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130. 묵상글 (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등 )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1.30 04:04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오늘 복음은 전혀 상관없는 두 가지 말씀을 모아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왜 전혀 상관없는 말을 한 데 엮어 놓았을까 생각해보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곧 천조자조(天助自助)라는 뜻에서 공통적인 면이 있습니다.
도무지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것을 넘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힘이 싹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런 의욕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등불을 등경 위에 올려놓고 비추려는 의욕이 없어서
아무 데나 방치해 함지 속에 두기도 침대 밑에 두기도 하고,
돈이 제법 있어도 그것으로 선행을 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빛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방도 어둡고,
남에게 주지도 않지만 받지도 못하고 은총도 받지 못합니다.
사실 하려는 사람에게 은총도 주어집니다.
사실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에겐 은총도 필요 없고,
그래서 은총을 바라지도 청하지도 않겠지요.
그러고 보니 이런 사람에게는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도 아니 계십니다.
이런 사람은 눈 들어 하느님을 보는 것조차 하려 하지 않는 자입니다.
어제저녁 성무일도 기도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 어디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 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
할 힘이 없으면 기도라도 열심히 하면 될 텐데 기도조차 하려 하지 않습니다.
선행을 할 사랑의 힘이 도무지 없고 의욕도 없어
그저 늙어 아무 힘이 없다고 나이 타령이나 하는 내가 아닌지 돌아볼 것입니다.
어제는 설 명절인데
새해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인사를 받기만 했네요.
너무 죄송했습니다.
하루 늦었지만
이제라도 새해 인사 올립니다.
새해 주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세요.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영웅 잭 루카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군대에 가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서류를 위조해서 해병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속한 부대는 1945년 일본 규슈의 이오지마 섬에 상륙했습니다. 그때의 나이가 겨우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참호 옆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수류탄 두 개가 떨어졌습니다. 그는 옆에 있던 동료를 밀어내고 수류탄 위로 몸을 던졌습니다. 폭발과 함께 그의 몸은 공중에 떠오른 뒤 바닥에 떨어졌고, 배에는 수류탄 파편이 자그마치 250개가 박혔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그는 살았습니다.
1961년, 낙하산 훈련 때에는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그냥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았습니다. 1977년 아내가 남편인 루카스를 살해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살았습니다. 이 밖에도 그의 삶은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결말은 어떠했을까요? 죽음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2008년 여든 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죽음이 피해 간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약간의 시간 차이만 있을 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 매달리는 삶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죽지 않는다면이야 그냥 세상 틀에 맞춰 살면 되겠지만, 언젠가는 주님 곁에 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등불의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 것처럼, 우리 역시 공동체 안에서 열매를 맺고 주위를 밝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관심과 자기 욕심만을 드러내는 이기심을 지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위를 밝힐 수가 없습니다.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등불을 놓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틀보다는 세상의 틀에만 맞춰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말씀에 커다란 희망을 갖게 됩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4)
지금 삶에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턱 없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이 부족함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뜻을 따르려는 노력 안에서 주님께서는 부족함을 채워서 더 보태어 받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지금 주님 뜻에 충실한 삶. 그 삶이 우리의 최종목적지를 결정해 줍니다.
----------------------
오늘의 명언: 한가지 뜻을 세우고, 그 길로 걸어가라. 잘못도 있으리라. 실패도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라. 반드시 빛이 그대를 맞이할 것이다(엠마누엘 칸트).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리게네스는 ‘함지’는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말씀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아두지 말라는 말씀은 “함지”(루카;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거나,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자신의 능력이나 몸으로 가두지 말고, 오히려 드높이라는 말씀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사명을 ‘세상의 빛’과 ‘산위의 마을’(5,14)에 비유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세상의 빛’이 되고 ‘산 위의 마을’이 되어 비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물론, 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추고 하늘나라의 신비는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을 환히 비추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새겨듣도록 촉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이 말씀은 중요한 말이니, 그 의미를 깊이 새겨들으라는 각성의 촉구와 경고입니다(마태 11,15;13,9;루카14,35). 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5)
사실, 우리는 그릇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비워진 만큼 받게 됩니다. 사실은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니, 결국은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나누어주면 나누는 것보다 더 보태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마르 4,25)
이는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베푸는 사람은 베풀수록 더 많이 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마태 13,12;25,29;루카 19,26). 그처럼, 말씀을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21)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보다 아무 것도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둠을 탓하기보다 등불이 되어라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제대로 비출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실을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빛나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어둠을 탓하며 절망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준비하는 이가 참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가슴에 새겨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으로 선한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 기운이 이웃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기운이 감싸면 악한 기운은 서서히 떠나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말씀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고 기 기쁨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령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풍요로워지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믿음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간수 하지 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우울해하며 남을 비판하고 불평불만 하면서 아무런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움켜쥐면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면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무엇이든 먼저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주지 않는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 놓았다 할지라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면 그것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차고 넘치도록 받으시고 이웃과도 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만큼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줄 수도 있고, 물질이 될 수 있으며 재능기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추기경으로 서임 받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에서 있었던 서임식에 참석하여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가려고 한 지인에게 “비싼 돈 들여 나를 보러 오지 말고, 그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해 주세요.”하였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10,24).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4,24).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주 미사에 함께 나오는 부부가 있습니다. 형제님이 2년 전부터 항암 투병을 하고 있었습니다. 작년 1년을 보내면서 조금씩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최근에는 휠체어를 타고 미사에 왔는데 1월 첫 주를 지낸 후에는 주일미사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응급실에 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기 위해서 병원으로 갔습니다. 항암 과정에서 먹는 약이 내성이 생겨, 약의 용량을 늘렸는데 부작용이 생겨서 병원으로 왔다고 합니다.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한 후에 자매님에게 물었습니다. ‘보험은 어찌 됩니까?’ 미국에서는 보험이 없으면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우체국에서 함께 근무했다고 합니다. 남편은 건강했지만, 자매님이 당뇨가 있어서 좋은 보험을 들었다고 합니다. 본인 부담 6,000불만 있으면 나머지 병원비용은 보험에서 다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휴스턴에서 일하던 아들이 재택근무를 허락받아서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형제님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평생 열심히 일했으니, 남은 시간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부부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준비가 되어 있으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뉴욕에 있을 때는 보험을 들지 못했습니다. 매월 내야 하는 보험료를 감당하기에는 신문사의 재정이 여유롭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몸이 크게 아프지 않았고, 교우들이 하는 병원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달라스에 와서는 보험을 들었습니다. 교구에서 지정해 준 보험사가 있었고, 본당에서 지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치과 치료도 안심하고 받았습니다. 우체국에서 일했던 부부가 만일 보험을 들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긴급한 상황에서 재정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겁니다. 저도 보험 때문에 도움받은 적이 있습니다. 1995년이니까 30년 전입니다. 교우분의 권유로 우체국 보험에 가입했습니다. 2년이 지난 후에 IMF가 생겼습니다. 형님의 사업도 어려움에 직면했고, 제가 부모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교구 신협에서 대출받았고, 동창 신부님이 도와주어서 부모님이 머물 집을 마련했습니다. 1년 후에 보험이 만기 되어서 대출금도 갚았고, 동창 신부님이 빌려준 돈도 돌려주었습니다. 그 뒤로 교우들이 권유하는 보험이 있으면 가능하면 가입했고, 시간이 흘러 제게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에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보험처럼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길이죠,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는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갈망’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낮기를 원하느냐?, 믿느냐? 구하여라.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찾아라. 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찾고 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들이 주님의 얼굴을 찾는 세대이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가 믿는 신앙이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간직합시다. 서로 자극을 주어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 신앙은 결단이고, 신앙은 갈망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로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기브 앤 테이크.’ 이 말의 의미는 모두 아실 것입니다. ‘주고 받는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세상 안에서 참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무엇을 주었다면 무엇을 당연히 받아야 하고 또 무엇을 원한다면 무엇을 주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이 ‘기브 앤 테이크’는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사용되지 말아야 하는 곳에서도 이제는 이 말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 그 기반인 ‘결혼’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주고받을지 계산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기도와 자비로움을 기반으로 행해져야 하는 나눔과 봉사 안에서도 내가 무엇을 받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찌푸리게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라고….
세상의 셈법은 주는 것에 따라 같은 값을 받는 것이지만 하늘에 셈법은 그렇지 않음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하늘의 셈은 우리가 주는 것만큼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을 주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나눔을 행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봉사로써 실천하는 모든 것에 열심히 하십시오.
우리가 되어준 그만큼 우리는 받을 것이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받기를 갈구하지 말고 하늘에서 주는 것을 기쁘게 받으십시오.
⭐스틱문화
예전에는 스틱하면 참깨 스틱과 믹스커피 스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제품이 스틱으로 나옵니다.
홍삼 스틱
가글 스틱
레몬 스틱
라면 스틱
꿀 스틱....
이런 스틱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용기 스틱
사랑 스틱
위로 스틱
미소 스틱
삶을 살다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나씩 꺼내 쓸 수 있도록 말입니다.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오늘 만나는 옛 현자의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공부에는
끝이 없다.”<다산>
“일은 충실하게, 맡은 일은 신중하게 하며 도를 체득한 사람을 보고
자신을 바로 잡는다면 ‘학문을 좋아한다’라고 할 수 있다.”<논어>
이런 사람되는, 참사람되는 공부가 진짜공부요, 해도해도 끝이 없는 평생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저절로가 아니라 평생 하느님의 자녀, 빛의 자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평생학인이 참으로 믿는 우리들의 신원입니다.
오늘 복음은 네 다른 짧은 단절어, 즉 속담 모음집이지만 참 신자의 삶이라는 목표에 하나로 모아집니다. 사람은 섬이 아니듯 참으로 믿는 이들은,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결코 닫혀 있는 고립단절된 삶이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세상의 중심이 됩니다. 말그대로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됩니다. 바로 믿는 이들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세상이 없는 빛, 세상이 없는 소금은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요셉 수도 공동체의 경우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고립된 섬이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세상의 중심이 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요셉 수도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으로 믿는 이들의 신원을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누구도 등불을 켜놓고 그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세상을 위한 빛이기에 감추어져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비밀로 간직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알려져 공유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지식은 우리만이 간직해야할 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가톨릭 신자’는 모든 계명을 지키고, 자주 미사에 참석하고 은총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을 발산하고, 다른 사람과 관대하게 나누며, 자신처럼 다른 사람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경험을 하는데 관심을 갖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면이 아무리 좋더라도 우리는 어떻든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도가, 복음 선포자가,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나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이 받는 것과 같으며,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받습니다. 있는 자에게는 더 주어질 것이요,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 마져 빼앗길 것입니다. 영성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역설의 진리가 나누면 나눌수록 부요해지는 삶,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바로 주인의 돈을 잃지 않기 위해 땅에 묻은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그는 있는 것 까지 빼앗겼지만 투자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돌려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는 ‘받는 것’(by getting)이 아니라, ‘주는 것’(by giving)으로 이득을 얻습니다. 우리는 줄 때만 얻을 수 있고, 모든 이가 줄 때 모든 이가 얻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탁월한 사랑의 실천으로 세상의 빛이, 세상의 소금이 된 존재요 공동체입니다.
이래야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하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다른 네 속담이 궁극으로 주는 하나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지 주님은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너희는 새겨 들어라.” 강조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진리를 며칠전의 공동체 형제들의 환대를 통해 체험했습니다. 인간적 법인 단식이나 침묵 수행의 우위에 있는 하느님 법인 환대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웃을 통해 주님을 환대하기 때문입니다. 수도공동체의 정주영성과 함께 가는 환대영성입니다. 환대의 사랑이 수도원이 섬이 아닌 세상에 열려 있는,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합니다.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속담처럼 환대의 사랑, 환대의 빛, 환대의 향기는 등불처럼 세상을 밝히고 숨겨져 있는 듯 하지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얼마전 다섯분의 타 수도원 형제들이 요셉수도원에 머무르는 동안, 몇 수도형제는 서울 관광에 최선을 다해 환대의 사랑을 실천했고 피곤한 기색은 커녕 활력이 넘치는 모습에서 주는 것보다 받는 축복이, 하느님 주시는 환대의 축복이 대단함을 깨달았습니다. 옆에서 바라보면서 환대에 소홀했던 자신이 내심 많이 미안했었는데, 4박후 떠날 때, 4시 새벽 산책후 주님 은총으로 떠나는 다섯 형제들의 차를 발견하고 즉시 달려가니 이미 이들을 환대했던 우리 세 수도형제가 전송차 나와 있었습니다.
떠나기 직전 급히 도착하여 떠나기 직전 차에 탄 다섯 형제들과 악수를 나누고 작별인사를 하니 말그대로 ‘구원의 마지막 열차’를 탄 듯 마음이 마냥 홀가분하며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떠나는 모습 보지 못했다면 정말 아쉬웠을 것입니다. 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했고, 하루종일 가벼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새삼 환대의 사랑 실천에 오늘 복음의 진리가 압축 요약되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충실한 신앙생활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실제적인 지침 5가지를 소개합니다. 세상의 빛이자,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삶을 지향하는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형제자매들이 준수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1.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2.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약속해 주신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3.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4.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맙시다.
5.서로를 격려합시다. ‘오늘이 그날’인 것처럼 더욱더 이렇게 합시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대사제이자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열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모두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으로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시편24,3-4ㄱㄴ). 아멘.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하면 그리되나니>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5)
믿음의 사람아
믿을 수 있으니
믿으시게나
믿으면
믿을 수 있게 되고
믿지 않으면
믿을 수 없게 되나니
희망의 사람아
희망할 수 있으니
희망하시게나
희망하면
희망할 수 있게 되고
희망하지 않으면
희망할 수 없게 되나니
사랑의 사람아
사랑할 수 있으니
사랑하시게나
사랑하면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게 되나니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지혜를 쓰지 않으면
꾸준히 퍼 내는 샘에서는 더 맑은 물이 솟아나지만, 아무도 물을 걷지 않는 샘은 더러워집니다. 쇠도 사용하면 더 빛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습니다. 한마디로, 영혼과 육신도 훈련을 통하여 거룩한 옷을 입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두지 않고”(참조.마태 5,15; 마르 4,21; 루카 8,16),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비추도록 등경 위에 놓이둡니다. 지혜가 지혜를 듣는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5
철저한 버림은 참으로 그대로 두는 행위다
복되도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아무개가 이 설교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 걱정하지 마라고 하십시오. 이 진리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에서 직접 나온 분명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영원히 경험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아멘.
주석: 하느님처럼 만물을 여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우리는 무로 들어감으로써 신성 안에 본디부터 있던 우리 자신을 경혐한다/왜 나는 ‘하느님, 내게서 하느님을 없애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가/버림과 그대로 둠의 의미/버림은 만물을 그대로 두고 존중하는 것이다(323)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홀로 죽다
소박한 마르뜨의 집안은 다시 또 한 번 하늘의 모후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성모님은 가장 사랑하는 딸의 힘을 북돋우고 새로운 희생을 부탁하러 오신 것이다.
루치아가 전한 히야친따의 말을 여기에 기록한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내가 리스본에 가서 또 다른 병원에 입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 . 나는 이젠 정말로 너도, 집안 식구도, 다시는 만날 수 없어. 많이많이 고통을 당하고 나는 혼자 죽어! 그러나 성모님은 날더러 무서워 말라 하셨고 당신 친히 마중오셔서 천국으로 데려가시겠다고 하셨어"
그리고 소녀는 울면서 루치아를 껴안였다.
“나는 이제 영영 너를 만나지 못해. 너도 나를 문병올 수 없고! 날 위해 많이많이 기도해 주렴. 냐는 오직 혼자서 죽으니까! "
“혼자 죽는다”는 이 생각은 덩쿨처렴 휘감겨 히야친따의 마음에서 떠나질 않았다. 루치아는 히야친따를 격려했다. 어느 날 루치아는 히야친따가 혼자서 중얼거리면서 성모님 성화에 입맞추는 것을 보았다.
“아, 착하신 어머니 ! 그럼 전 아무래도 혼자 죽어야 합니까?"
“성모님께서 히야를 마중오시잖니? 그렇다면 혼자 죽어도 괜찮지 않니?"
“정말 그래 . 혼자 죽어도 좋아. 그런데도 웬지 모르게 때때로 성모님께서 날 부르러 오신다는 것을 잊는단 말이야! 냐는 자꾸 언니가 내 곁에 있지 않고, 혼자 죽는다는 것만 생각하거든. 참 바보야"
“히야는 천국에 가니까 조금만 참으면 되지만 나는 아직도....."
이번에는 루치아가 섭섭한 얼굴을 하자 히야친따가 위로했다.
“가없은 루치아, 그렇지만 슬펴 말아. 난 루치아를 위해 많이많이 기도할께 . 언니가 이 세상에 남아야 하는 것은 성모님의 소망이잖아! “
수도 리스본의 유명한 안과의 유리꼬 리보야 박사는 1월 중순에 파티마 성지에 순례와서 발현을 본 아이들을 만나보고 히야친따의 참혹한 병세를 보고 동정하며, 리스본에 가서 수술을 받는다면 완쾌하리라는 보증을 하였다.(186)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베푼 선행보다 더 보태서 받는 은총 /
박윤식 [big-llight] 250129. 19:54 ㅣNo.179668
전해 내려오는 우리네 속담에 적선에는 귀신도 어쩌지 못한다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좋은 기운이 감싸고 있기에 악운이 선뜻 다가서지를 못한다는 게다. 그만큼 선행에는 하늘의 힘이 함께한다. 그런데 주변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겸손, 절제, 용기의 덕을 지닌 이들이 참 많다. 하늘이 복을 내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적선 외에는 달리 무슨 방법으로 하늘의 복을 얻겠느냐? 그렇지만 많은 이가 복은 받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그 길은 이상토록 외면한다.
이처럼 선행의 등불을 켜야만, 언젠가는 앞날이 확 트인다. 이건 내어 놓으라는 거다. 앞 못 보는 이가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 들고 길을 걷고 있다. 그와 마주친 이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정말 어리석군요. 앞 못 보면서 왜 등불은 들고 다니죠?” 그의 답이다.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요. 이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이죠.”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다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그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만고의 진리인 자연의 이치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고 태양에 반사되어 빛난다. 때로는 초승이나 그믐달이 되어 적게 비추지만 반달이나 보름달이면 더 크게 보태서 비춘다. 빛 받은 그만큼 그렇게 어둠을 밝히는 존재임을 알린다. 살면서 누군가를 위해 빛을 밝혀 본 적이 있는가? 어둠 속에서 누군가와 동행해 준 적이 있는지? 선행은 하늘의 힘이 함께한다. 은총 없이는 자선과 같은 선행이 없다. 자선은 삶을 바꾸어 준다. 그런데 복은 받으려하면서도 정작 그 길은 외면한다. 작은 선행이라도 실천하면, 금방 깨달아지는 단순한 진리인데도.
사실 우리 스스로도 예수님 그분 말씀의 빛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드러내려 한다.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자기 것인 채 드러냄도, 결국은 그분께서 주인공이게 해야만 하리라. 우리가 드러나게 해 본들 그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으랴! 어둠을 밝히는 달도 초승달처럼 부족하게 보름달처럼 환하게 비출 때도 있잖은가? 믿는 우리는 적게 비춘다고 좌절할 것도, 많이 비춘다고 자만할 일도 결코 아니다. 시간이든 건강이든 명예든 자식이든 꼭 쥐고 있으면 오히려 떠나갈 것인데.
선행도 마찬가지이다. 모르게 베풀어도 언젠가는 꼭 드러나 앞을 밝힌다. 자신을 내어 놓고 나누어야만 더 많이 소유하리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게다. 운명은 언제나 자신의 것이다. 아무도 그 운명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운명에 끌려가기보다 운명을 밀고가야 하리라. 삶의 본질은 기쁨이며 인생의 근본은 즐거움이기에.
이처럼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신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깨닫고, 그분 말씀을 실천하고 선포할 때 더 많은 풍성한 은총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서두를 이유가 없다. 천천히 베풀며 가도, 인생은 늦지 않다. 아니 준 것 만큼 더 보태어서, 되돌려 받는다. 우리 안에 뿌려진 그분 말씀의 씨앗이 우리 삶에서 싹을 틔우고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자.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우리의 삶에서 그분 말씀이 늘 머무르게 하자.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고등부 주일학교 시절 학생 레지오 회합을 하던 교리실 한쪽 벽면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습니다.
‘빛이 되지 못하면,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라도 되어라.’
표현은 정확하지 않지만 핵심 내용은 같습니다.
친구들과 그 글이 매우 인상적이라는 나눔을 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한 친구는 그 말 그대로 자신은 빛은 아니지만, 적어도 빛을 반사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였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등불은 예수님이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진실과 사랑으로 밝아진 두 눈은 새 삶을 찾아 나아가게 하는 등불이 되겠지요.
오늘 독서는 우리의 등불이신 대사제 그리스도 곁에서 그 빛을 반사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피로 지성소의 휘장을 가르시어 우리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 하십니다. 그 분의 약속을 믿고 ‘희망’을 굳게 간직하라 하십니다.
우리의 모임(공동체)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사랑’으로 격려하고 북돋워 주라 하십니다.
우리가 빛은 되지 못하지만, 등불이신 주님께서 건네주신 신망에 삼덕의 선물로 빛을 비춘는 거울은 될 수 있겠지요.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8:25)
==========================================================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 21)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합니다.
언제나
만날 수
있는 곳에
등불이
있습니다.
등불은
등불다워야
합니다.
등불을
등불답게 하는
등경이 있습니다.
등불과 등경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쉽고도
평범한
상식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자신을
사랑해야 하며
그 자신이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어만 가는
우리들 삶에
뜨거운 등불로
오셨습니다.
숨겨진
하느님 나라와
감추어진
복음을
드러내십니다.
복음의 빛이
있어야 할
자리는
우리의
삶입니다.
먼저
나 자신부터
정화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등경은
가장 좋은
등불을
받아들이며
잃어버린 나를
찾게 됩니다.
등불을 아는
사람은
등불의 삶을
따릅니다.
빛을 향한
빛의 실천은
빛으로
되돌아옵니다.
사랑의 빛은
보태고
더 받아
더욱
넉넉해집니다.
등불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위에 놓는
사람은
교만에 속지
않습니다.
등불이 있기에
등경이 있고
사랑이 있기에
실천이 있습니다.
빛과 함께하시는
기쁜 날 되십시오.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각자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요즘에야 찾아보기가 힘들어 골동품 가게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
중요한 가재도구 중에 하나가 밤을 밝히는 등잔이요 등잔을 얹어두는 등경이었습니다.
제 어린 시절 전기는 들어왔지만, 전력 수급이 여의치 않아 자주 정전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선친께서는 다락방에서 등잔을 꺼내 불을 붙이고 높은 곳에 위치한 등경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하필 그럴 때, 라디오에서는 처녀 귀신, 몽달 귀신, 달걀 귀신 등 각종 귀신들이 총 출동하는 전설 따라 삼천리가 흘러나왔는데, 듣지 말아야지 하면서 듣다가 화장실도 못가고 끙끙대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등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강조하고 계시는지, 조금 아리송합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1-23)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등불은 다른 무엇에 앞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당신 존재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당신께서는 거듭되는 박해와 살해의 위협 앞에서도 당신의 신원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야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분의 가르침으로 인해 어떤 소중한 깨달음이나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면, 그것은 나만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꽁꽁 숨겨 둬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 소중한 은총을 동료 인간들, 그리고 세상과 나누고 공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께서 선물로 주신 복음, 즉 구원의 기쁜 소식을 자신 안에 붙들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만민 모두가 아무런 차별없이 골고루 혜택을 받도록 그분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파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비밀리에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서, 광장에서, 공개석상에서, 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분 가르침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종래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판이하게 신선했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 가운데서도 최측근 제자들과 아주 소수의 특정인들만 그분의 말씀을 이해했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복음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보편적인 가르침입니다.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비춰져야 할 큰 빛입니다.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지니는 의미는 ‘공번되다.’ ‘보편적이다.’ ‘두루두루 광범위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는 열린 교회입니다.
너그럽고 관대한 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끼리, 마음에 드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비밀리에 운영되는 공동체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거나 파벌을 형성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현존의 구체적인 표지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증거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특별히 불림을 받은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 자신들에게 큰 영예고 은총이지만, 그것을 자신들 안에 가둬두고 자신들의 영광으로만 돌린다면, 큰 죄악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값진 보물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은 인류를 위해 사용하라고 맡겨놓은 보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깨달음은 공동체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등불 같은 존재여야 마땅합니다. 활활 타올라야 하고, 동료 인간들의 어두운 삶을
환히 비춰줘야 합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스승 예수님의 얼굴이 반영되어 있어야 합니다.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21-25: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21절) 등불은 감춰두지 않고, 사용하여 보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산 위의 마을이라고 하셨다(마태 5,14 참조).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을 위하여 우뚝 서도록 부름을 받았다. 등불을 함지 속에 숨겨 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게 되고 사람들이 와서 부딪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등불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하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선행이다. 선은 참되고 충만한 것으로 어둠을 사랑하지 않는다(요한 3,21 참조). 선은 드러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눈에 띄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나서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만,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선은 그냥 퍼져나간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24절) 우리는 가난한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이시다. 형제에게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며, 영원히 찬미 받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것을 우리가 베풀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베푼다고 하는 것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라고 명령하시는 분의 것을 주는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절) 우리가 들은 말씀을 온갖 노력을 다하여 기억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력이 주어지겠지만,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타고난 재능이나 학문을 통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참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 알지를 못한다.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안의 작은 불꽃 발견하고 키우는 법
오늘 복음은 두 주제가 하나로 합쳐진 내용인데, 그 내용 전체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기는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두 번째 주제는 이것입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이 관계 없어 보이는 두 주제를 하나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안에 분명 작은 빛 하나는 있습니다.
이 빛은 등경 위에 올려지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능력입니다.
그런데 만약 등경 위에 올려져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 불빛은 더 커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능력이 없어 감추어두면 있는 것마저 꺼져버릴 것이란 말씀이 아닐까요?
요즘 사제가 되지 않으려는 이유 중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자기 꿈이나 결혼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랍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원치 않아서라고 합니다.
스마트폰만 보며 살던 아이들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그 빛을 감추어두면 어떻게 될까요? 사장됩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벙어리 삼룡이’라고 할 정도로 말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잘하는 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꺼내어 등경 위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더 능력이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만약 불빛이 작다고 없는 것처럼 덮어버렸다면 분명 꺼져버렸을 능력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 윌 헌팅은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면서도 비범한 수학적 천재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탁월한 지능을 숨기고, 무명의 단순한 삶을 선택합니다.
윌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그의 깊은 감정적 상처와 두려움에 있습니다.
학대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윌은 타인에 대한 깊은 불신과 취약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는 그가 사람들을 밀어내고, 기회를 거부하며,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거나
실패와 거절의 가능성에 직면하는 상황을 피하게 만듭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심리학자 숀 맥과이어와의 상담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숀은 윌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가 두려움에 직면하도록 도전합니다.
숀은 윌에게 그의 실패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온전한 삶으로부터 얼마나 막고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특히 숀의 유명한 대사인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는 윌의 방어막을 허물고, 그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려놓고 자신을 믿기 시작하도록 돕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는 주어진 ‘빛’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쓰라고 주신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둠을 비추는 빛처럼 자기 안에서 빛을 찾아 등경 위에 놓고 세상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더 큰 은총을 받게 됩니다.
영화 ‘헝거 게임’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이 세계에서 정부인 캐피톨은 ‘헝거 게임’이라는 잔혹한 이벤트를 매년 개최합니다. 이 게임은 각 지역에서 어린 소년소녀들을
‘조공’으로 선발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경기장에서 죽음의 전투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잔혹한 이벤트의 목적은 두려움을 심어 캐피톨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주인공인 캐트니스 에버딘은 그녀의 어린 여동생 프림이 조공으로 뽑히자 그녀를 대신해 자원하여
참가합니다.
이로써 캐트니스는 자신을 희생하며 여동생을 보호하려는 사랑과 내면의 강인함을 보여줍니다. 게임에 참가한 캐트니스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강한 도덕성을 가지고 경기에 임합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캐트니스는 자주 이타적인 행동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녀는 어린 조공인 루와 동맹을 맺고 그녀를 자신의 여동생처럼 보호합니다.
루가 비극적으로 죽은 후, 캐트니스는 그녀의 시신을 꽃으로 장식하며 존경을 표합니다.
이 행동은 캐피톨의 잔혹함에 대한 반항으로 비춰지며, 이를 지켜보는 각 지역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불씨를 심어줍니다.
게임이 계속되면서 캐트니스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고,
캐피톨의 권위에 도전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립니다.
마지막 순간, 그녀와 동맹인 피타 멜라크는 서로를 죽이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위협하며 캐피톨이 그들 둘을 승자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는 캐피톨의 조종과 권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상징적인 행동이 됩니다.
캐트니스의 여정은 여동생을 구하기 위한 이타적인 행동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용기와 연민, 그리고 자신의 도덕적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통해 억압받는 지역들에게
희망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녀의 작고 선한 행동은 결국 혁명의 불씨를 지피며 거대한 불꽃으로 번져갑니다.
이는 작은 불꽃이라도 목적과 정의라는 연료를 만나면 거대한 화염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의 작은 불빛이 이렇게 키우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을 위해 무언가라도 도움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빛이 어떤 능력인지를 알아볼 수 있고 그 능력에 집중하여 더 키워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능력 없는 사람이야.’라는 패배주의에 져서는 안 됩니다.
우린 안에 누구를 막론하고 온 세상을 태울 작은 불씨가 있습니다.
그 불씨는 등경 위에서만 성장합니다.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먼저 잘 살아 있어야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1-25)”
1)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겠느냐?”는,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지 마라. 등경 위에 놓아라.”이고, 이 말씀은 “자신의 신앙을(복음을) 감추지 마라.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고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신앙을 감추는 것은, 신앙을 부정하거나 부인하는 것과 같고, 그래서 신앙을 감추는 것 자체가 큰 죄가 됩니다.
실제로 어떤 장소나 상황에서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신앙인이 아닌 척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해 때에는 박해받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경우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따돌림 당할까봐 두려워서, 또는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이 신경 쓰여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신앙을 감추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복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복음을 감추고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것도 역시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성직자들이나 선교사들만의 직무가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라는 말씀은, “숨기거나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 라는 명령으로 읽을 수도 있고, “너희가 숨기고 감추어도 언젠가는 드러날 때가 온다.”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숨기거나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 라는 말씀은,
등불에 관한 말씀과 ‘같은 명령’입니다.
“너희가 숨기고 감추어도 언젠가는 드러날 때가 온다.”로 읽으면,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구원 사업은) 언젠가 때가 되면 완성될 텐데, 동참하지 않은 사람은 그날 받을 몫이 없다.” 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그 나라 건설에 동참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무임승차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선교활동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 실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사랑 없이 믿음만으로는 들어갈 수 없고, 믿음과 사랑 실천이 하나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즉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 실천으로 믿음을 증언하는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과 ‘사랑’입니다.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랑 실천’은
우리가 실행해야 하는 ‘하느님의 뜻’ 가운데에서
첫 번째입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라는 말씀은, “잘 새겨듣고 실천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3) 복음서에서 말하는 ‘빛’은 ‘생명’을 뜻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서,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그 생명력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선교활동입니다.
그런데 우선 먼저 나 자신이 그 생명력으로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남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먼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어야 남에게
신앙생활을 권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그 생명력은 이웃에게 나누어 준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줄수록 오히려 더 강해지고 커집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의 신비입니다.
신앙과 복음으로 바꿔서 말해도 마찬가지인데,
이웃에게 나의 신앙을 증언하면 할수록 나의 신앙이 더욱 튼튼해지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주면 줄수록 내 안에서 복음의 힘이 더욱 단단해집니다.
4) 신앙인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인 사람이고, 등불을 들고 앞장서 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마태 5,14.16).
어둠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그 등불의 인도를 받아서 ‘죽음의 어둠’에서 벗어나 ‘구원의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인은 올바른 길을 가리키고 안내하는 표지판 같은 존재이기도 하고, 멈추어야 할 때와 걸어가야 할 때를 알려 주는 신호등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신앙인의 삶’이 잘못되어 있다면, 즉 믿음 없는 사람들의 삶과 다르지 않게 산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이웃과 자신에게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되고, 아무 쓸모가 없으면 하느님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버려집니다(마태 5,13).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르 4,21-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 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마당을 쓸었습니다>라는 시입니다. 내 집 마당을 한 번 쓸어주는 수고로 지구의 한 부분이 깨끗해지고, 아름다운 꽃 한송이를 피우는 노력으로 지구의 한 부분이 밝아진다고 합니다. 맑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쓴 시 한 편으로 지구에 사는 우리의 마음이 밝아지고, 참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지구의 한 부분이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능력과 힘을 과소평가하여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내가 노력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자포자기하지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은 결코 작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즉 우리가 신앙의 등불로 세상을 비추면 세상은 그만큼 밝아질 것이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붙여 주신 신앙의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신 말씀과 가르침대로 따르면 이익을 얻지 못하거나 손해를 볼까봐 그 말씀을 듣고도 외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릇은 제대로 두어야 그 안에 뭔가를 담을 수 있는데, 우리 마음 그릇을 주님의 뜻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뒤집어두니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을 담지는 못하고 오히려 신앙의 등불을 덮고 가리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지요. 또한 쉽고 편한 것만 찾는 나태함과 안일함에 빠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기회를 자꾸 나중으로 미루거나 안해도 되는 핑계거리를 찾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자를 보면 앉고 싶고 침대를 보면 눕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지요. 그런 나태함과 게으름을 이겨내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려면 신앙의 등불을 침상 아래에 두어 내 마음의 방을 어둡게 만들지 말고, 등불을 등경 위에 두어 그 빛이 내 마음 전체를 환하게 비추게 해야한다는 겁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우리는 타고 태어난 그릇만큼 받는 게 아니라, 그 그릇을 비워낸 만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릇은 그것을 완전히 비웠을 때 가장 많은 양을 담을 수 있지요.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을 가장 많이 담으려면 내 마음 그릇을 완전히 비워야 합니다. 그렇게 비우는 방법은 아낌없이 나누고 베푸는 것이지요. 당장은 손해보는 것 같아 아깝게 느껴지겠지만, 내 것만 빼앗기는 것 같아 억울하게 느껴지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기꺼이 나누고 베푼 몫에 주님께서 훨씬 더 큰 ‘덤’을 얹어 우리에게 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누고 베푸는 만큼 진정으로 소유하게 된다는 사랑의 역설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우물이라도 물을 퍼주어야 맑은 물이 솟아나지 물을 긷지 않으면 더러워지는 것처럼, 아무리 단단한 강철도 사용해야 빛이 나지 묵혀두면 녹이 스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도 나누고 베풀어야 거기서 얻는 행복이 더 커지고 내 삶에 더 밝은 빛을 비춰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내가 받은 은총과 축복을 욕심과 인색함으로 아끼다 ‘똥’이 되게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을 베풀고 나눔으로써 그 좋은 몫을 온전히 누리는,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라반의 말씀사랑
오늘 복음말씀은 예수님의 두 가지 가르침을 전합니다. 잘 연결이 되지 않는 두 가지 비유라고 얼핏 생각되지만 함께 연결시킨 이유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1-22)
여기서 "마련이다"라든가 "되어 있다"는 표현은 당위성과 순리를 나타냅니다. 자연의 법칙 안에서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등불이 내뿜는 빛과 열기는 숨긴다고 숨겨질 수 없고, 감춘다고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꼭꼭 가리고 덮어도 새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빛과 열기가 자기 내부를 향하지 않고 외부를 향하기 때문입니다. 또 밝음과 열기를 제 안에 가두어두지 않고 외부로 발산하기에 그렇습니다.
빛은 빛을, 열은 열을 모읍니다. 작은 빛과 열기가 한둘 모이기 시작하면 빛의 광도나 온도가 딱 한두 배만 증가하는 게 아니라 더 크게 확산되고 상승합니다. 아마도 빛끼리, 열끼리 주고받는 반사광이나 복사열이 서로서로 증가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닐까 어림짐작 해봅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4,25)
안타깝게도 이 말씀은 현대 물질만능주의, 자유경제주의, 무한경쟁시대에 딱 맞는 표현입니다. 갈수록 심화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돈이 돈을 낳고 빈곤이 빈곤을 낳습니다. 이는 헤어나올 수 없는 늪과 같은 자본주의 오용의 부작용입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이 도식이 영적 세계에서도 통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갈망은 하느님 향한 더 큰 갈망을 낳고 애타고 애달픈 간절한 사랑으로 이어져, 이를 어여삐 보신 하느님 자비로 자기도 모르는 새 그분 눈길 한 번, 숨결 한 번, 손길 한 번 두루 맛보며 어느결에 무럭무럭 자라나는 세계입니다.
이에 반해 영적 세계에 관심이 없거나 자신이 없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영혼은 갈망이 아닌 의무로, 사랑이 아닌 규정으로 절대자를 추구하기에 오류에는 덜 빠질망정 빛과 열이 점차 소실되어 빠져나갑니다. 사랑의 빛과 열을 쓸 일이 점점 없어지니 자연 도태될 수 밖에요. 늘 새로운 사랑으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신랑 그리스도를 만나기보다, 사랑을 시작한 적도 없이 권태기를 사는, 뛰지 않는 심장과 차가운 영혼의 종교인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독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히브 10,19)가는 특권을 얻은 이들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신이요 인간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의 제사로 활짝 열어젖혀졌습니다.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히브 10,20)
지금 우리는 광채와 열기를 품은 영혼, 뜨거운 피가 도는 심장을 지니고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에 들어서라는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빛이 빛을 받고 열이 열을 모아 더욱 열렬한 불길이 되겠는가, 아니면 그저 있는 희미한 빛과 온기로 현상유지만 하겠는가 선택의 기로입니다.
그런데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성생활에는 현상유지가 없다는 점입니다. 정지는 곧 퇴보를 의미하니까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마르 4,25)이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우리는 이미 우리 마음의 밭에 좋은 씨를 뿌려 하나둘씩 열매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빛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비추어 주십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 10,22-24)
묵시록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2,5)
그렇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하고 어둠의 세력이 온천지에 범람하고 있어도, 결국은 복음의 가르침인 사랑과 정의, 공정과 평화가 승리합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복음의 기쁨을 살면서 빛이신 하느님을 반사하는 작다란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 빛들이 존재하는 한 어둠은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빛이 되어주고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 초대에 "네" 하고 응답함으로써 참으로 행복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
250130. 연중 제 3주간 목요일.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가는 삶
<2025.1.30> 아침을 여는 묵상 (수 20:1~9절)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가는 삶❞
❚ 사사로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혼란에 빠뜨리지 말고 판단을 하나님께 넘겨 드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입니까?
➲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1~3절).
각각의 지파대로 기업을 분배하는 일을 마치고 난 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도피성을 마련하도록 합니다. 이곳은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그곳으로 피하게 하여 복수를 피할 수 있게 하는 곳입니다. 피의 복수가 이어지게 되면 공동체는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실현하는 매우 구체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해...’(3절) 정해진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도피성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이었습니다. 살인은 분명히 죄입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인명을 앗아가는 실수를 범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판결과 형벌을 개인이나 친족이 마음대로 행한다면 올바른 공의가 세워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도피성 제도는 살인을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하나님의 공의로 차별이 없는 사회가 되어 지길 소망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법과 질서를 피해 감을 당연하게 여긴다든지, 그런 자들의 범법행위에 대해서는 느슨하게, 반대로 약자들의 범법행위들에 대해서는 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불공평한 사회 공동체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사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행동할 때, 공동체는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판단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나님의 공의 아래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 누구에게나 공평하신 하나님의 공의입니다(4~6절).
도피성으로 피할 때에 절차가 있습니다. 살인자는 성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의 장로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사고를 설명한 후에 성 안으로 들어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복수하려는 사람이 뒤쫓아 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손에 살인자를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살인자는 성읍에 머물러 살다가,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은 다음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은 뒤에야 자기의 성읍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판단과 감정에 따른 비극을 막고 공의를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은 도피성을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사사로운 복수가 성급하게 이루어지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실족할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신32:35).. 공정한 복수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대해 섣불리 판단해서 행동하면 오히려 더 큰 갈등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분노나 혈기를 조절하지 못하면 내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사회에서 진정한 도피성이 필요한 때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공평함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다가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마음 아파해 줄 수 있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7~9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서편(갈릴리 게데스, 세겜, 헤브론)과 동편(베셀, 길르앗 라못, 바산 골란)에 도피성을 세웠습니다. 이 도피성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는 거류민들도 이용할 수 있는 곳(9절)이었습니다. 도피성이 백성들이 사는 생활 터전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복수를 피해 도망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여러 장소에 그리고 그들의 삶과 밀접한 곳에 마련되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사로운 복수에 희생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실수를 범한 사람에게 피할 장소를 제공하는 도피성은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자신은 선한 일만을 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죄를 지으며 잘못을 행할 때가 더 많은 곤고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정말로 선한 의도를 가지고 행했던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큰 피해를 가져다주는 난처한 일도 경험하곤 합니다. 타인이 받는 상처에 대해서만 내가 평가를 받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아울러 죄인의 신분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중차대한 일에 쓰임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입니다. 도피성이 모든 사람을 위해 세워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 또한 누구에게나 해당 되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피난처이며, 영원한 심판의 길에서 피할 길임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사사로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공동체를 무질서하게 만들지 말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지혜를 갖고 살아갈 뿐 아니라 죄와 실수에 대하여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20: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