다. 그리고 200여 편의 시와 시론을 발표하였다.
그의 대표족인 ‘시’로 ‘풀’ ‘푸른 하늘을’ ‘시여 침을 뱉어라’ ‘눈’ ‘달나라의 장난’ 등이 있다. 그가 교통사고 이전에 쓴 마지막 시 ‘풀’을 읽어보도록 하자.
ㅡ 풀 ㅡ 김 수 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었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눕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을 자작한 시인 김수영은 본래 모더니스트로서 도시생활과 현대문명을 비판하였으나 4.19 혁명을 마주하게 되면서 현실에 참여하는 시를 쓰게 된다.
시 ‘풀’에서 나오는 풀은 마치 독재정치로 자유를 억압받는 민중을 떠올리게 한다. 민중은 풀처럼 아무 힘이 없어서 눕지만 다시금 일어선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김수영에 대한 문학적 평론이 여럿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 유종호 평론가의 평론이다. 김수영의 시는 우리 시의 가장 벅찬 젊음이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탐구적이고 가장 준열하고 우상 파괴적이며 가장 유연한 시적 양심이었다. 30대에 맞은 김소월의 죽음보다도 40대 후반에 당한 김수영의 그것을 더욱 요절로 느끼게 하는 것은 거푸 태어날 수 있었던 그의 젊음 때문이다. 김수영은 탕진됨을 모르는 가능성이자 안타까운 미완성이었다.
김수영 시인의 성격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영화구경을 다녀오며 대로변에서 우산으로 아내를 때려눕힌, 그것도 아들이 보는 앞에서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며, 또는 순경을 보자마자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 올시다!” 라고 하며 절을 하는 기이한 행동은 평범한 보통사람과는 다른 기이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고교시절부터 영어를 유창하게 할 정도이고 모교(선린상고)에서 교편생활을 한 이력을 보면 수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부끄러운 자기 모습을 숨기기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자신의 고뇌를 그대로 관통하며 시의 대상을 향한 비애 속에서 자신을 벌거벗겨 투명하게 드러내는 점이 순수하게 세상과 맞서는 방법을 택했다고 보아야겠다.
‘나는 왜 조그만 일에만 분개 하는가’ 라는 시의 자탄에서 김수영 시인의 시집을 읽기 전에 그의 삶에 대해 조명해 보고 그의 ‘시’를 읽어보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시절이 수상해 고난을 겪은 현실적으로 비판적이고 철학이 담긴 당시의 상황을 표현한 현대시인이다. 내가 학교교재로 공부할 때의 김수영 시인은 아는 것만큼 보였고, 전시관을 관람함으로 보이는 것만큼 삶에 대한 진실을 느꼈으며, 그러한 진리를 터득함으로서 탐구(探究)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문우사랑 탐방대’ 행선지의 행로는 다음과 같다.
1. 김수영 문학관
2. 원당 샘 공원
3, 방학동 은행나무
4. 연산군 묘지
5. 정의공주 묘지
6. 간송 전형필 옛집
7. 함석헌 기념관
지난 주 ‘김수영 문학관’을 관람했으니 오늘은 나 홀로 ‘원당 샘 공원’을 찾아 나섰다. ‘김수영 문학관’에서 ‘원당 샘 공원’까지는 불과 1km도 채 안 되는 거리 10분정도의 거리로 아주 가까웠다. 가까이 보이는 팔각정의 정자에서 네 분이 좌담을 나누고 있기에 ‘원당 샘공원’을 물었다. 전방 좌측 50m라고 일러 준다. ‘엎드리면 코 닿을 곳’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원당샘은 오염되지 않도록 물이 고이는 윗부분을 시멘트로 봉했으며, 아래에서 물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뼘 정도의 길이로 된 플라스틱 파이프의 구멍을 통해 물이 나오고 있는데 나오는 물의 양(量)은 수돗물에 비할 바가 안 되지만, 산의 약수 물보다는 조금 많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물을 받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으로 앞서서 물을 받는 노인이 가족이 많은 탓인지 또는 욕심이 많은지는 알 수 없으나, 플라스틱 물통과 물병이 20여개가 되고 다음 순번의 대기자는 앞에서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을 보니 물 받는데 어려움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산보할 겸 수시로 와서 새로운 물을 받아가는 것이 물도 신선하고 건강에도 좋을 텐데 굳이 한 번에 많은 물을 받아 가시나? 하긴 나의 생각일 뿐이고 상대방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도 먹는 물로 인하여 고통을 감수한 기억이 있는데. 상당히 오래 전의 일로서 1979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가뭄이 극심했던 그 해 여름, 공동수도를 이용하던 당시에는 양동이로 수돗물을 받아 물지게로 날랐는데, 어느 날 수돗물이 끊기어서 당장에 먹을 물과 사용할 물이 필요한지라 출근을 지연시키고 방학 중에 있는 조카를 데리고 산 넘어 ‘장택상 별장’ 쪽의 계곡에 가서 조금씩 고이는 물을 네 시간에 걸려 바가지로 네 양동이를 채워서 물지게를 지고 돌아 온 추억이 있다. 벌써 40여년이 되었으니 현실과의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껴본다.
원당 샘물의 기원과 역사를 살펴본다. 이 원당샘은 600년 전 파평 윤씨가 정착해 살기 시작하며 만든 우물로 맑은 샘물을 공급하다 2009년 샘이 마르자 도봉구는 주민들의 요청에 의하여 다시 샘물을 복원하고 연못과 정자를 마련해 휴식을 할 수 있는 공원으로 조성했다는 기록이다.
샘터에서 약 50m 떨어진 윗길 우측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이는데 은행잎은 다 떨어지고 빈 가지만 앙상하다. 지난주에 다녀 온 ‘문우사랑 탐방대’가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린 사진속의 은행나무는 잎이 많았는데 한 주일이 지난 오늘은 겨울을 맞이하는 쓸쓸한 모습이다. 높이가 24m 둘레가 9.6m로 이 커다란 고목의 은행나무는 600년의 수령으로 나라의 큰 변고가 있을 때 불이 났다는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고 한다. 1968년 서울시 지정보호수 1호로 지정되었으며 2013년 서울시 기념물 제33호로 등록된 문화재라 하며 일상적으로 은행나무가 이토록 생명력이 강한 것은 나무 자체가 벌레들에게는 독한 향을 풍기는 재질로 벌레들이 섣불리 갉아 먹을 수 없는 특성을 지닌 나무이기에 오늘 날까지 지탱해오고 있으며, 흔하게 볼 수 있는 고목은 아니지만,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는 전국의 각지에 드물게 보존되고 있다. 서울에도 종로와 용산에 있으며 내가 거주하는 이웃동네 시흥5동 오거리에도 600년 되는 은행나무 암, 수 각각 두 그루 있는데 정조대왕 능 행차시에 은행나무 옆 관아에서 침수 (寢睡)를 묵고 화성으로 출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방학동 은행나무 앞에는 ‘연산군’의 묘역이 있는 곳으로, 묘역 관리실과 묘비는 너무도 초라해 보인다. 그 초라한 안내석에 ‘사적 368호 연산군 묘’라 한글로 적혀있다. 아주 오래된 안내석은 아닌 듯, 문화재 관리국이나 서울시에서 사적지로 기념해서 세운 것 같다. 아주 낮은 언덕의 묘역으로 올라서 가니 전시된 ‘안내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연산군 묘는 조선 10대 연산군(1476〰1506)과 거창군부인 신씨(1494〰1537)의 묘역이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의 사화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반정으로 폐위(1506년:중종1년)되고 이복동생 중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후
연산군으로 강등되고 강화도로 유배되어 그해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1512년(중종7년) 부인 신씨가 묘를 강화에서 이곳으로 옮겨줄 것을 요청하여, 중종은 1513년(중종8년) 왕자의 예에 따라 묘를 옮기고 양주군의 관원이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왕자의 묘제에 따라 곡장, 혼유석, 장명등, 문석인, 재실등이 갖추어져있다. 묘역에 있는 식물들은 조선 전기 능묘식물의 조형을 볼 수 있다. 제일 위 쪽에 자리한 두 봉분에서 좌측이 연산군 묘이며 그옆 봉분이 군부인 신씨, 중앙에 위치한 봉분은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의 묘이며 하단에 위치한 두 봉분은 딸 휘순공주와 사위 능양위 묘이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은, 뭔가 빠진 것이 있는데 골똘히 생각 끝에 있어야 할 ‘재실(齋室)’이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묘역의 형태가 좁아서 재실을 세울만한 공간이 없는데 ’안내문‘에는 재실이 적혀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내려오며 아무리 궁리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한 사항을 관리인에게 질문하려 하였으나 부재 중 이었다.
관리실 아래 행길(行路)에 서서 지나 온 길, 저 편에는 북한산이 보이며 그리 멀지않게 보이는 북한산이 이 동네에서도 오르는 등산로가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정의공주 묘지’를 찾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연산군 묘비’앞에서 주민에게 여쭈었더니 “길 따라가면 도로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다.” 고 말씀하신다. 10~15분이 소요되는 거리의 저 건너에 두 봉분이 보이며, 주변은 철책으로 출입을 막아 놓았다. 관람자의 입장에서 볼썽사납기 그지없다. 문화재로 선정되었으면 ‘홍살문’도 세우고 주변에 기와 담장 정도는 둘러놓아야 관람객들이 수긍을 할 텐데, ‘도봉구청 문화공보과’ 에서 예산문제로 단장을 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지는 못할 것 같다. 문화재를 이렇게 방치한 것이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다는 사실은 철책이 녹슬어 있음으로 입증이 된다. 그러한 일이 직무유기에 해당되는지 모르겠지만 외국인들이 지나다 보면 혀를 찰 것이다. 내가 도봉구민 이었다면 당장 구청 민원실에 민원을 접수시키겠다. 요행히 안내문은 철책 밖에 설치되어 읽을 수가 있었다. 내용인즉,
ㅡ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ㅡ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이곳은 양효공 안맹담(1415〰1462)과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의 무덤으로, 서측이 안맹담, 동측이 정의공주 무덤이다. 이들은 1428년에 결혼하여 4남2녀의 자녀를 두었다. 안맹담[본관 죽산(竹山)]은 초서를 잘 써 서예가로 명망이 높았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출중했다.
정의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책력과 산술을 잘 이해했다. 세종대왕은 특별히 정의공주를 아껴 저자도(옥수동 동쪽 한강에 있던 섬)와 낙천정(광진구 자양동에 있었던 정자)을 내려 주기도 했다. 안맹담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양효공(良孝公)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양(良)’은 온화하고 선량하다는 의미이며, ‘효는 어질고 은혜롭게 섬겼다는 의미이다.
불심이 깊었던 정의공주는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1469년『지장보살 본원경』(보물 제966호)이라는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무덤 앞에는 안맹담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 석등(石燈), 문관의 형상을 한 문인석(文人石), 묘 앞에 세우는 묘갈(墓碣)등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를 만들어 세웠다. 1466년에 세워진 안맹담의 신도비는 조선초기의 신도비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신도비의 윗부분에는 양효 안공 묘비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몸돌에는 안맹담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부부의 사돈이기도한 하동부원군 정인지(1396〰1478)가 지었으며, 글씨는 부부의 넷째 아들인 안빈세(1445〰1478)가 썼다.
정의공주 묘역을 끼고 곧장 걸으니 ‘사천 목씨’의 재실(祭室)이 아담하고 품격이 있어 보이는 것을, 산 비탈길 위에서 바라본 느낌을 적어 본다. 우리 동네 시흥4동에 속한 ‘순흥 안씨 양도공 묘역’에는 땅은 넓지만 제실 사당은 한 칸으로 되어 있어 조금 단조롭게 되어 있다. 반면에 이곳 ‘사천 목씨’ 제실은 여러 채가 있다. 직접 들어가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해 다음 행선지 ‘간송 옛집’으로 가는 길목, 산 속으로 들어가는 언덕길은 낙엽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지만, 별 불편을 모르는 채로 잠시 걸었는데, 그 숲속의 길은 북한산 둘레 길로 등산객들이 오고 가는 등산로이다. 고개를 넘어 가는 데는 15분이 소요 되었다.
아파트와 교회가 보이는 건너편에는 김장철이라 배추 씻는 아주머니들 에게 간송 전형필의 옛집을 묻자, “곧장 내려가 살짝 꺾어지면 보인다.”고 간단하게 답변한다.
곧 ‘간송 옛집’에 도착하였다. 소문난 갑부에 비해 집과 정원이 오히려 초라해 보일 정도로 단정한 한옥에 일제의 양식(樣式)[마루의 미닫이 문]을 가미해서 아담해 보인다. 그런데, 관람을 하려면 사전 예약이 있어야 하며 그것도 개인은 예약 불가이다. ‘간송 옛집’을 살펴본 다 해도 그 분이 구입해 소장한 보물들,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문화재는 ‘간송 미술관’에 보관하여 보존하리라 믿고 있기에 이곳에서 조선 제일의 갑부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 확인하나로 개념을 정리하면 그뿐이나. 단지 ‘문우사랑 탐방대’와 함께 행동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이곳 ‘간송 옛집’에 왔으니 간송 전형필의 족적(足跡)을 찾아 네이버 검색을 해보자.
한국의 교육가이자 문화재수집가로 민족문화재를 수집하는데 힘썼으며,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지원〮〮〮⦁경영하며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보성(普成)고보를 인수하여 교주가 되었으며 광복 후, 보성중학교 교장과 문화재 보존위원을 역임하였다.
출생⦁사망 1906년〰1962
본관: 정선
출생지: 서울 종로구
활동분야: 교육⦁문화재보존
주요수상: 문화포장(1962), 문화훈장 국민장(1964), 금관문화훈장(2014)
1906년 7월29일 서울 종로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전영기(全泳基)이며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무관 출신이며 배오개에서 미곡상을 경영했다.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고종사촌형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와 교류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1921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1926년 휘문(徽文)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휘문고 시절에는 야구부로 활동하였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928년 일시 귀국하여 스승 위창(葦滄)오세창(吳世昌)을 만났으며 그의 조언으로 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오세창으로 부터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929년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1930년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간송은 부친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논 800만 평이 넘는 거대한 재산이었으며 해 마다 2만 석의 쌀을 수확할 수 있었다. 간송은 중요한 서화를 수집하면서 안목을 키워 나갔고, 스승 오세창의 지도와 조언을 받아 ‘문화재’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사동에 소재하는 한림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경영하면서 고서적과 서화, 화첩 등을 수집하였고 한국의 중요한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의 막대한 재산은 국내문화재를 구입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전국의 거간꾼과 국내, 일본의 수장가를 찾아다니며 문화재를 구입하였고, 경매를 통해 문화적 가치가 높은 다수의 문화재를 수집하였다.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위해 1938년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현 (간송미술관)]을 세웠다. 1940년 경영난에 빠진 보성(普成)고보를 인수하여 교주(校柱)가 되었으며, 1945년 광복이 되자 보성중학교 교장직을 1년 간 맡았다. 1954년 문화재 보존위원이 되고, 1956년 교육공로자로 표창을 받았다.
그가 막대한 돈을 들여 수집한 문화재 중에는 1942년 일본인 몰래 안동에서 기와집10채를 살 수 있는 거금 11,000원을 주고 구입한⟪훈민정음(訓民正音)⟫해례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서적⦁고서화⦁석조물⦁자기 등이 있으며, 10여정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가 소장한 문화재 중 신윤복의 화첩도 유명하다. 1962년 문화포장, 1964년 문화훈장 국민장, 2014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으로 간송 전형필에 대한 profile을 요약하여 적어 보았다. 그의 일대기가 두산 백과에 기록된 대로 필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많은 유산을 받은 만큼 많은 사람에게 베풀며 교육을 중시하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문화재 수집과 관리에 신념어린 열과 성으로 국가의 문화재를 보호하고 보존함에 경의를 표한다. 신문과 책자에서 그에 대한 존함은 들었어도 그의 신상을 모르고 지내다 이제 존함에 걸 맞는 위인임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특히 문화재는 구입하기도 어렵거니와 보존 관리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6⦁25전쟁 당시 중요문화재와 함께 부산으로 피신하여 자녀들과 함께 문화재를 지켰다는 사실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가 타계(他界)하기 2년 전에 발표한 에세이 「수서만록:(蒐書漫錄)]를 구입하여 책장을 열어 볼 날이 기대가된다.
이제 함석헌 기념관에 들리면 ‘도봉 문화탐방’은 끝이 난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 ‘함석헌 기념관’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 참! 버스 정류소 옆 부근으로 알고, ‘안내 표지판’을 찾았으나 보이지는 않고 지나는 사람에게 ‘함석헌 기념관’을 물어 보아도 ‘쇠 귀에 경읽기’로 묻는 사람마다 ‘모르쇠’ 이다. 최후 수단의 휴대폰의 ‘네이버 길찾기’를 살펴보니 ‘하이마트’부근 골목으로 방향의 표시가 되어 있는데 ‘하이마트’가 보이지 않기에 버스정류소 가까운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50m쯤 올라가니 그때 ‘함석헌 기념관’의 작은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무척 반가운 느낌이다. 기념관은 건물이 아니고 함석헌 선생이 거주하던 ‘가정주택’을 리모델링하여 기념관으로 등록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접수처에서 신상을 기록하고 체온측정 뒤에 관람이 허용되었다.
함석헌 선생이 쓰던 서재에 들어가니 작업공간에는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 의 초상이 걸려있으니 그의 사상을 흠모했을 수가 있다. 한문으로 쓰인 ‘무욕청정(無欲淸淨)’이란 문구의 액자가 눈에 들어 왔다. ‘욕심이 없고 맑고 깨끗하다.’는 해석으로 이 문구가 선생의 ‘좌우명’일 가능성이 높다. 세속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겠다는 의연함이 글귀에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거실 공간의 전시실에는 사진과 ‘시’가 어울러져 전시되어있다.
다른 한 곳에는 ‘주민 커뮤니티 공간’이 있는데 독서실로서는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지만, 소통의 장소로는 마땅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문제는‘방음장치가 되어 있느냐’하는 결과로서, 방음장치가 되어 있다면 적절한 소통의 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주민 커뮤니티’공간으로서는 취지에는 공감하나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세미나 실에 게스트 룸? 숙박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부는 관리인의 재량일 텐데 외국인 여행객은 가능하겠지만, 내국인 특히 지방에서 올라 온 관람자가 숙박 신청을 한다면 가능할까? 아쉽게도 관리인에게 그 말을 여쭈어 보지는 못했다.
함석헌 선생이 애써 가꾸었던 ‘백 동백’과 선인장은, 꽃을 사랑한다는 것 보다는 정서적으로 아담한 온실이, 그곳에서 평화를 느끼는 시간이었으리라? 평화! 다툼이 없는 세상, 우리의 안정된 생활은 건강한 몸과 건전한 정신이 진정한 평화인가? 천주교 성당에서도 미사 중에 교우들에게 “평화를 빕니다.”하는 인사를 매 주 한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의 가치가 ‘평화’였음을 이제 서야 알게 되는 배움을 찾게 되었다. 짧은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현관 입구 대리석 바닥에 쓰인 글이 있다.
“나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 중에서”
너는 거기서도 사랑의 보금자리 짓기를 잊지 마라
나는 빈들에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 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
기념관 입구의 아크릴 판에 쓰인 ‘시’를 그냥 지나치기가 못내 아쉬워 소개한다.
-그대는 웃으려나 - 함 석 헌
웃는 꽃 늘 웃을 듯 그대는 웃으려나 떨어질 그 생각에 난 마음 슬프오이
벗이여, 꽃을 알고서 뿌릴 가꿔 주소서
취한 술 늘 취할 듯 그대는 아시려나 깨어질 그 생각에 난 마음 씁쓸하이
벗이여, 술을 알고서 쓸개 마셔 깨소서
고운 옷 고울 듯 그대는 홀리려나 흐려질 그 생각에 난 마음 냉랭하이
벗이여, 사랑 말고서 참을 찾아 보소서
붉은 뺨 늘 붉을 듯 그대는 아끼려나 늙어질 그 생각에 난 마음 두렵소이
벗이여, 삶을 알고서 죽음보고 사소서
또 다른 하나의 ‘시’를 읽어 보자 이 ‘시’는 가로로 쓰여 있어 읽기가 쉬운 반면에 투명의 아크릴로 햇빛의 반사로 뒤편 건물이 글자와 겹쳐서 집중력이 필요하였다.
-마음에 부치는 노래- 함 석 헌
세상이 거친 바다라도
그 위에 비치는 별이 떠있느니라
까불리는 조각배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눈 떠 바라보기를 잊지 마라
역사가 썩어진 흙탕이라도
그 밑에 기름진 맛이 들었느니라
딩구는 한 떨기 꽃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뿌리박길 잊지마라
인생이 가시밭이라도
그 속에 으슥한 구석이 있느니라
쫒겨가는 참새 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사랑의 보금자리 짓기를 잊지마라
삶이 봄 풀에 꾼이라도
그 끝에 맑은 구슬이 맺히느니라
지나가는 나비같은 내 마음아
너는 거기서도 영원의 향기 마시기를 잊지 마라
‘시’를 읽어보며 ‘고단한 세월이지만 스스로가 깨어있는 존재의식으로 시대적 소명과 함께 개인의 의무를 강조함이 엿 보인다’ 는 어느 국문학도의 시평(時評)이다.
이제 함석헌 선생의 족적(足跡)을 살펴보자.
출생: 1901년 3월13일 평북 용천
사망: 1989년 2월4일
가족: 슬하 2남5녀
학력: 도쿄고등사범학교
수상: 2002년 건국훈장, 1987년 제1회 인촌상 출판언론 부문
경력: 오산학교 교사
1984〰1989.02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
1985: 민주제도 쟁취 국민운동 대회 대회장
작품: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인간혁명, 역사와 민족 등
정의: 기독교 문필가이며 민중 운동가
개설: 당숙 일형(一亨)이 세운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4년 덕일학교(德一學校)를 졸업하였다. 1916년 양시공립보통학교(楊市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그 해 평양 고등 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1919년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1921년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때 안창호(安昌浩)⦁이승훈(李昇薰)⦁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ㅡ생애와 활동사항ㅡ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 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성서조선:聖書朝鮮⟫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류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성서조선⟫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을 서대문 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1947년 3월 월남하여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였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기탄없이 비판하였고,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면서 자유당 정권에 도전 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로 군사혁명정권에 도전하였다. 1962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을 때 케이커교(Quaker敎)와의 친밀관계를 굳혔다. 1967년 장준하(張俊河)의 국회의원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70년 4월⟪씨의소리⟫를 창간하였고,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주요 저서로는⟪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 ⟪인간혁명⟫(1961) ⟪역사와 민족⟫(1964)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 ⟪통일의 길⟫(1984)등이 있다.
함석헌이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는 흔히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겸 문필가로 민주화운동을 하며 3공화국 그리고 유신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고, ‘폭력에 대한 거부’ ‘인권에 대한 저항’등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선 분으로 알려져 있다.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역사인식 문제’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함석헌이 남긴 글들은 참 많다. 대부분이 기독교 사상과 관련된 것 그리고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쓴 논설들이다. 그런데 그가 ‘시’도 썼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면 ‘시’라기 보다는 기독교적인 가르침 혹은 삶의 지혜를 짧은 글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꼼꼼히 살펴보면 기독교란 종교를 넘어 문학적으로도 훌륭한 작품이 꽤 많다. 1947년에 발표된 ‘시’⟨그 사람을 가졌는가⟩가 그런 작품이다. 해방공간에서 항일과 친일 혹은 민족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사이에서 핍박받던 그의 깊은 고뇌를 읽게 된다. 물론 단순히 그런 고뇌만은 아니다. 70년이 훌쩍 넘은 지금 읽어도 우리네 삶에 커다란 화두로 다가온다.
제목: ‘그 사람을 가졌는가’ 는 ‘시’속에 여섯 번 반복되는 독자를 향한 시인의 물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다. 여기서 그 사람은 사람일까, 바로 여섯 가지 경우 혹은 상황을 예로 들어 제시한다. 바로 먼 길을 나서며 처자를 맡길 수 있는 사람, ‘온 세상 다 나를 버려’도 믿을 수 있는 사람, 침몰하는 배에서 구명대를 건네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음을 맞게 될 때에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저 만은 살려 두거라’ 고 일러 줄 사람, 죽음의 문턱에서 ‘저 하나 있으니’ 하며 안심할 수 있는 사람, 온 세상이 다 ‘예’라 하더라도 당당하게 ‘아니오’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이다. 시인은 바로 이런 여섯 가지 경우의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고 묻는 것이다.
전체 여섯 연으로 나누어 매 연마다 서로 다른 상황을 제시하고 그 속에 시인이 제시하는 ‘그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친구가 아닐까 죽을 때 자신을 알아주는 진정한 친구 한 사람만 있어도 성공적인 인생이라 그랬던가, 지금이야 ‘친구’란 말을 쉽게 쓰지만 사실 친구(親舊)는 벗 우(友)나 동무와는 그 개념이 다르다. 목숨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 즉 나를 위해 죽어 줄 사람이다. ‘시’ 속에서 말하는 ‘그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을 일컫는다.
이런 ‘시’를 시의 이론으로, 논리적으로 해석하려 하면 그 의미를 놓치기 쉽다. 문예 미학적으로 접근하여 시의 완성도나 시적 아름다움 혹은 미적가치를 따지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1연과 5연이 내용상 중복이 아닌가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제시한 상황은 조금 다르다. 물질적인 먼 길과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란 차이이다. 여섯 번 반복되는 시인의 물음, 그리고 여섯가지의 상황에서 제시한 ‘그 사람’을 생각하며, 살아오면서 나는 과연 ‘그 사람을 가졌는지, 나아가 내가 누군가에게 ’그 사람이 되어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시인은 바로 삶의 지혜, 어쩌면 인생의 화두를 던지는 지도 모른다. [평론가, 이 병 렬]
ㅡ 그 사람을 가졌는가 ㅡ 함 석 헌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 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시’는 1947년에 발표된 ‘시’이다. ‘함석헌 기념관’의 관람 시간은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귀가 길의 ‘쌍문’역까지는 마을버스로 다음 정거장이다. 도봉구에는 김수영, 전형필, 함석헌 외에도 명망이 높은 위인들이 또 있음은, ‘원당 샘공원’ 에 현대사 인물을 소개한 ‘안내판’에 게재되었다. 벽초 홍명희(1880〰1968), 고하 송진우(1889〰1945), 가인 김병로(1887〰1964), 위당 정인보(1893〰1950), 전태일(1948〰1970), 계훈제(1921〰1999) 등 훌륭한 인사들을 배출한 지역으로 자랑할 만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 ‘도봉문화탐방’을 실행한 결실은, ‘문사철’이 국문학도에게 주는 의미심장한 배움은 행선지가 여러 곳으로, 전공이 아닌 유익하고 융합된 지식을 얻게 됨으로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진짜 공부는 안목의 시야를 넓히는 것이었다.
‘도봉 문화탐방’에 앞서 사전 답사를 마치고 또 다시 후배들을 위해 ‘길 안내’를 자처하신 이용로 선배님과 함께 답사 가셨던 선배님들께 지면으로 나마 고마움을 전한다.
2020년 11월29일 (문우사랑, 29기) 이 해 진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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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간에 먼저 가셔서 서운했는데 이렇게 혼자 다시 돌아보기 하시고 멋진 글까지 보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후배님 멋진 문화탐방기 고맙습니다~덕분에 이쁜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을 가졌네요^^
방학 알차게 보내시고 개학하면 반갑게 뵙기로 해요^^♡
긴 문장의 멋진글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