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부두
- 강 문 석 -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 만세삼창을 외치듯 우렁찬 함성이 울렸다. 조금 전 여객터미널에 들어섰을 때 텅 비었던 2층 입국대합실이었는데 관광안내센터에서 대마도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챙겨 나오는 사이에 단체로 입국한 모양이다. 그들은 젊은이들이었고 서른 명쯤 되어 보였다. 외국에 나가서도 공공장소에서 저런 짓을 해왔다면 ‘못 말리는 한국인’으로 낙인찍혀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다. 끔찍한 해상사고가 많은 세상이다 보니 무사귀환을 자축하는 의식 같았다. 대마도 여행을 이틀 앞두고 새로 옮긴 여객터미널 위치가 궁금해서 찾아 나섰다. 터미널에 막 도착하자 모레 만나게 될 여행가이드가 전화를 해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힌 뒤 “내일 만날 때 먼저 도착하면 연락주세요”라고 한다. 웃음이 나왔다. 내일 간다고 했느냐고 묻자 그는 내일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참 재미있네”라며 웃고는 모레란 걸 알려주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요즘 치매는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 제발 배가 산으로는 오르지 말아야 할 텐데 저런 정신을 가진 가이드를 만나다니 걱정이 앞선다. 앞서 위치했던 중앙동 여객터미널을 지날 때 차량의 주행계를 살폈다. 옮긴 초량동 터미널까진 1.5킬로미터 거리로 철도 부산역 뒤편이었다. 5층으로 앉힌 터미널 건물은 밖에서 외관만 봐도 으리으리했다.
착공에 들어간 북항 재개발지구의 북단으로 제4부두가 붙어있고 자성대가 가까이 보인다. 건물1층은 전체를 주차장으로 꾸몄다. 주차장은 햇살이 들면서 조명이 밝아 화려했다. 주차요금은 하루에 만 원. 부산항대교에서 바라보면 터미널 건물은 부산항의 또 다른 명물로 보이는데 건물 2층에서 바라본 바다와 대교는 앞이 가려 답답했다. 세계적인 해양관광도시인 부산의 관문으로서 크루즈와 컨퍼런스, 여가와 휴식을 제공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복합여객터미널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국제회의장과 다목적이벤트 홀이 들어있는 5층을 올라야만 할 것 같았다. 대마도로 떠나면서 보기로 하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반세기 전 하숙집은 부산항부두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영주동 달동네였다. 하숙집 주인은 부두에서 막일을 했고 당시에도 이미 노년에 가까웠다. 직장이 귀했던 시절에다 이북에서 피란 나온 처지라 일당벌이로 나섰던 것 같았다. 그는 늘 얼큰하게 취해서 귀가하곤 했다. 육체적인 노동이 힘들어서였는지 아니면 고향을 등진 시름 때문이었는지 불콰하게 취해 노래를 흥얼거리며 귀가하는 그의 손엔 늘 생선이 두세 마리 들려있었다. 밤중에도 쉬지 않고 수시로 뚜우 불어대는 부두의 뱃고동 소리는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년의 마음을 헤집으며 고향으로 달려가게 했다. 당시의 부산항부두는 월남으로 떠나는 국군용사들과 독일로 떠나는 광부와 간호사들까지 환송하던 장소로도 숱한 애환을 남겼다.
지금 마흔 중반에 이른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 학부모로 만나 몇 십 년을 가까이 지내고 있는 아내의 친구도 파월장병 환송식에서 반려자를 만나 한평생을 살았다. 사선을 넘나드는 베트콩과의 전장에서도 여고생과의 펜팔은 끈질기게 이어져 결혼에 골인했다니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처럼 드라마틱하다. 우리나라 가요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는 부산항에 대한 노래들도 많이 태어나 심금을 울렸다. ‘잘 있거라 부산항’이나 '울며 헤진 부산항'처럼 곡목에 항구 이름이 들어간 노래로부터 ‘첫사랑 마도로스’ ‘마도로스 부기’ ‘마도로스 박’ ‘쌍고동 우는 항구’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이다. 당시 팍팍했던 나의 삶에도 그 노래들은 적지 않은 위안을 안겨주었다.
부두엔 시멘스클럽sea men’s club도 있었다. 신혼 초부터 이웃에 살았던 사진가는 가끔씩 그 클럽에 날 달고 가서 주로 외국인 선원들이 고객인 레스토랑에서 양식을 먹었다. 산부인과 의사가 사진에 빠져 부전시장 입구의 병원에다 암실까지 차려놓고 늘 카메라가방을 메고 출근하던 기인이었다. 그는 클럽의 회원권을 가지고 있어서 그곳 출입이 자유로웠다. 20여 년 전까지는 대마도를 자주 드나들었다. 대마도 마니아가 가까이 있어서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찾아가기 좋은 50킬로미터 거리에 그것도 외국이다. 우리 땅 대마도를 되찾고자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대여섯 차례나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지금 멀쩡한 우리 섬 독도를 넘보는 일본인데 한 번 자기네 손아귀에 들어온 섬을 다시 돌려줄 리가 없었다. 우선은 주7회 우리나라 국적인 오션플라워호가 대마도의 이즈하라항과 히타카츠항을 하루에 2차례씩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다. 이렇게 국력을 키워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버렸던 땅 대마도도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란 희망을 가져본다. 2년 전 성당 교우부부 10여 명과 대마도를 찾았을 때 이즈하라 시내에서 곧바로 유명산 정상을 오르자 부산에서 온 40대 주부 3명이 먼저 와있었다. 남편들은 낚시를 갔다고 했다. 귀국하면서 보니 그 남편들은 놀랍게도 낚시로 잡은 바닷고기를 한 사람당 3개의 쿨러에 가득 채워서 뒤뚱거리며 손수레로 운반하고 있었다.
일전 대마도 여행을 확정 짓기 전 후쿠오카에 강진이 났는데도 괜찮겠느냐고 여행사에 물었다. 대답이 걸작이다. 후쿠오카로 가려던 여행객이 대마도로 몰린다는 것이었다. 여객터미널 대중교통은 2개의 노선버스와 순환버스가 있었다. 반여1동에서 자갈치까지 가는 5-1번과 김해에서 서면을 경유하는 1004번이 터미널을 경유하거나 찾아간다. 버스 바깥에 내려서 있던 운전사는 내가 순환버스를 알아보고자 말을 건네자 싸우려고 덤비는 사람처럼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때 차량 앞쪽 정류장에 붙어있는 운행시간표가 눈에 띄어 카메라에 담았다.
첫댓글 역사의현장을 답사할수있도록 배려해주신 강 회장님의 노고에 감사합니다 수고하섰습니다 죽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