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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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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세도정치:23순조(왕후 안동김씨)-익종(풍양조씨)-24헌종(대왕대비 안동김씨,)/25철종(조대비)
이장희 추천 0 조회 532 15.12.27 23: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23대 순조 가계도

정조 - 수빈 반남박씨 박준원의 딸

제 23대 순조

차남 : 순조(1790-1834)

재위기간 : 1800.7-1834.11(34년 4개월)

부인 : 2명 / 자녀 : 1남 5녀

1부인

순원왕후

안동김씨

(김조순)

1남4녀

2부인

숙의 박씨

1녀

익종

(효명세자)

?(일찍죽음)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영온옹주

 

순조 즉위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 반남박씨이다.

비(妃)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 안동김씨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순조는 재위 34년 만에 45세의 나이로 죽었다

 

 1803년까지는 나이가 어려 영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경주김씨((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폐위를 주장했던 오빠 경주김씨 김귀주(金龜柱)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했다.

 

또한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1801년 1월 오가작통법을 시행했으며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제공 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천주교 탄압은 그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편집] 세도 정치와 봉건왕조의 모순 심화

순조는 1803년 12월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했다.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이교(金履喬)·김조순·김문순(金文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김달순(金達淳) 등이 주요인물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세도 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 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이에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양반관료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수탈이나 토호(土豪)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그렇지 않아도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홍경래(洪景來) 등이 부농(富農)·사상(私商)을 규합하여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1811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홍경래의 난은 무력에 의해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정부는 사회경제적인 근본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편집] 세도 정치 견제 시도

안동김씨 세도 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翼宗)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세자는 조만영을 비롯한 풍양 조씨의 세력을 끌어들여 김노(金潞)·홍기섭(洪起燮) 등 새로운 정치세력을 결집하고, 김조순을 평안도관찰사로 내보내는 등 안동 김씨를 멀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1830년 세자가 젊은 나이로 죽으면서 안동 김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대리청정기에 정국을 장악했던 인물들은 유배되었으며, 순조의 안동 김씨 견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뒤 안동 김씨 일문은 풍양 조씨의 협력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갔다.

 

.

[편집] 능묘

 
인릉

순조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인릉(仁陵)으로 왕비인 순원왕후 안동김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인근에는 태종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이 위치해 있다.

[편집] 가족 관계

 

조선 문조 =익종(翼宗), 효명세자 : 순조의 장남, 헌종의 아버지로서 추존왕

문조(文祖) 또는 익종(翼宗, 1809년 9월 18일 (순조 10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6월 25일 (순조 31년 음력 5월 6일))은 헌종(憲宗)의 아버지로써 조선의 추존왕이고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字)는 덕인(德寅)이며 (諱)는 영(?)이다.

 

1819년(순조 19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827년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청정 3년만인 1830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후에 아들 헌종이 즉위하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고종이 그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뒤에는 황제로 추존되었다.

 

 

 

정식 시호문조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文祖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로 재위에 오르지 못한 추존왕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조선 국왕중 가장 긴 시호를 가지고 있다.

 

세자 시절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흔히 효명세자(孝明世子)로도 불린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강목왕(康穆王)이다.

[편집] 생애

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 순조순원왕후의 장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나[1]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7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819년 음력 10월에 세자빈(신정왕후: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1827년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여, 안동 김씨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의 인물과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하였으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당한 소론계열 인사들을 추가로 등용하였다. 1828년에는 창덕궁 내에 연경당(演慶堂)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30년 5월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하였다. [1] 당시 그의 나이 22세였다.

 

사후에 아들인 헌종(8세)이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 뒤 그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였으며 이후 족보상 6촌이 되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이 그의 입승대통을 이어받아 왕(고종)으로 즉위하였다.[1]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899년에는 양자인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재추존되었고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역내에 위치한 수릉(綏陵)이다.

 
수릉의 문인석상

[편집] 긴 시호의 유래

1863년 신하들의 건의로 이듬해 홍운 성렬 선광 준상(洪運盛烈宣光濬祥)의 존호가 올려졌다. 1868년 11월에는 요흠 순공 우근 탕정(堯欽舜恭禹勤湯正)의 존호를, 1875년 11월에는 계천 건통 신훈 숙모(啓天建統神勳肅謨)의 존호가 더해지고, 1876년 11월에는 건대 곤후 광업 영조(乾大坤厚廣業永祚)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78년에는 다시 장의 창륜 행건 배녕(莊義彰倫行健配寧)의 존호가 더해졌다. 기태 수유 희범 창희(基泰垂裕熙範昌禧), 1886년 11월에는 입경 형도 성헌 소장(立經亨道成獻昭章)의 존호가 더해져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이 되었다.

 

이후 1900년 대한제국 수립 후 황제로 추존되면서 익황제가 되면서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가 되었다.

[편집] 가족관계

[편집] 기타

글과 춤을 좋아하여 직접 무용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그의 초상화는 여러 점이 있었다. 헌종 때 그의 어진이 그려졌고, 고종 때 다시 그의 어진이 제작되었다.

 

현전하는 것은 고종 때 그려진 어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중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동란으로 불에 일부 탔다. 그러나 영정의 훼손이 심하고 얼굴 부분을 알아볼수 없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2011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의 다른 문화유산과 함께 그의 초상화가 방치되는 것이 발견된 바 있다. 그의 초상화의 ‘익종어진’ (보물 1492호)는 심하게 구겨지고 일부는 찢겨져 나간 채 방치되고 있었다.[2]

 

현재 전하는 초상화로는 선원보략에 그려진 어진이 있다.

[편집] 주석 및 참고문헌

  1.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창덕궁(3) :: 네이버 뉴스
  2. “말로만 소중한 문화유산”...찢어지고 구겨져 윤곽조차 알 수 없는 문화재 상당수 해럴드경제 2011-09-20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 

제24대 헌종 가계도 

순조-순원왕후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
장남 익종-신정왕후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

제 24대 헌종

장남 :헌문종(1827-1849)

재위기간 : 1834.11-1849.6(14년 7개월)

부인 : 3명 / 자녀 : 1녀

1부인

효현왕후

안동김씨

(김조근)

자식없음

2부인

효정왕후

남양홍씨

(홍재룡)

1녀

3부인

궁인 김씨

 

 

 

일찍죽음

 

 

 

 

헌종(憲宗) 조선의 제24대 임금(재위 1834년 - 1849년)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장숙왕(莊肅王)이다.

제목 : 헌종 어진

설명 : 1827(순조 27)~1849(헌종 15). 조선 제24대 왕. 재위 1834~1849.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의 제24대 국왕
재위 1834년 ~ 1849년 : 16년간
왕비 효현왕후
효정왕후
부친 익종
모친 신정왕후 풍양조씨
이전 왕 순조
다음 왕 철종

 

 

[편집] 생애

효명세자(익종)와 신정왕후 풍양조씨의 아들로 태어나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0년에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동궁에 책봉되어 왕위계승자가 되었고,

 

1834년순조가 승하하자 8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안동김씨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나 15살이 되던 해에 직접 정치하기 시작했다.

 

헌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 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또 수재와 전염병 때문에 삶이 점차 어려워져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 사건이 2번에 걸쳐 일어났다.

 1836년에는 충청도에 있던 남응중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했으며 1844년에는 민진용이 역시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번의 모반 사건 모두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이 일으킨 것으로 이 시기에는 누구나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을 만큼 임금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

 

1845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조정의 허락 없이 제주도와 서해안을 측정하고 돌아가는 일이 있었으며 1846년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로마 가톨릭 탄압을 구실로 삼아 군함 3척을 몰고 와 임금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848년에는 외국의 배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황해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다.

 

바로 이 때부터 조선은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었지만, 조선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에 별다른 대책도 세우지 않고 각 당의 권력 장악에만 신경썼다.

[편집] 기해 박해

한편 헌종시대에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있었는데, 이를 기해박해라고 부른다. 당시 천주교는 1831년 천주교 조선대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승인될 정도로 크게 성장했으나, 조정에서 천주교에 우호적인 안동 김씨에 대항해 보수적인 풍양 조씨가 집권하여 대규모의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는데 이로 인해 1839년, 모방신부등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천주교 선교사들과 유진길, 정하상등의 평신도들이 새남터에서 대거 처형되고, 1845년에는 한국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천주교 사제김대건 신부가 순교하는 된서리를 맞았다.

 

9년 동안의 친정 기간 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투쟁에 휘말렸던 헌종은 국내는 물론, 조선 주변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다가오는 열강 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1849년 6월, 23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제25대 철종 가계도 

 

영조-영빈 전의이씨 이준철의 딸

 

장조(사도세자)+숙빈 임씨

 

은언군 3남 전계대원군

 

+용성부대부인 용담염씨

(염성화의 딸)

제 25대 철종

3남 : 철종(1831-1863)

재위기간 : 1849.6-1863.12(14년 6개월)

부인 : 8명 / 자녀 : 1녀

1부인

철인왕후

안동김씨

(김문근)

자녀없음

2부인

귀인 박씨

자녀없음

3부인

귀인 조씨

자녀없음

4부인

숙의 방씨

자녀없음

5부인

숙의 범씨

1녀

6부인

궁인 이씨

자녀없음

 

 

 

 

 

 

 

 

영혜옹주

(박영효와 결혼)

 

 

 

 

7부인

궁인 김씨

자녀없음

8부인

궁인 박씨

자녀없음

조선 철종 : 14년간 재위


조선의 제25대 국왕
재위 1849년 ~ 1863년    14년간
왕비 철인왕후
부친 전계대원군
모친 용성부대부인
이전 왕 헌종
다음 왕 고종

 

 

철종(哲宗,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의 제25대 임금(재위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이다.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이다.

 

이복 형 원경의 옥사로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행상으로 살던 중 순조비 순원왕후 안동김씨의 명으로 덕완군에 봉해진 뒤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이었다.

 

초명은 원범(元範), 는 변(?), 는 도승(道升), 별칭은 강화도령, 는 대용재(大勇齋)이며,  그가 서출인데다가 강화도에서 나뭇꾼으로 있다가 왕이 되었다 하여 재위기간 중 반가에서는 그를 강화도령이라 조롱하였고 이는 곧 그의 별명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忠敬王)이다.

 

[편집] 생애

[편집] 출생과 가계

철종 이원범은 1831년 음력 6월 17일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 사제(私第)에서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의 아들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이광(李壙)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광은 본부인 최씨에게서 아들 회평군으로 추봉된 원경과 영평군 경응을 낳고, 후실 부인인 파주염씨에게서 원범을 얻었다. 1844년(헌종 10) 이복형 회평군(懷平君) 이명(李明)의 옥사로 인해 일가가 교동도(喬桐)로 유배되었으다가 곧 강화도로 옮겨졌으며, 기본적인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아버지 이광은 은언군서자인데다가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이 역모로 사사되었으므로 작위조차 없었다. 아버지 이광은 아들 철종이 왕위계승자로 내정된 뒤에야 전계군으로 추증되고, 다시 대원군으로 가증되는 형식으로 작위를 받았다.

[편집] 즉위

1849년 헌종이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자 순조비(純祖妃) 순원왕후(純元王后)안동김씨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가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곧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조선 왕조 왕위 계승의 기본적인 관례조차 무시한 행위였다.[1] 철종이 항렬상 선왕인 헌종의 후사는 될수 없어도, 헌종의 부친인 익종의 후사가 될 수는 있었다.

 

철종은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순원왕후 안동김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1년(철종 2년) 김조순(金祖淳)의 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철인왕후 안동김씨)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김문근을 위시한 안동 김씨세도 정치가 계속되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사실상 실권은 안동김씨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1859년 관리들의 부정 비리를 지적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안동 김씨의 세도가 강하여 그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기존의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으며, 결국 1862년 진주 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총칭한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고,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1862년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하였다.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각종 부가세를 혁파하고 도결(都結)이나 방결(防結)을 폐지하였으며,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편집] 사망

한편 1860년 경주 지방의 잔반인 최제우(崔濟愚)가 만든 신흥 종교인 동학(東學)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崔濟愚)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하였다. 천주교 또한 민중 속에서 계속 유행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이 또한 탄압하였다.

 

철종은 자신의 권력을 지지해줄 남인들이 집권층인 노론 벽파의 천주교 탄압으로 숙청당하고, 그 자신도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속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색(酒色)을 가까이 하여 건강이 점점 나빠지다가 1861년 이후로는 거의 병석에 눕다시피 했다.

 

1863년 음력 12월 8일에 재위 14년, 33살의 나이에 병으로 승하하였다. 그가 후사 없이 사망하였으므로 후사는 족보상 그의 7촌 조카뻘이며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이명복이 계승하였다.

 

[편집] 사망 직후

1862년 이후 자주 약방의 입진을 받던 철종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에 안동 김씨 세력과 풍양 조씨 세력은 서로 옥새를 손에 넣으려 했고, 흥선대원군은 이미 신정왕후 풍양조씨와 미리 밀계를 맺은 상태였다.

 

왕의 임종을 지켜본 신정왕후(=조대비, 헌종 母)는 재빨리 어보를 챙겨 후계자를 선포한다. 그는 흥선군의 적실 제2자 명복을 익종대왕에 입승대통한다고 선언하였고 이로서 고종이 즉위하게 된다. 이후 철종의 시신은 빈전에 안치되었다가 경기도 고양에 장지가 정해졌다.

능은 고양에 있는 예릉(睿陵)이다.

[편집] 가족 관계

  • 부 : 순조숙황제
  • 모 : 순원숙황후 김씨
  • 사친 부 : 전계대원군
  • 사친 모 : 용성부대부인 염씨
  • 왕비 : 철인장황후 김씨(哲仁王后 金氏,1837년-1878년)
    • 원자(元子,1858년 음력 10월 17일 ~ 1859년 음력 4월 23일)
  • 후궁 : 귀인 박씨(貴人 朴氏)
    • 왕자(王子,1854년 음력 7월 10일 ~ ? )
  • 후궁 : 귀인 조씨(貴人 趙氏)
    • 왕자(王子,1859년 음력 10월 13일 ~ ? )
    • 왕자(王子)
  • 후궁 : 숙의 방씨(淑儀 方氏)
    • 왕녀(王女)
    • 왕녀(王女)
  • 후궁 : 숙의 범씨(淑儀 范氏)
    • 영혜옹주(永惠翁主,(1859년~1872년 음력 7월 4일) - 하가 금릉위(錦陵尉) 박영효 朴泳孝, 1861년~1939년)
  • 후궁 : 숙의 김씨(淑儀 金氏)
    • 왕녀(王女)
    • 왕녀(王女)
  • 후궁 : 궁인 이씨(宮人 李氏)
    • 왕자(王子, (1862년 음력 윤 8월 8일 ~ ? )
  • 후궁 궁인 박씨(宮人 朴氏)
    • 왕녀(王女)

[편집] 기타

그의 후궁에게서 난 유일한 딸 영혜옹주노론가 출신 개화파 정치인 반남박씨 박영효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영혜옹주는 결혼 직후 사망했고, 후사가 없는 박영효는 고종의 배려로 궁녀 몇명을 첩으로 맞이한다. 그 중 한명인 범씨에게서 서자 2명을 얻게 된다. 한편 영혜옹주를 낳은 생모 역시 범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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