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만든 한 유대인 수용소에서 죄수복을 입은 어린이들이 철조망 밖을 바라보고 있다. 유대인들은 서구 역사에서 종종 희생양이 되곤 했다.
■ 희생양 삼기의 특징
일부 설계자의 ‘선동을 통한 착시현상’탓에 박해자는 잘못됐다는 것도 모르고 악행 동참
古代 번제·中世 유대인 학살·現代의 왕따까지 이어져… 더이상 문명의 일부여선 안돼
14세기 페스트가 프랑스 북부 지방을 휩쓸 무렵 광기에 가까운 여론이 형성됐다. 떠돌던 사악한 유대인들이 식수에 독약을 풀어 사람들을 살해한다는 것이다. 이런 여론은 곧 유대인 학살로 이어진다. 르네 지라르가 ‘희생양’이라는 책에서 밝히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 실화는 14세기 프랑스 시인 기욤 드 마쇼의 작품 ‘나바르 왕의 심판’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유대인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는데, 어떤 이는 교수형으로 능지처참이 되고 어떤 이는 물속에서 죽고, 또 어떤 이는 참수형으로 머리가 효수되었다.”(김진식 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났다. 1923년 일본 간토(關東)대지진 때 소문이 꼬리를 물고 악의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조선인이 폭동과 방화를 하며, 우물에 독을 탔다는 것이다. 소문은 곧바로 조선인 대학살로 이어진다.
희생양 이야기는 반복된다. 볼테르의 철학 소설 ‘캉디드’ 역시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리스본에 지진이 나자 18세기 당시 포르투갈의 유일한 대학은 이런 해결책을 내놓는다. “코임브라 대학이 지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비법이라며 내놓은 방책이란 바로 몇 사람을 골라 약한 불에 천천히 태워 죽이는 장엄한 의식을 군중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이봉지 역) 그래서 ‘비계를 안 먹는 사람들’, 즉 유대인의 풍습을 가진 사람들이 화형당한다. 코로나 시대인 오늘날엔 유럽의 한복판에서 엉뚱하게도 동양인들이 재앙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희생양이 된다.
이 이야기들이 알려주는 것처럼 희생양이 되는 것은 폭력을 행사해도 저항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이다. 이것이 희생양 문제의 첫 번째 특성이다. 희생양은 오늘날에도 곳곳에 있다. 학교, 회사, 정치 어디든. 조직은 목숨을 빼앗는 고대의 물리적 폭력 이상의 폭력성으로 사람의 희생양을 겨냥한다. 여러 성추행 사건들에서 쉽게 예를 발견할 수 있듯 피해자에서 희생양으로의 이행이 물 흐르듯 이뤄진다. 희생양이 체험하는 당혹감은 이렇다. 주변 사람들은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귀찮아한다는 것, 다수결이나 회의 등등 합리적이라고 위장된 절차를 통해 자신의 문제 제기와 처지가 얼마든지 터무니없는 우스꽝스러운 꼴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심하거나 공평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양하지만, 실은 이 시선 자체가 피해자를 뼈아픈 희생양의 처지에 놓이게 한다.
이것은 희생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두 번째 특성과 관련이 있다. 희생양은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의 사람들을 결집시킨다. 예컨대 예수를 희생양으로 삼은 집단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애초에 일치단결된 사람들이 아니다. 지라르가 말하듯 “평소에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다가도 예수를 처벌하는 데에는 완전한 합의를 이루고 있는 이 영향력 막강한 사람들”이다. 가해자들은 신념, 정치적 성향, 가치관 등등이 통일돼 있기에 한 사람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때 얻게 되는 이득이 비로소 이들을 통일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 이득이란 가령 기득권의 보호 같은 것이리라.
이런 희생양 만들기는 어떻게 일어날까? 아마도 ‘설계자’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희생양의 세 번째 특성이다. 물론 사건의 인과적 흐름 전체를 예견하는 전능한 계산자 같은 것은 없겠지만, 희생양을 계획하는 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설계자의 한 전형을 예수가 희생양이 됐을 때의 유대 대제사장 가야파에게서 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요한복음 11장 50절) 이런 식의 기획을 우리는 오늘날도 종종 본다. 피해자와 약자의 권한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을 위해 의도적으로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투명하게 보는 희생의 설계자가 ‘설령’ 있다고 한들, 희생양을 만드는 일은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참여 속에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이런 자발적인 참여가 가능할까? 악한 마음을 가지고서 누군가를 부당하게 박해하며 희생양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몇 명 있다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런데 한 조직 또는 사회 전체의 구성원이 억울한 피해자를 희생양으로 만드는 악행을 의도적으로 저지르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불합리해 보인다. 지라르가 말하듯 사정은 오히려 이럴 것이다. “희생양에 대한 그들의 비난이 아무런 명분도 없다는 것을, 정작 그 박해자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 역시 희생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복음 23장 34절) 사람들은 희생양을 박해하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희생양 문제의 네 번째 특성이자,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면모이다.
어떻게 조직의 대다수 구성원이 자신의 잘못을 모른 채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가능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위험스러운 것이 있다면, ‘선동을 통한 착시현상’이다.
억울한 희생양이 된 유명한 인물 가운데, 이집트로 팔려간 야곱의 아들 요셉이 있다.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 대장 보디발의 하인이 되고 신뢰를 얻어 그의 모든 살림을 도맡게 되지만, 이후 요셉을 유혹하다가 실패한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누명을 쓰고 희생양의 처지가 된다.
토마스 만은 요셉의 이야기를 ‘요셉과 그 형제들’이라는 소설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이집트 대장의 아내가 요셉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방식을 분석하고 있다. 이 방식은 한국 정치인들도 매우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수법, 일종의 선동 수법이다.
이집트 대장의 아내는 집안의 하인들 모두를 선동해 하나의 동질적인 공동체로 만들어 요셉을 박해하게 한다. “이집트인들이여!…강물과 검은 흙의 아들들이여!” 그녀의 이런 외침이 지금껏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집트인’이라는 배타적인 공동체를 창조한다. 보다 현실감을 느끼길 원한다면 ‘이집트’ 대신에 익숙한 특정 지역 명칭을 넣어봐도 좋을 것이다. 독일 민족사회주의의 박해 속에서 이 작품을 쓴 토마스 만은 나치 독일이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선동 메커니즘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 만의 입장에선, ‘이집트인’이라고 쓰고 ‘독일인’이라고 읽어야 한다.
이집트 대장의 아내의 저런 선동에 대해 토마스 만은 다음과 같은 매우 흥미로운 논평을 붙인다. “그녀의 청중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너나없이 술에 취해 있었다.…그들이 이집트인으로 태어난 것이 어디 그들이 잘나서 그런 것이었던가? 그저 태어나보니 이집트인이었을 뿐, 한마디로 그건 자연이 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행여 집안일을 제때에 하지 않고 거르게 되면 결코 좋은 꼴을 볼 수 없던 사람들이다. 이런 경우 커다란 가죽띠로 허리를 흠씬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이때는 이집트인이라는 고상한 출신 성분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른 때는 이처럼 각자의 실생활에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저 뒤쪽에 밀려나 있던 출신 성분을, 느닷없이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상기시킨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명예로운 이집트인이라는 자부심을 불러일으켜 하나의 공동체로서 파괴해야 할 대상을 향해 성난 입김을 불어달라고 선동하기 위해서였다.”(장지연 역)
사람들은 취해 있다. 아니 취한 것처럼 그들의 의식은 선동가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린다. 실생활에서는 약자로서 주인에게 매 맞고 고단한 노동을 겨우 해나가던 사람들이 느닷없는 ‘이집트인(독일인)’이라는 호명 속에 통일되며, 파괴해야 할 한 명의 유대인, 희생양을 표적으로 가지게 된다. 이집트인이라는 선동적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정체성 속에서 그들 모두는 정의로우며, 약자를 박해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학교에서 몇몇 아이들의 그룹이 왕따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정치적 선동에 이르기까지, 희생양의 수난이 일어난다.
이제 희생양 문제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특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문명은 희생양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의 번제(燔祭·구약 시대에, 짐승을 통째로 태워 제물로 바친 제사)에 바쳐진 희생양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신뢰 속에 엮어 주었다. 또 이피게네이아는 아가멤논의 함선이 트로이를 향해 출항할 수 있도록 하는 희생양으로 지목됐다. 신화 속의 이 이야기는 현실 속에서도 이뤄지는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살라미스 해전의 지휘관 테미스토클레스는 출항 전 그리스를 구하기 위해 높은 신분의 페르시아인 포로 세 명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희생양이 문명의 일부라는 것은 ‘심청전’이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전제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희생양에 대해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분석이 아니라 ‘계몽’이다. 희생양은 더 이상 문명의 일부여서는 안되고, 계몽의 칼날이 사회로부터 추방해야만 하는 것이다. 식인 풍습을 비롯한 야생적 사회의 모든 요소는 합리적 구조의 일부라는 것을 밝히려 했던 레비스트로스마저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아즈텍족의 희생양이다. ‘슬픈열대’의 한 구절이다. “아메리카 문화의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아즈텍족의 예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피와 고문에 대한 그들의 광적인 집착은…그 정도가 좀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다.”(박옥줄 역)
희생양은 구세주의 이야기에 들어갈 만큼 오랜 개념이지만, 어떤 이유로도 희생양은 정당화될 수 없고 희생양을 가졌던 문명은 교정돼야만 한다. 이제 인간의 모든 이야기는 희생양 없는 이야기가 돼야 한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희생양
속죄양(scapegoat)과 같은 뜻으로,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속죄일에 숫염소를 속죄의 제물로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 희생됨으로써 진짜 잘못을 저지른 대상은 잊히게 하는 사회·문화·심리적 희생자를 의미한다. 르네 지라르는 모든 역사와 신화, 문화에 걸쳐 희생양 만들기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첫댓글 춘수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늘 읽는 사람들에게
살과 뼈가 되는 교양을 심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