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으로 다가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오골성 풍경, 665년 이 부근에서 남생은 동생들과 최초로 무력충돌을 했다. 필자제공
당나라 지원병 요청…고구려 멸망 눈앞 당고종, 국제정세 살피며 상황 예의 주시 666년 5월 고구려의 섭정 남생의 장남 헌성이 당 조정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지금 얼마나 위험에 처해 있는지 말하고 원군을 요청했다. 사람들이 고구려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알게 할 장면이다. 연개소문의 후계자 남생 연개소문 때는 그런대로 굴러갔다. 하지만 그가 나아가 들어가자 후계구도를 염두에 두고 3형제에게 각각 접근하는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줄을 댄 주인이 권력을 잡기를 원했다. ‘일본서기’ 천지천황(天智天皇) 3년(664) 10월 조에 보면 “연개소문은 그 아들들에게 너희 형제들은 물과 고기같이 화목하여 벼슬자리를 다투지 말라”고 유언했다. 뭔가를 감지하고 아들들 사이의 불화를 우려했다. 장례를 마친 직후인 665년 초 장남 남생이 아버지의 지위를 물려받아 태막리지(太莫離支)가 됐다. 지방에서 새로운 섭정의 명령이 잘 먹혀들지 않았다. 대를 이은 집권을 탐탁지 않게 여긴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남생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무장하고 지방에 갔다. 그의 묘지명은 이렇게 전한다. “공(公)은 일이 중앙에서 집권적으로 되지 않아 바야흐로 나가 변경(邊境)의 백성들을 달래려고 하여 밖으로 황전(荒甸:변방)을 순정(巡征)하였다.” 묘지명을 보면 남생은 후계자로 키워졌다. 부친이 정권을 탈취한 642년에 9세의 나이로 선인(先人)의 관위에 올랐고, 고속 승진해 15세에 중리소형(中裏小兄), 18세에 중리대형(中裏大兄), 24세에 장군(將軍)이 돼 별을 달았다. 당군에 의해 평양성이 포위된 661년 28세 때 막리지(莫離支)로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이 돼 후계를 약속받았다. 그는 지방에 가면서 장남다운 면모를 보였다. 평양에 남은 동생들에게 내정을 맡겼다. 형제에게 줄 선 문객(門客)들 하지만 형제들에게 줄을 선 사람들이 문제였다. ‘일본서기’ 천지천황 6년 10월 조의 기록에 그들을 ‘측조사대부(側助士大夫)’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고구려 전통 귀족 출신이라기보다 일종의 문객(門客)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는 그들의 이간을 전하고 있다. 한 사람이 말했다. 형은 동생들을 제거하려 합니다. 먼저 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평양을 비우고 북쪽 여러 성을 돌고 있으니 절호의 기회입니다. 동생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쪽은 형이었다. 그의 수하들이 말했다. 동생들이 막리지 각하가 평양으로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위임받은 권력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형은 사람을 평양에 밀파해 사정을 살펴보게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동생들의 수하들에게 체포됐다. 줄을 선 사람들끼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같다. 체포된 자가 남건·남산 앞에 끌려갔고 고문이 행해졌다. 고통을 못 이겨 ‘감시’ 사실을 불었다. 동생들은 형이 일을 꾸미고 있다고 확신하게 됐고, 군사를 이끌고 형의 사저로 쳐들어가 박살을 냈다. 식솔들 가운데 일부는 목숨을 보전할 수 없었다. 형의 차남 헌충(獻忠)이 살해됐다. 남생의 묘지명은 이렇게 전한다. “동생들은 형의 금쪽같은 어린 아들(幼子)을 단번에 살육했다. 공(公)은 형제간의 관계가 소원함으로써 눈물을 머금고 격문(檄文)을 사방으로 보내니 동맹(同盟) 세력이 많이 모여 마침내 창을 들었다.” 내전의 시작 동생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가 된 형은 구도(舊都)인 국내성에 둥지를 틀었다. 국내성 이하 6개 성 10만 호가 그의 세력권 안에 있었고, 목저성 등 부여 방면의 3개 성이 그의 편을 들었다. 형은 전쟁을 선언했다. “악(惡)의 근원을 사로잡아 없애겠다.” 국내성에서 출발한 그의 군대는 평양 진격을 목적으로 오골성(烏骨城) 교외에 이르러 슬견요새(瑟堅壘)를 깨고 동생들이 부당함을 선포했다. 그리고 북을 울리며 압록강으로 향해 전진했다. 동시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대형(大兄) 불덕(弗德) 등을 당 조정에 보내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의 묘지명에서는 “이반(離反)이 있어 불덕(弗德)은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고 하고 있다. 당에 군대를 요청하는 것에 대한 내부 반발도 생각해 봄 직하다. 고구려인들은 거친 전사이자 능숙한 궁수였다. 그들은 필사의 의지로 당나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한편 절대적인 군사력 열세를 경험한 직후 형과 그 수하들은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다. 남생의 장남 ‘천헌성 묘지명’은 이렇게 전한다. “공(헌성)은 손가락을 굽혀 적을 헤아리고서 대적하는 것이 결국 불가능하다고 여겨 (아버지) 양공(襄公:남생)에게 국내성에 머물면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고) 양공에게 이르기를 [지금 사신을 파견하여 중국(中國)에 입조하게 하되 정성과 성심을 다하면 중국에서는 대인(大人)이 왔음을 듣고 반드시 흔연히 맞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서 병력을 청하고 연합하여 토벌을 하게 되면 이것은 안전하고 반드시 승리를 하게 되는 계책입니다]라고 하였다. 양공은 그렇다고 여겨 여러 추장들에게 이르기를 [헌성의 말은 심히 택할 만하다]고 하였다. 그날로 수령(首領) 염유(?有) 등을 파견해 당에 들어가게 하니 당나라 고종은 친히 조칙을 내려 위무하고 다시 양공(남생)을 동도주인(東道主人)으로 삼고 대총관(大摠管)을 겸수(兼授)하였다.” 동생들에게 밀린 형 압록강 하류가 지척인 오골성 교외까지 진군한 형은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동생들의 군대를 보고 겁에 질렸다.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한 형은 장남 헌성의 권고로 국내성으로 물러나면서 재차 당 조정에 원군을 요청했다. 장기적 안목을 가질 수도 없었다. 오늘 당장 생존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었다. 고구려는 망해도 자신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지위는 보장받겠다는 것이었다. 사신 염유 등이 당 조정에 도착하자 당 고종은 남생을 당나라 대총관에 임명했다. 내전에 상황에 대한 구체적이고 소상한 정보가 당 조정에 알려졌다. 하지만 당군은 당장 움직이지 않았다. 앞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665년 2월부터 10월까지 당 조정의 실권자인 측천무후는 낙양에서 당 고종과 함께 태산에 봉선의례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봉선이란 천명을 받은 새로운 실력자의 등장으로 세계평화가 왔음을 선전하는 자리가 아닌가. 무엇보다 엄숙하고 거대한 의례와 축제가 예정된 마당에 고구려 상공에 떠 있는 시커먼 전운(戰雲)의 그림자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다. 666년 정월 하늘과 가까운 태산에서 봉선이 끝나고 그것을 현실의 땅에서 구현하는 축제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모든 것이 마무리된 그해 5월 헌성이 왔다. 이로써 고구려의 모든 핵심적인 군사기밀이 당에 넘어갔다. 장막에 가려진 고구려는 수대의 대외정책 전문가 장손성과 배구도 전혀 알 수 없던 곳이었다. 그러던 비밀의 빗장이 열렸다. 더구나 고구려에 내응할 남생의 군대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당의 고구려 침공에는 장애물이 있었다. 서역의 상황이 좋지 못했다. ‘돈황본토번역사문서’를 보면 666년 그해까지도 여전히 토번 섭정 가르동?(東贊)이 10만 대군과 함께 청해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토욕혼을 모두 점령한 상태였고, 한 해 전 정월 당 조정에 사신을 보내 황하가 청해성 홍해현을 지나는 적수(赤水)에 목축을 하겠다고 서안을 전달했다. 이것이 거절당하자, 3월 토번군은 소륵(疏勒:Kashgar)과 손잡고 타림분지 남부 최대의 오아시스 도시 우전(Khotan)을 공격한 바 있다. 당 조정의 결정이 문제였다. <서영교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