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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여년 전에 팠던 사연많은 경인 운하
[아라 뱃길] 구체적으로 살펴 볼까요?
▼ 얼마 전 해양 수산부가 발간한 한국의
해양문화라는 책에서 인용했던 '금당도 어민의
고래 납치 작전'을 포스팅 했었다.
방대한 자료 수집과 현지 답사를 해서
만든 이 귀중한 8권의 자료집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고 도서관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까워서 앞으로도 흥미있는 내용을 종종
소개하기로 한다.
이번에는 영 정조 연간에 인천 앞바다와 한강을 잇는
운하를 뚫고자 많은 노력을 했으나 결국은 중간의
산에 막혀 성공하지 못한 비화를 소개한다.
그때 공들여서 팠던 미완성 운하의 일부 구간은
농수로로서 계속 사용되어 왔었고 지금 공사하고
있는 경인 운하인 아라 뱃길의 일부가 될 예정이다.
어떤 의미에서 조상들의 선견지명이 정확했다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겠다.
서해와 한강을 잇는 아라 뱃길.
옛 운하보다 더 북쪽으로 뚫고 있다.
[일부 인천 공항 고속도로와 병행]
김포 터미날에서 부터 일부는 옛 운하인
굴포천을 확장해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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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 운하에 대한 시도는 거의 천 년 전인
고려 시대부터 있었다.
고려 고종[1192-1259]때 무신 정권의 실력자
최이[崔怡]가 현 부평의 지세를 살펴보고
한강 물을 끌어 들여 운하를 만들려고 하다가
중지했다.대몽항쟁에서 육지 내륙과
소통하고자 하는 필요에서 였다.
조선시대 중종 때 김 안로[金 安老]가 역시
운하를 파다가 실패했다.
김 안로 [金安老,1461-1537]
조선 전기의 문신. 명문가 출신.
중종 딸의 시아버지.출중한 능력도 있었으나
권세를 지나치게 휘둘렀고 정적들을 무자비해서
숙청해서 조정 내외에 적이 많았었다.
나중에 사람 싫증 잘 내는 중종에게 버림받고
유배갔다가 사약을 받았다. .
허항,채무택과 함께 정유 삼흉으로 일컬어진다.
이 하천은 운하를 만들기 위해 내를 팠기 때문에
‘ 판개 또는 한자로 굴포[堀浦], 굴포천[堀浦川]
이라 한다.
※‘판 -> 파다. ↑ 개 -> 포[浦],삼개[마포]
김 안로가 착공한 운하 굴착의 구체적인 계획이나
실행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그 세부 사항은 알 수없다.
단지 숙종 실록에 굴포천이 짧게 언급이 되어있고
부평 읍지등의 지도에 굴포교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조선 왕조판 경인 운하는 300년 뒤에
정조의 입을 통해서 비교적 자세히 그 존재를 알린다.
정조 21년[1797]8월에 정조가 김포 장릉을
참배한 후 재상 채 제공을 인견한 자리에서,
“예전에 듣건대 김 안로가 40리에 조수를 통하려고
원통현까지 이르러 중단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만년 공호[拱護]해야 할 땅인데 어찌 인력을
드려서 착파 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김포 장릉 - 원종[선조의 서자로 인조의 아버지]과
왕비 인헌 왕후 합장릉
김 안로의 굴포 건설은 40리 길이었고 서해의
인천교, 당시 부평 번직이 나루 쪽과 김포의
한강 쪽에서 동시에 진행되어 약사사[藥師寺]앞
원통현까지 굴착했으나 개통 굴착에 실패함으로서
공사가 중단되었다.
따라서 원통현 앞의 주안 염전 수로는 인위적인
수로로 김 안로가 팠던 운하로 추정된다.
총합에서 말하자면 옛 경인 운하는 현재의 인천교에서
동암 역 앞에 이르는 주안 염전 수로[인천에서
파오던 수로]와 양천현 북포[지금의 김포공항
서북쪽]에서 굴포 교를 지나 부평 역 부근의
직포[한강에서 파오던 수로]의 합계 약 16킬로의
수로이다.
원통현의 개착 실패의 이유는 정확히 알 수없다.
그 무렵 기술과 능력으로 고개를 뚫기가 너무
힘에 붙여서 였을 것으로 추측 할 뿐이다.
민
김포 하류쪽에서 부평 상류쪽으로 올려다 본
굴포천 - 아라 뱃길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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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전설에 의하면 이 수로를 김 자점[金 自點]의
운하라고 불렀다.
김 자점은 청나라와 내통하여 효종의 북벌 계획을
밀고한 사람이라는 혐의를 쓰고 역적으로 몰려서
죽었다.
김 자점이 원통현을 파서 조선의 혈맥[계양산맥]을
끊으려고 획책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김 안로가 팠던 운하에 엉뚱하게 김 자점과
풍수지리설이 동원한 것은 백성들 사이에 평판이
나빴던 그와 운하 개통의 실패를 소설적으로
엮은 민간의 속설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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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뱃길의 두물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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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힘든 운하를 굳이 파려고 했는지를
그 배경부터 살펴보자.
한양은 조선 8도의 지리적인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대의 도시였으며 8도 최대의
소비처이다.
조선 오백년간 쌀이나 소금, 그리고 땔 나무
생선 같은 체적 큰 화물이 끊임없이 조선 8도의
최대 소비처 한양으로 흘러 들어왔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물류[物流]의 개념이
그 때에도 중요했었다.
지금은 경부선이나 경의선 같은 주요 철도가
서울로 향하고 있고
여기에 고속도로라는 물류의 수단이 부산하게
움직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런 근대적인
대형 운반 가능한 물류 수단이 없었다.
소가 끄는 수레가 있을 수 있다고 하겠지만
조선시대 소수의 주요 도로를 빼놓고는 수레가
통행조차 할 수가 없는 곳이 태반이었다.
지상 물류수단의 상당 부분을 사극 영화의
보부상들이 했듯 지게를 사용하거나 이 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의 허생원의
영업도구였던 나귀나 소의 등에 등짐을 지어서
날랐었다.
[ 박지원이던가? 중국을 다녀온 실학자 한분이
우리도 수레가 일상화되어야 물산이 발달한다고
썼던 것이 생각난다.
사실 일제에 의해서 건설이 주도되었던 도로망의
명칭이었던 신작로[新作路]가 탄생하고서야
수레가 급증하였다.]
그래서 의존했던 것이 수운[水運],선박이
대량 운송의 수단이 되었다.
특히 조정이 거두어 드리는 세곡미는
선박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가 수단이 되다 보니 한양이 끼고 있던 한강은
지금의 도로 와 철도의 역할을 톡톡히 했었다.
한양은 이런 면에서 아주 복 받은 수도였다,
한양을 끼고 흐르던 한강을
경강[京江]이라고 불렀다.
마포나루는 한강변에서 가장 큰 포구였고
아래 서강이나 용산, 한강진등은 그리고 강건너
영등포나 반포등 또는 송파등은 지금의 서울역이나
김포 공항, 인천 항과 같은 역할을 했었고
그래서 크게 번창했었다.
구한말 마포 나루 - 즐비한 기와 집과 수십척의
범선들, 그리고 강 건너 밤섬이 있다.
밤섬 모래 사장에 여러척의 범선이 보인다.
돛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건조중인 배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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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남한강을 통해서 충북 충주나 단양으로 통했고
북한강을 통해서 금강산으로 통했고 임진강을 통해서
문산 연천등 황해도와 강원도로 통했다.
한반도 내륙 심부[深部]의 여러 물자들,말하자면
목재, 양곡, 화목 등의 생활 필수품이 한강 상류에서
한양으로 들어와서 수요를 맞춰 주었으며 한강
하류를 통해서 세곡미는 물론 어물과 소금등 8도의
산물이 다 출입하였다.
화물은 물론 여객 운송도 있었다.
사료를 찾아보니 마포나루를 떠난 배가 제주도까지
가기도 했지만 중국으로 향하기도 했었다.
해방전에는 중국과 만주에서도 찾아 오는
배들이 많았다.
한강의 여객 터미널은 한말 경인선이
놓이기 전인 1886년 부터 창룡환이라는 작은
여객선을 시작으로 너덧 척의 증기 여객선이
인천과 마포, 용산 사이 노선을 운행되기도 했었다.
용산진이 있던곳 - 원효로는 이 용산나루때문에
생겨나고 발전했다.한국 최초의 화력 발전소도
이곳에 있었다.- 뱃 사람들이 출항전 무사 항해를
기도했던 부군당이 뒤 언덕에 아직도 남아 있다.
[용산 성당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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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운항 노선은 인천항에서 강화 해협을
통과해서 한강 하구로 들어와 통진과 김포 행주를
통과해서 용산과 마포로 들어오는 노선이다.
[ 점심쯤 출발하면 저녁 무렵에나 도착했다고
하지만 이용자들이 많았었다.]
기록에 의하면 17세기가 지나 한강의 수운은 더욱
발달하여 마포를 중심으로 한강을 내왕하는
선박의 숫자가 일년에 일 만 척이나 되었고
한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대소 선박이 2,000척이
넘었다.[큰 것은 일 천석의 쌀을 적재했었다.]
반입되는 쌀만해도 세곡미 30만석을 포함해서
소작미, 상업미등 연 100만석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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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한강가, 즉 경강에는 세 개의
세곡창이 있었다.
광흥창[벼슬아치 녹봉], 풍저창[궁궐 비용],
그리고 군자창[군량미]이다.
광흥창은 지금은 전철역이 생겨서 서울 시민들에게
잘 알려진 곳이 되었다.
대 규모 쌀 창고 단지는 그 이름을 남겼다.
광흥창 지하철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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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를 중심으로 경강 상인이라는 상업적
자본 집단들도 형성되었다. [
옛날 마포사는 황부자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사실 마포는 해방까지 부자가 많았다.
4대문을 넘어서는 마포로 최초로 전차 노선이
놓인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여튼 한강만 봉쇄되지 않았더라면 마포는
거대한 수산시장을 비롯해서 큰 내륙 수운의
항만으로 발달 했었을 가능성을 보인다.
마포 나루 덕에 생긴 마포 길은 지금 번화한
고층 번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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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물론 임진강도 수운이 발달하여 상류의
고랑포와 연천까지도 배가 드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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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던가 조선의 고종이 울릉도 개척을 결정하고
사람을 울릉도로 보내서 현지 조사를 시키고
거주하는 섬 사람중에서 울릉도의 촌장격의 사람을
뽑아서 임명했는데 그 사람 고향이 경기도
파주였었다.
나는 을릉도와 전혀 교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머나먼 경기도 파주 사람이 그 먼 곳에서
나타난 것에 정말 당혹스러웠다.
알고 보니 짐작이 가는바가 있었다.
파주를 흐르는 임진강가에는 한강을 통하여
서해로 나가거나 한양을 내왕하는 어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었고 한양에 인접한
덕분에 배들이 무척 바쁘게 오가는 강이었다.
문산포나 고랑포 그리고 연천이나 전곡까지도
배들이 내왕했었다.
인용한‘한국의 해양 문화’에 의하면
문산이나 고랑포등에 연평도를 내왕하며
어로 작업을 하는 큰 어선을 가진 선주들도
여럿 있었다.
울릉도까지 가서 살던 파주 사람도 장사 목적으로
임진강을 떠나 조선의 해안을 따라
흘러흘러 울릉도 까지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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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의 앞 밤섬은 한강을 운행하는 선박을 만드는
조선 산업의 센터로서 몇 백 석의 양곡을 싣는
대형선을 만들기도 하였다.
임진강을 운행하는 배들도 마포나루 앞 밤섬에서
만들었다.
일제시 이런 범선들 한척 건조비가 그 때 엄청나게
비쌌던 트럭 한대 구입비와 같았다고 하니
범선이라 해도 상당한 고가였음을 알 수가 있다.
백제가 400년 가까이 한강변인 하남에
도읍 했었다던가 이 성계가 계룡산에 도입하려다가
한양으로 바꾼 것이라던가 하는 것은 다 이런
한강이 주는 수운의 이점을 내다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드문 마포나루의 천연색 사진. 배들이 선수가
높은 중선들[조기 잡이 전용 어선], 여성들 옷차림은
봄철로 보아서 5,6월 조기철 연평 바다에서 들어온
어선들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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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게 번창했던 수운의 중심지 한양으로
통하는 통로로 한강 하구를 사용했으면 되었지
왜 굳이 인천과 한강을 잇는 운하를 뚫어야 했던가?
이유를 알아 보자.
한양 앞 한강 즉 경강으로 가는 항해로는
경기만과 염하[鹽河 - 강화 해협- 육지와 강화도
사이의 좁은 해로]를 지나 강화의 손돌목을 지나
한강으로 진입, 연미정과 통진 공암진 양화도
[합정동 앞]를 경유 서강을 거쳐 마포나
용산등으로 통하는 것이었다.
북쪽으로 본 강화 해협- 옛날에 염하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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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항로에는 항해의 장애가 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지형지물에 의한 것이었다.
황해도 장연의 장산곶, 태안의 안흥량과
마찬가지로 강화 해협의 손돌목에서는
조난 사고가 많았다.
※앞에서 말한 장산곶은 아버지 심 봉사를 위해서
팔려간 심청이가 다이빙했던 임당수와 가깝고
안흥량은 한국 유일의 바다 운하 안면도 해협과
가까운 곳이다.
손돌목은 김포와 강화 사이의 해협에 존재하며
강화의 광성보 용두돈대와 건너편
김포 덕포진 사이에 있다.
한강으로 진입하려면 손돌목을 피할 수 없었는데
여기에 한양 진입의 최대 장애물이 있었다.
손돌목에 설치된 두개의 돈대- 언덕위 손돌목
돈대와 해변의 용두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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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물밑에 가로 지르다시피한 돌다리같은
암초가 널려있어서 마치 문턱과 같이 되어 있고
그 중앙이 약간 오목하여 조수가 드나들 때에
물살이 드세게 빠르다,
조금 때 가보면 용두돈대 앞에 삐죽 삐죽 내민
암초의 끝머리들을 볼 수도 있다.
바로 이곳에서 숱한 침몰 사고가 있었다.
역사 기록은 1765년-1800년 사이 전국에서
세곡미를 운반하던 조운선이 해난 사고를
당한 일이 18번 있었는데 그중 6번이
이 손돌목에서 발생했다.
급한 물살을 타고 흘러가는 기동력 약한 범선들은
암초를 피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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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5월 31일 대동강에서 불탄 제네랄 셔먼호의
배상과 사과를 요구하며 내침했던 미 함대는
조선군의 도발을 유도하기 위해서 작은 증기선
포함 두 척을 해협 안으로 침투시킨다.
증기선 포함 모노캐시- 손돌목 암초와 충돌하여
침몰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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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척의 증기선은 두 돈대들로부터 엄청난 포격을
받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발도 맞지를 않았다.
그대로 진행하던 증기선중 한척인 모노케시는
바로 이 손돌목의 암초에 걸려서 선저가
파손당한 뒤 철수했다.
한국 침투 전 프랑스 함대로 받은 듯한 자세한
강화 해협 지도를 가지고 왔던 미 함대도
이 악명 높은 손돌목 암초에 대해서는
사전 정보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미군들이 그린 신미양요 작전도.- 놀랄만큼 자세히
강화 해협 양안의 지리 정보를 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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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케시는 작약도로 철수하여 땅이 들어나는
서해안 조수 간만의 차이 덕분에 썰물에
배를 해변에 얹혀 놓고 용이하게 수리할 수가 있었다.
미 해군 기록은 배의 선저 파손 부위를 직접 보면서
수리하게 만들어 준 서해의 차이 큰 밀물 썰물을
자연의 마술인양 아주 신기 한 것으로
특기 해놓았다.
서양배로 손돌목 암초들에게 손상을 입은 것은
이 모노케시가 최초이다.
손돌목에서 큰 피해를 본 두번째 서양배는
1889년 인천에서 영업하던 독일계 무역회사
세창 양행이 독일에서 도입해서 운영하던
제강호라는 제물포-마포 여객선이었다.
이 배는 좌초후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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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물양 [인천 앞바다]와 성창포에서 물길이
험한 강화 해협에 진입하기 전 정박하면서 물 시간을
기다리며 험난한 난코스 돌파를 준비하여야 했다.
제물양과 성창포는 수도 한양에 세곡미를 운반하는
기점에 있었다.
두 번째의 장애는 풍랑이었다.
풍랑과 손돌목이 만나면 대개는
통과 선박의 침몰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정조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구 선복[具 善復]이
손돌목의 형세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다.
“해안에서 손돌목을 바라보니 바야흐로 조수가
만조가 되었고 바람이 알맞게 불어주는 기회를
틈타 선박들이 꼬리를 물고 내왕하는데
사공들이 이 곳에 도달하면 아연 긴장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키를 조작하면서
정타[正舵-직진]로 중앙 항진하다가
측타[側舵- 좌우 회전]로 돌아 암초를 피한 후
다시 정타로 환원하기를 수차 되풀이 한다.
그러나 만약에 역풍을 만난다면 감히
통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처음에 순풍이
불다가도 바람이 돌변하면 반드시
암석에 부딪혀서 침몰하게 된다고 할 정도였다.”
윗 글은 사공들이 어떻게 조마조마하게 손돌목을
통과했으며 돛배의 향방을 가름하는 바람이나
조수의 속도가 얼마나 심각한 항해의 요소였는가를
잘 알려준다.
세 번째 장애는 서해안의 심한 조석의 차이였다.
경기지역에 접한 서해안은 전국적으로도
조차[潮差]가 심했다.
다시 말해서 조석 간만의 차이가 컸다.
서해의 조석은 만조와 간조가 하루에
두 차례씩 되풀이 되는데 그 시각이 일정하지 않다.
특히 손돌목은 만조의 최대 해면일 때가 아니면
통과하기 힘들다.
강화 해협만 통과했다고 해서 장애물이
다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한강으로 거슬러 오는 길의 행주 염창항[鹽昌項]은
물이 얕은데다가 수초가 많아서 큰 배인
세곡 운반선은 운행하기가 힘들었다.
즉 세곡을 가득 실은 대형선은 한달에 두 번 오는
사리 때나 만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었다.
따라서 이곳을 통과하려면 사리 때를 기다려 조수가
최대로 차서 수위도 높고 바닷물이 한강의 흐름을
느리게 할 때 기회를 타고 배를 운행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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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 나루 강중[江中]에 저런 모래 장애물이
있다는 사실은 1950년 한국전쟁의 기록에도
잠깐 얼굴을 내민다.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김포 공항까지 진격했던
미 해병대는 인천에서부터 가져온 LVT
[수륙 양용 주정]로 행주 나루를
야간 도강하려다가 북한군의 반격을 받았다.
1950년 9월 행주 나루의 수륙 양용 전차[LV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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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 병력은 일시 철수중에 모래톱에 두 량의
LVT가 걸려 탑승했던 해병들은 몸만 탈출해야 했다.
LVT는 다음날 다시 회수하였다.
그 모래톱이 앞의 염창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해병대 작전 상황도를 보면 지금의 행주대교
좌우에 두개의 긴 수중 모래톱이 그려져 있다.
이 곳이 염창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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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큰 세곡 선은 한강 진입 때 물때가
맞지 않으면 김포 반도 쪽 한강 어구의 강령포에서
일주일 씩 기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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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령포는 지금 해병대가 지키는 GOP내에 있어서
보기도 힘들지만 조선 시대에는 500여호의 민가와
각종 상점과 술집등이 있었던 큰 포구였었다.
분단이 안 되었다면 지금쯤 서울의 위성 도시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있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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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경강 항로의 장애 중에서도 강화 해협의
손돌목에서의 피해가 가장 컸다
위에서 수도 한양이 필요로 했던 수운의 중요성과
이를 오가는데 한강 하구로 가기 전의 강화 해협
통과가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무상한 세월이 바꾸어 놓은 마포나루의 모습
배들과 강변의 무수한 배들과 번화한 상가는
사라지고 한강 공원과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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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를 피하기 위해서 김포와 굴포[堀浦]사이에
인위적으로 운하를 조성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토목기술로 사실 경인 운하는
벅찬 사업이었었다
[조선시대 태안 반도에서도 안흥량이라는
험난한 곳을 우회하고자 운하 건설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절실한 이유들이 위에서 설명했듯이 있었던 것이다.
운하 건설이 성공하면 뱃길이 단축되어
운반비용이 경감되고 손돌목에서의 인명피해와
세곡의 손실을 막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경인 운하의 공사가 한창이고 굴포천을
확장해서 큰 선박이 한강까지 들어오게 된다.
한강은 원래가 물류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서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국토 분단과 다른 교통수단의 엄청난
발달로 한강은 그 중요한 기능을 상실해야 했다.
인천 - 한강 아라 뱃길의 상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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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 쪽과의 소통은 댐과 교량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하류를 통한 한강의
본래 물류 기능은 부분 회복이 된다.
운하가 활성화 되면 제주도나 일본, 또는 중국을
가는 여객선도 한강 선착장에서 타게 되고
지금 노량진 수산 시장도 서해의 어선들이
직접 입항하여 수산물을 출시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생태 이유를 들어서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이미
국민 혈세를 들여서 건설을 시작한 바에야
이익을 보고 있는 인천 공항과 같이 운영의
기술을 다하여 흑자도 많이 나고 국민의
사랑를 받는 운하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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