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발생한 여러 이슈들 중 파나마운하 통제권에 관한 이슈도 있습니다. 첨부한 영상도 꼭 같이 보셔야 충분히 이해를 하실 수 있습니다.
태평양을 최초로 바라본 유럽인은 스페인의 탐험가 바스코 누네즈 데 발보아였다. 그는 다리지엔地峽의 카리브해 쪽을 탐험한 후 1513년에 태평양에 도달,이를 스페인의 소유라고 선포했다. 1524년에 이미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5세는 이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의 건설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한 현지조사를 제의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의 뱃길이 2만 800km에서 8320km로 단축되는 데는 400년이 걸려야 했다. 1876년 나폴레옹의 종손으로서 당시 프랑스의 젊은 해군장교였던 뤼세엥 나폴레옹-보나파르트 위스는 운하건설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는 자금과 자재를 갖고 파나마에 도착했다. 위스는 이 지협에 대해 2년 동안에 걸쳐 철저한 조사작업을 마친 후, 당시 파나마지역을 소유하고 있던 콜롬비아정부로부터 미국이 부설한 파나마철도를 따라 해면과 같은 높이의 운하를 건설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위스는 운하건설계획을 파리지리협회에 제출했다. 이 협회의 회장은 수에즈운하의 건설자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였다. 1879년초 드 레셉스는 중부아메리카의 운하건설에 관한 여러 제안들을 검토할 목적으로 파리지리협회의 특별회의를 소집했다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이 내려져야 했다. 즉 운하의 건설장소를 파나마와 니콰라과 중 어느 쪽으로 정해야 했고 또 운하의 형태도 수평식(해면과 같은 높이의 운하)과 갑문식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했다. 레셉스는 이미 위스의 계획을 채택하고 위스를 운하건설 적임자로 밀어 주려는 심산을 굳혀 놓고 있었으므로 회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레셉스는 자기의 지혜와 영향력을 한껏 발휘해서 토론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위스의 계획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이상하게도 유일하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무명의 건설기사 고댕 드 레삐네뿐이었다. 레삐네도 파나마에 다녀온 경험이 있었는데, 그는 이 지대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수평식 운하를 건설하려는 계획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제의한 대안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순했다 파나마의 차그리스강을 댐으로 막아 기존의 호수와 연결해서 지협을 가로지르는 해면보다 높은 수면의 운하를 건설하고 운하의 양쪽 끝에는 갑문을 설치하여 수면의 높이가 점차 해면과 같아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레셉스의 지지자들은 레삐네의 의견을 묵살했다. 그러나 27년 뒤 채택되어 실현된 것은 레삐네의 아이디어였다. 레셉스는 새로 설립한 파나마운하회사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유럽과 미국에서 1년 동안에 걸쳐 굉장한 선전활동을 벌였다. 1881년 2월 프랑스 건설기사들로 이루어진 제1진이 파나마지협에 도착했다.8년 뒤 대홍수와 산사태,금융부정,열대질병의 만연 등으로 이 대공사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회사는 도산했다. 레셉스는 언론기관과 일반대중들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았고,기금유용혐의로 유죄판결까지 받았다 한때 프랑스의 영웅이었던 드 레셉스는 말년에 정신이상까지 왔고 1894년 사망했다.
레셉스의 실패원인을 살펴보면 우선 파나마와 수에즈는 지리적 조건이 전혀 달랐다. 수에즈운하는 3개의 기존 호수들을 이용할 수 있었고 운하의 대부분이 저지대를 통과했다. 파나마지협은 운하건설계획에 따르면 공사구간이 64km정도에 불과했지만 단층과 불안정한 암반으로 형성된 지질구조 때문에 공사는 지극히 어려웠다. 당시의 장비로서 해면에 도달하도록 깊게 지면을 굴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게다가 굴착과정에서 드러난 기술적 문제들 때문에 공사비용은 계속 치솟았다.더우기 공사를 둘러싼 횡령이나 폭리를 취하려는 업자들의 농간이 많아 공사비는 더욱더 늘어만 갔다. 레셉스는 두 공사 지역의 기후의 차를 간과했다. 이집트는 사막기후지만 파나마는 열대우림기후였다. 날씨의 변화도 전혀 딴판이었고 풍토병이 달랐다 레셉스는 중남미에 흔히 발생하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온 두 가지 질병-황열병과 말라리아에 대한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모기가 없는 건기에 파나마를 방문했던 경험만으로 파나마일대가 세계에서 가장 건강에 좋은 지역이라고 하면서 열대병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 1884년에는 황열병이 창궐하여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았고 노무자들은 공포에 질리게 되었다.
레셉스는 질병 원인이 개미라고 생각하고 개미 퇴치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일꾼들의 이불 위로 새까맣게 기어오르는 개미들을 막기 위해 침대 다리 밑에 커다란 물그릇을 놓으라고 지시했다. 개미들을 물에 빠뜨려 죽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라리아와 황열병을 옮긴 주범은 개미가 아니라 모기였다. 개미를 죽이자고 놓은 물그릇은 오히려 모기 번식에 더욱 도움을 주었다.
이집트는 비가 거의 오지 않았지만 파나마는 연일 비가 쏟아졌다. 산사태와 홍수가 수시로 발생했다. 그리고 지형적 차이가 있었다. 수에즈운하는 사막의 평원 15m만 굴착하면 되었다. 상대적으로 쉬운 공사였다. 그러나 파나마 운하는 열대우림 해발 150미터를 파야 하는 난공사였다. 마지막으로 홍해와 지중해는 해수면 높이가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태평양과 대서양의 바다 높이는 차이가 컸다. 그럼에도 레셉스는 고집스럽게도 수에즈 운하를 건설할 때와 똑같은 방식대로 공사를 진행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10년의 작업 기간 동안 3억5,200만 달러의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다. 그러나 진척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2만 2천명의 막대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천하의 레셉스라도 어쩔 수 없었다. 부도가 난 레셉스는 결국 포기했다. 1898년 파나마운하회사의 경영진은 손실을 일부라도 만회하기 위해 회사의 전자산을 1억 달러 정도에 넘기겠다고 미국에 제의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제의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미국의 철도회사들은 운하가 건설되면 대륙횡단 화물수송의 경쟁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프랑스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의회에서 로비활동을 벌였다. 미국-스페인 전쟁 중에 있었던 당혹스러웠던 사건만 아니었다면 운하건설권의 이양문제는 완전히 사장될 뻔했다. 1898년 3월에 전쟁이 일어난 직후 미국의 군함 '오리건'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카리브해를 향해 떠났다. 이 군함이 68일 만에 남미의 남단 케이프혼을 돌아 2만 800km의 거리를 항해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전쟁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파나마운하 건설의 중요성이 극적으로 부각되었고 드디어 미국의회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