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996
9월30일[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연줌 제26주간 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plDZ-tJgoaI
[서울대교구 장긍선 예로니모(이콘연구소/초기 교회 미술연구소)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걱정이나 근심, 유혹이 다가올때면 즉시 성경을!>
언젠가 진심으로 성경에 매료되어 목숨 걸고 성경을 공부하던 한 형제를 만났습니다. 교구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이런저런 성경 공부 과정을 빼놓지 않고 수료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긋한 연세에도 불구하고 2년 과정의 가톨릭교리신학원까지 졸업했습니다.
제가 그분께 여쭈었습니다. “형제님, 평생토록 산업현장의 역군으로 죽기살기로 일하셨으니, 이제는 친구들과 여행도 다니시고, 운동도 나가시고, 좀 여유있게 지내시면 좋을텐데, 어찌 그리 성경을 파고드십니까?”
형제님 왈, “그동안 제 안에서 풀리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사방천지를 헤매다녔지만 찾지 못했는데, 성경 안에 답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 유혹과 갈등을 떨치는 데는 성경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예로니모 사제 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좀 놀았습니다. 이교에 빠지기도 하고, 세상의 유혹에도 빠졌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다 보니, 삶의 균형이 무너져 중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지 하면서, 지난 삶을 반성하며 은둔 수도 생활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맛을 본 세속의 유혹은 수시로 떠올라 예로니모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로니모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유혹이 다가올 때, 그는 유혹을 물리치는 방편으로 그 어려운 히브리어를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유혹은 예로니모를 흔들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성경을 펴들었습니다. 본문을 읽고 또 읽고, 그리고 번역하고 연구하고, 그것이 그의 하루 일상이었습니다. 어떤 날 그는 하루 온 종일 성경 번역에 매달렸었는데, 잠깐의 휴식은 다름 아닌 성경 읽기였습니다.
탁월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었던 예로니모는 라틴어뿐만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습니다. 대단했던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가톨릭교회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대대적 성경 번역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장장 2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히브리어 성경을 라틴어로 깔끔하게 번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대학자였던 예로니모였지만 늘 겸손했습니다. 지극히 겸손했던 그는 사제서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너무도 사제직에 부당하다고 생각했던지 한동안 한사코 미사 봉헌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로니모는 보다 정확한 성경 번역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시금 신구약성경에 대한 번역작업에 들어갑니다.
이를 위해 새롭게 카르데아어를 배웠고, 또 다시 20여 년간의 세밀한 번역작업 끝에 그 유명한 불가타 성경 번역을 완성시킵니다.
예로니모의 탁월한 지적 능력, 성서에 대한 열정은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교부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조금도 의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대학자 예로니모였지만 그에게도 십자가는 있었습니다. 과거 영위했던 세속생활의 유혹들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죄책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쉼 없이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던 노력, 어려울 때마다 인간적인 위로를 찾기보다 하느님의 보화가 담겨있는 성경에로 끊임없이 돌아가고자 했던 그 노력으로 인해 그는 끝까지 자신의 성소를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예로니모는 사자 같은 용기로 교회를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강인함으로 자신을 잘 다스렸습니다. 자신을 극기했었고, 자신의 결점이나 악습 같은 가시들을 제거하기 위해 부단히 투쟁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대한 예로니모의 열정과 사랑이 얼마나 극진했으면,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파고드십시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의 권능도 그분의 지혜로 모르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6Ej-89nXOE
++++++++++++++++++
<말씀을 대하는 자세가 하늘 나라의 자리를 결정한다>
오늘 복음에서 누가 높으냐는 것으로 제자들이 다툽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겸손은 곧 포용력입니다. 사람을 품으려면 자기만 크고 옳다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으니 상대를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모든 동물과 사람들을 정말 잘 받아들입니다. 물릴지도 모르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봅니다. 사람도 그렇게 받아들이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늘에서 큰 사람이 된다고 하십니다.
요한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말렸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라고 대답하십니다. 웬만하면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약 틀리면 어떻게 하라고 무작정 다 내버려 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린이들에게는 그들의 선택의 잘못을 바로잡아줄 해답지인 부모가 있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일본에서 67세의 나이로 숨진 미야우찌라는 거지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의 다락방에는 5천만 원이 예금 된 통장과 1억 7천만 원 가량의 주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일생 헐벗고 굶주리며 모은 돈이었으며, 이를 모으기 위해 어쩌다가 현미 쌀을 사다 먹고 남이 주는 채소 부스러기나 날로 먹고 어쩌다가 끓일 것이 생기면 방안까지 들고 들어와 풍로에다가 주워온 나뭇조각을 때서 끓여 먹었고 목욕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만 하였습니다. 결국 그 노인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싼 음식을 먹은 결과 영양실조와 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사느냐고, 자신을 위해 돈 좀 쓰면서 살라고 말하는 이들이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200살까지 살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아껴둬야 할 필요가 있어.”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답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정답지는 부모입니다. 이것이 포용력의 차이, 곧 하늘나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의 차이를 만듭니다. 인간은 성장할수록 교만해지기에 십상입니다. 특별히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나폴레옹이 망하게 된 전쟁이 있습니다.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과 긴 보급선이 재앙적인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고문과 장군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812년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무적이라고 믿으며 완고하게 캠페인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그동안의 성공으로 나폴레옹이 얼마나 교만해졌는지를 상기시킵니다. 나폴레옹의 오만함과 전략 조정 거부는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초기 병력 중에서 약 10만 명만이 캠페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재난으로 그의 제국은 심각하게 약화됐고 결국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묻고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맞히는 즐거움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해답지가 있어야 합니다. 대본을 들고 연기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과 행동, 대사가 맞는지 끊임없이 대본과 자신을 맞춰갑니다. 그러면 맞추는 즐거움에 틀리는 아픔을 잊을 수 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진리’로 믿는 이들만이 이러한 겸손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해답지가 부모인 것처럼,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해답지로 여기면 틀리는 게 두렵지 않고, 오히려 나를 성장 시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포용력이 향상됩니다. 그러니 주님을 진리로 받아들입시다. 그런 사람은 묻기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묻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말씀을 읽지 않습니다. 내가 틀릴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나의 삶을 바로잡으려는 사람은 포용력도 향상됩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느덧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9월에 있었던 일을 돌아봅니다. 3일에는 ‘김수환 추기경배 골프대회’가 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는 중에도 150명이 함께 했습니다. 점수를 계산하는데 약간의 오류가 있었습니다. 순위가 바뀌는 실수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연락을 드리고, 상패를 전달했습니다. 일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것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입니다. 상패를 받은 분들도 이해해 주었고, 기뻐하였습니다. 10일에는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의 기일이었습니다. 4년 전에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그날도 저는 뉴욕에서 세상을 떠난 형제님의 장례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형제요, 어머니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어머니이다.”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어머니의 기일을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22일에는 ‘본당의 날’ 잔치가 있었습니다. 2012년에 본당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성소국에 있었고, 신문사에 있었습니다. 12년 만에 본당의 날 잔치에 함께 했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함께 모여 사는 것, 오직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본당의 날 주제는 “수고하고 짐 진 자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교우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9일은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이었습니다. 미카엘은 사탄을 물리치는 천사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라파엘은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천사입니다. 사탄과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아픈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천사입니다. 저의 축일을 축하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순교자성월인 9월의 마지막 날을 지내면서 순교자 영성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순교자 영성의 시작은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타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는 또 하느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아니기 때문에,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가둘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죄의 결과” 곧 죄에 대한 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죽으심도 이를 통한 죄의 용서도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믿기 이전의 삶에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에게 더 이상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부활은 믿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저희의 마음을 북돋아 주시어 거룩한 가르침을 깨닫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9,46-50: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예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것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당신 옆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 옆에 있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런 작은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자는 당신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또한 당신을 대접하는 자는 하느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어린이는 순수함과 겸손의 본보기이다. 어린이는 속이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각이 단순해서 높은 지위를 탐하지도 않고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바로 이런 아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48절) 하신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만이 당신 곁에 서 있을 자격이 있고, 당신의 발자취를 따를만한 자격이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49절) 제자들은 그러한 권한을 자기들만 받았다고 생각했다. 사도로 불림을 받지도 않은 사람이 그 일을 해도 되는지 알고 싶었다. 구약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모세가 70명의 원로를 주님 앞에 오게 했을 때, 두 사람은 진영에서 영이 내려 예언을 하였다. 이때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모세에게 말했다.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이것은 성령께서 모세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는 아드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50절)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사탄을 쫓아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은총을 입은 우리와 같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시다는 것을 안다.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봉사를 통하여 진정으로 “주님 옆에”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도미니코선교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욥기에는 몇 가지 주제가 들어 있습니다. 무죄한 사람의 고통은 큰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욥은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시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는]”(욥 1,1)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고통을 겪게 된 것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탓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욥기가 던지는 큰 질문입니다. 이 문제는 욥기 마지막 부분에 가서 답을 만날 것입니다.
다른 질문들 가운데 오늘 사탄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 “까닭 없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말에서는 ‘거저, 공짜로’를 뜻하기도 하는 낱말입니다.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탄은 하느님께, 먼저 하느님께서 욥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부유하게 하셨기 때문에 욥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확인하고자 욥이 모든 재산과 자녀, 그리고 건강을 잃게 만듭니다. 그럴 때도 인간이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을까요?
욥기의 사탄이 오늘 나를 이렇게 시험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을 거두어 가신다 하여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까? 욥은 아들들과 딸들을 하루아침에 잃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을 경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가 순수한지를 시험하는 순간들은 계속 주어집니다. 그 시험들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돌아보면서, 하느님에 대한 나의 경외심의 깊이를 헤아려 봅시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기 자신을 어리석은 바벨탑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6-48)
1) ‘가장 큰 사람’은,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아직 서열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마태 16,18) ‘가장 높은 사도’로 임명하신 일로는 생각하지 않았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서열 문제로 논쟁을 한 것은 잘못한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가장 높은 사도’로 임명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은 옳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도’로 임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도들을 교회의 주춧돌로 표현하는 것은(에페 2,20; 묵시 21,14)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주춧돌은 건물의 가장 밑에서 건물을 떠받치는 돌입니다. 교회에서 사도들의 위치는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위치가 아니라 섬기는 위치입니다.(루카 22,25-26) <흔히 교황을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세속적인 생각일 뿐이고, 교황들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교황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입니다.>
2) 여기서 ‘그들 마음속의 생각’이라는 말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명예욕, 권력욕, 자존심 같은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명예욕이나 권력욕이 더 컸던 것은 아니고, 그것은 그냥 인간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래도 그 욕망은 위험한 함정입니다. 더 큰 죄로 인간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높아지고 싶어 하는 욕망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욕망대로 높아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끝없이 높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 보면 하느님의 위치까지 가게 될 텐데, 로마 황제들처럼 스스로 자신을 신격화 하게 되면 결국 파멸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바벨탑으로ㅠ만들어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사탄은 처음에 하와를 유혹할 때에 바로 그 욕망을 자극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사탄의 말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으면 선악과를 따서 먹어라.”라고 유혹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것은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욕망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인간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명예욕, 권력욕, 자존심 등은 바로 그 욕망에서, 즉 그 원죄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피조물이 조물주 위치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욕망은 하느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고, 반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바벨탑이 무너지듯이 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타이르신 것은, 그런 어리석고 허무한 욕망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일이기도 하고, 그들이 파멸당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3)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제자로서 나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나를 섬기듯이’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를, 또는 ‘가장 작은 이’를 뜻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려면, 그보다 더 밑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적선을 행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아래로 내려가서’ 주님을 섬기는 것과 똑같이 ‘가장 작은 이’를 섬기라는 뜻입니다.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섬길 수 없습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지금 당신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낮춤’과 ‘섬김’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지 말고, 낮은 자리로 가려고 노력하는 ‘선의의 경쟁’을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진심으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는 남들보다 더 높은 사람도 없고, 남들보다 더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전부 다 똑같이 하느님께서 높여 주신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 자체가 ‘높아지는 일’입니다.>
만일에 자기 혼자서만 높아지고 싶다고 고집 부린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사람마다 문제의 크기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크게 다가오는 것이 세상의 상대적 논리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굳이 내 편, 네 편을 갈라 세우거나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나 찬성이 명확해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자리에 신앙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독일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은 평범합니다. 악은 결코 섬뜩한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일 수도, 해맑은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악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선한 것 안에서도 옳은 것 안에서도 얼마간의 부족함과 어긋남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세상은 쉬운 답을 원합니다. 사실 쉽다기보다는 편한 답을 원합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답, 모두가 그럴 것이라 추정하는 답 말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불편한 답은 옳더라도 피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래전 어렸을 때, 동네에 서커스단이 오면 그렇게도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문 앞에서 호객하는 서커스단 관계자의 말은 늘 이랬습니다. “애들은 가라!” 이 말을 다시 고쳐 보면, 애들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그 ‘애들’을 당신 곁에 세우십니다. 인간이 덜된 존재로 하찮게 여기던 어린이를 통하여 가장 큰 것을 보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불편해했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누가 큰 사람인지 답이 분명한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누구든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설렘이 가득한 사회는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은 사회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선악과 정의를 논하면서 흡족해하는 이들의 편협성을 오늘 복음은 질타합니다.
절대 선과 정의를 좇고 있는 신앙인은 자신의 판단과 식별 안에 아름다운 척하는 섬뜩한 악마가 함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과 식별을 과신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시자(루카 9,44-45 참조), 제자들은 그분의 최측근으로 얻어 누릴 영광을 기대한 듯 자기들끼리 서열을 매기려 합니다. 이토록 완고한 모습에 진노하실 만도 한데, 예수님의 교수법은 달랐습니다. 아직 어리석기만 한 제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가장 작은 이들을 섬기는 겸손으로 얻게 될 영광을 다시 한번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신 말씀은, 어린아이처럼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마치 당신인 듯 받아들여 달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선을 넘고 내 감정과 삶을 마구 헤집으며 나를 이기려고만 하는 이를 미워하고 앙갚음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사람, 못난 나보다 더 못나 보이는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이 계시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참아 내고 용서하는 사람. 그가 당신 눈에는 진정으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속하지 않는 이에게도 이런 겸손과 포용의 마음으로 대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제1독서의 주인공 욥은 흠 없는 의인이었지만,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로(의인의 수난을 ‘하느님께서 다 아셨고 허락하신 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 자연재해와 약탈자들의 손에 모든 재산과 자식들마저 잃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하고 드렸던 욥의 기도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욥의 삶이 그분께 영광과 승리가 되었듯이, 일상 속 고난과 시련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직 주님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삶도 하느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9,48)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욕심쟁이 거인」에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는 자신이 가꾼 정원에 동네 아이들이 몰래 들어와 노는 것을 싫어하여 아이들을 모두 쫓아내는데 그러자 갑자기 봄은 사라지고 겨울이 계속되며 키다리 아저씨의 마음도 꽁꽁 얼어버리지요. 어느 날 한 꼬마(=예수님의 현신)로부터 봄이 시작됨을 알았고 꼬마의 정체를 알면서 이후에는 동네 아이들이 자신의 정원에 놀러 오는 것을 막지 않자 언제나 봄이 찾아왔지요. 한참 시간이 흘러 그 키다리 아저씨가 죽자, 예전의 그 꼬마가 다시 찾아와 그 키다리 아저씨를 천국으로 데려가고 나중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보니 키다리 아저씨가 꽃밭에 누워 행복한 표정으로 죽어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일까요? 이기적이고 욕심쟁이 키다리 아저씨는 꼬마(=예수님)를 만남으로써 단지 키가 큰 사람만이 아니라 마음도 커졌기에(=회개를 통해) 천국으로 들어갔잖아요. 우리 역시도 단지 키만 큰 사람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9,48)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려면 가장 작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는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거듭날 때만이 가능합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 역시도 이기적이고 욕심쟁이 키다리 아저씨처럼 마음이 부드럽지도 못하고 따뜻하지 않고 오히려 차갑고 무뎌져 가는 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요즘 제게는 ‘사라짐과 살아짐의 경계선’에서 붙잡아야 하는 것과 동시에 놓아야 하는 것과 싸우고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라지는 삶이 아니라 살아짐의 삶을 살고 싶지만, 마음 한편에 나의 이기적인 자아가 아직도 준동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하늘나라로 들어 갈 때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낮아지고 작아지려고 하기보다 더 크고 힘 있는 자가 되려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예수님 말씀처럼 자신을 더 낮추고 작아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복음과 달리 마태오 복음에서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인가를 말하기 전에 먼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라.”(18,3)하고 가르치신 말씀에 담긴 지향처럼 지금껏 자신이 주인처럼 걸어왔던 길과 삶의 태도가 아닌 주님을 자기 삶의 참 주인으로 모시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했던 높아지려는 삶에서 벗어나 내려가는 삶, 자신을 낮추는 삶, 하느님과 이웃 앞에 겸손하고 온유한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요3,3)이며,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는 길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는 삶입니다.(9,48참조)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9,48)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은 단지 어린이만이 아니라 최후 심판의 장면에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라는 말씀에 드러난 것처럼 작은 사람은 바로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무시당하는 이들에게 베풀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음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이며, 가장 작은 사람은 바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임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마태23,12)
=====================
[인천교구 민동근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제자들은 누가 큰 사람인가에 관해 논쟁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그런 논쟁을 했을까요? 그 안에는 어떤 욕심이 있었던 것일까요?
가끔 뉴스를 보다 보면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특히 국회에서 싸우는 모습이 방송으로 송출되어 제 눈 앞에 펼쳐지면 저는 그 순간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본 것에 실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방향을 잃고 있다는 것에 실망한 것입니다. 국회에 모여있는 그 사람들은 모두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서로 의논해야 하는 대표들인데 그러고 있으니 갈 곳을 잃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누군가 갈 곳을 잃게 만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갈 곳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의미와 목표가 아닌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가지 방향만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의 목표는 바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은총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목표는 잃어버린 채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누가 더 큰가에 대해 말입니다.
누가 더 크고, 누가 더 작으면 어떻습니까? 모두가 하늘나라를 위해 걷는 사람들이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그 크기를 상관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을까요? 누가 더 큰지에 대한 논쟁 말입니다. 누가 더 신앙생활 오래 했는지, 누가 더 단체의 높은 자리에 앉았는지에 대한 논쟁 말입니다. 높은 사람은 높임을 받아야 한다는 그 생각.
우리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하늘나라. 그 방향을 잃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
쉼
훌륭한 의사이자 약초 학자 등으로 알려진 빙엔의 힐데가르트 성녀는 쉼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루에 적어도 한번은 한숨을 내쉬세요. 그것은 가장 짧은 쉬는 시간입니다."
이 글을 읽기 전까지 저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숨 쉬는 것은 복 나가는 일이야.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은 늘 제 한숨을 막고 숨죽이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녀의 말은 제 생각을 바꿔놓았습니다.
한숨은 가장 짧은 쉼이라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저는 제게 쉼을 주고 싶습니다. 짧게라도 말입니다. 그대도 그대에게 쉼을 주세요. 짧게라도 말입니다. 그것이 찰나의 한숨일지라도.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는 여행을 참 많이 했습니다. 여행을 통해 큰 힘을 얻을 수 있었고, 나의 세상을 확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행하며 느끼는 것은 삶의 확장이 아닌 삶의 축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여행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고 하지만, 사실 집에서도 전부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행 중의 경험은 힘들고 불편할 뿐입니다.
힘듦과 불편함 속에서 나의 모습은 작아집니다. 겸손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삶이 축소되었을 때, 더 넓은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단순히 낭만, 예술, 아름다움 등을 찾고자 한다면 집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는 자기가 주체이니 원의만 있다면 스스로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냥 받아들여야 합니다. 집처럼 하겠다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어떨까요? 나의 힘듦과 불편함을 없게 하겠다고 옷만 가방 25kg을 가득 채우면 어떻게 될까요? 비행기도 탈 수 없습니다.(비행기 수화물 25kg 이하)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여행자입니다. 언젠가는 여행을 마치고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려놓고 내려놓아야 작은 내가 되어, 훌쩍 떠날 수 있게 됩니다.
겸손의 삶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진정한 여행자의 모습이 됩니다. 불편함과 힘듦도 여행자라면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기억하면서 작은 존재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대표로 세운 일, 타볼산에 올라갈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만 데리고 가신 일들이 서열 문제를 일으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의 랍비신학에서는 천상에 있는 낙원의 주민들을 일곱 등급으로 나눈 것, 꿈란 공동체에서도 확고한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볼 때, 모든 유다인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역시 세상일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세상의 서열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세우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어린이를 순진, 소박, 겸손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어린이처럼 순진하고 소박한 마음 또 겸손을 갖춘 사람만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고향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세상의 여행자일 뿐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겸손한 마음>
크게 되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지배하며 마음대로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기보다 숨기고 있습니다. ‘아닌 척’하면서 포장하고 위선을 떨지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스스로 낮추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말 같이 쉽지 않으나 그 길이 주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라면 용기 있게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알게 모르게 과장하고 포장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 몸에서 배어 나오는 겸손을 갖추게 될 때 예수님의 참모습을 비추게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겸손이란 '자신을 갖는 것'이라고 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주제를 넘지 않는 자이며, 하느님의 은총 앞에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 놓을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관용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겸손이야말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2)
만약 “성인들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빛나 보이고 싶어 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섭리로써 그들을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성 안또니오).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겸손함을 갖추길 원하며 낮은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제자들의 응답은 아직도 엉뚱한 모습입니다. 아직도 특권의식이 배어있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면 다 환영할 일이건만 제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세웠습니다. 누가 하든지 주님의 일을 하면 환영하고 그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구원의 혜택을 입으면 기뻐할 일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사실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필리 1,18) 그러나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과 ‘내가 너보다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내가 더 고참이다.’,‘내가 더 연장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격 미달입니다. 낮아짐을 두려워 마십시오. 주님께서 거기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랑과 희망을 주님께 두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인간(human)과 겸손(humble) 어원은 흙(humus)
인간(human)과 겸손(humble)의 어원은 흙(humus)이다. 단지 한 줌의 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 인류인 아담(םדָאָ)이라는 이름도 ‘흙’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다마’(המדא)에서 나왔다고 한다. 흙은 나무의 뿌리를 보듬어 안으며 열매와 잎을 맺도록 양분과 수분을 제공한다. 흙은 언제나 사람의 발아래에서 사람을 우러러볼 때 흙은 진정한 흙일 수 있다.
흙은 머리 위에 얹으려 해도 안 되고 멋진 의자에 앉으려 해도 안 된다. ‘흙’의 성질은 더 이상 낮춰질 수 없는 ‘최저의 낮음’, 한 줌의 힘으로도 바스러지는 ‘연약함’이다. 겸손은 ‘흙’과 같은 태도를 말한다. 사람은 흙에서 나왔고, 흙의 성질은 겸손함이니,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흙과 같아져야 하며 ‘흙’과 같이 되려면 겸손해야 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만함을 감사하고 겸손해야 한다.[글/허준혁]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루카 9,46-50 (가장 큰 사람,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내가 바라는 사람보다
나를 바라는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사랑하는 사람보다
내가 사랑해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내가 함께하고픈 사람보다
나와 함께하고픈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내가 받아들여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품는 사람보다
내가 품어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내게 베푸는 사람보다
내가 베풀어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나를 살리는 사람보다
내가 살려야할 사람에게
나의 눈길과 손길과 발길을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어제 복음과 병렬구문으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둔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48)
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요, 동시에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서, ‘작은 큰 사람’이란? 단지 ‘작은이’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라기보다, ‘작은이’를 받아들여 ‘같이 작아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크기 때문에 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작은이인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이’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큰 것을 비우는 바람에 ‘작은이’가 된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낮아져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표상하며,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력함과 낮아짐, 동시에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작은이’, ‘무능하고 비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 2,3)
사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되, 허물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나아가서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아멘.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8)
주님!
받아들이는 이가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의 무능함과 형제들의 허약함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보잘 것 없는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
보잘 것 없는 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미천한 자 되게 하소서.
십자가에 매달려 무력하게 하소서. 그 무력함 안에서 당신을 신뢰하게 하소서. 아멘.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이태리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시절, 일반적인 외출을 할 때 즉, 물건을 사러 나갈 때나 식사를 하러 나갈 때 동양인 신부들은 사제복을 굳이 입고 나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비자를 신청하거나 은행 업무를 보는 등의 관공서 업무가 있을 때는 반드시 사제복을 입고 나갑니다. 그 이유는, 사제복을 입었을 때 이태리 사람들은 훨씬 더 친절하고 일을 빨리 처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동양인은 괜찮은 편입니다. 흑인 신부들은 사소한 약속이라고 할지라도 외출을 할 때 무조건 사제복을 입습니다. 사제복을 입지 않으면 난민으로 오해 받기도 하고 그만큼 홀대를 받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타지에서 이러한 생활을 하다 보면 이태리 사람들이 야속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개인의 신분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면 차별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다소 불합리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본 모습을 드러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세계적인 CEO들이 이러한 말을 합니다. “식당 종업원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절대 비즈니스 파트너나 동업자로 고르지 말라.” 웨이터나 부하 직원에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절대 좋은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더 큰 사람이냐고 묻는 이들 앞에 어린이 하나를 세우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비난하는 제자들에게, 굳이 제자들이 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으면 오히려 예수님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겉모습으로 감히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이 실천하는 선함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모든 이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우리들은 모두 그분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를 입어야하는 철부지 어린이들과 같은 약자들입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능력, 사회적 지위, 직업, 재산 등은 한낱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사소한 조건일 뿐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들은 모든 이웃을 존중해야 하며 특별히 사회적인 약자들, 어린이와 같은 작은이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이러한 약자의 범위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이들, 내가 보기에 성격적 결함이 있는 이들, 또는 나와 의견이 맞지 않는 모든 이웃들이 사실 나 자신보다 더 나약하고 작은이들입니다. 이러한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 자신도 하느님으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으며 이를 위한 희생과 고통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 더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범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 환호송은 예수님의 이러한 모범을 단 한 마디로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섬기러 세상에 오셨으며 십자가의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내 주변의 작은 이들, 나도 모르게 가볍게 생각했던 이들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하느님께는 더욱 더 큰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 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찬미>
-경천애인(敬天愛人)-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제 때에 열매를 맺으리라.”(시편1,2-3)
교황님의 제46차 해외 사목 방문중 루벵 학생들에게 한 감동적인 강론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지,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공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추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이는 공부는 권력의 도구가, 다른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이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것이 된다. 앞으로 나가라. 이념들의 이분법에 들어가지 마라.”
엊그제 수도원 ‘자캐오의 집’, 피정집에서 단체 피정지도중 제의방에서 불암산을 바라볼 때 저절로 흘러나온 고백에 행복했습니다. 흡사 주님 앞에 서있는 듯 행복한 체험이었습니다.
“산 앞에
서면
당신 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8.>
당분간 10월은 이 시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역시 지인에게 시화(詩畫)를 부탁해서 받았습니다. 수도원에서 가장 불암산 바라보기에 전망좋은 ‘자캐의 집’ 3층에서 탄생된 시입니다. 아마도 성인들 역시 주님 앞에서 늘 사랑의 찬미에 행복해 했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역시 지혜문학에 속하는 욥기의 시작입니다. 욥기 역시 앞서의 코헬렛 못지 않게 깊고 아름답습니다. 욥의 시련에 앞서 똑같은 그에 대한 묘사가 2회 나옵니다.
‘그 사람은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였다.’
하느님도 인정한 욥이었고 시련에 앞서 사탄 앞에서 욥을 자랑했고, 사탄은 이의를 제기하자 하느님은 사탄의 제의를 수락합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 보았느냐? 그와같이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위에 다시 없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새삼 우리 생명은 하느님의 고유 권한에 속해 있음을,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1차 사탄과의 게임은 극한의 고난과 시련중에도 솟아난 욥의 다음 감동스런 찬미의 고백으로 하느님의 승리로 끝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평소 사랑의 찬미로 일관된 삶임을 입증하는 고백입니다. 더불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임종어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서 찬미받으소서.”
오늘 9월 순교자 성월 마지막날 9월30일 우리는 참으로 자랑스런 성인 예로니모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역시 순교적 삶에 한결같았던 성인으로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사대교부에 속하는 분입니다. 당대 성인의 학문의 깊이는 성 아우구스티노 외엔 아무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합니다.
성인의 가장 큰 업적은 불가타(일상적, 대중적이라는 뜻) 성서 번역이요 391년부터 406년까지 16년에 걸쳐 이루어졌다하니 성인의 진리를 향한 사랑의 열정과 끈기가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성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 성경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이 뜨거웠습니다. 성인의 편지에 나오는 권고가 심금을 울립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늘 성경을 읽으십시오. 아니 당신 손에서 성경이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경을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경이 그대를 감싸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의 혀는 그리스도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들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신학교의 수호성인’,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성인은 사제이면서도 생애 대부분을 수도자로 살다가 420년 오늘 9월30일, 72세에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임종을 맞이합니다.
욥의 경천애인의 사랑은 그대로 예수님께 전수되었음을 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은 오늘 기념하는 성 예로니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후 제자들에게 유언같은 교훈 둘을 선물하십니다. 동상이몽,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도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중인 철부지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가장 취약하고 약하고 무력한 이들입니다. 이들을 사랑의 환대로 맞이함이 예수님 당신을 환대하는 것이며 궁극에는 예수님을 보내신 분, 하느님 아버지를 환대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무력하고 불쌍해 보이는 이들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이며 우리의 전적인 사고의 전환을 촉구합니다.
얼마전 공동체 회의 결과에 ‘신의 한수’라 감탄했고 민심은 천심임을 확인하고 기뻤습니다. 엄격한 비밀투표를 통해 이심전심 가장 약해 보이나 실상은 똑똑한 수도형제를 총회대표로 선출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주님의 가르침도 소중합니다. 스승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그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막았다는 기고만장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과 같은 내용의 어제 마르코 복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주님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음을 배웁니다. 진리앞에 일체의 기득권이나 엘리트주의는 모두 배격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진리의 주님을 그들만의 소유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진리앞에 지극히 겸허해야 함을 배웁니다.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사랑과 찬미의 겸손한 이들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시는 진리이신 주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작은 이들’을 사랑하며, 진리의 사람, 찬미의 사람, 겸손의 사람, 경천애인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 말씀을 찾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예레 15,16)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9,43ㄷ)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자!>
오늘 복음(루카9,46-50)은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제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일어나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등장시키시면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9,43ㄷ)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5-8)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 바로 '가장 작은 사람, 곧 가장 큰 사람'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했던 두 사람을 만납니다. 한 사람은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욥'입니다. 또 한 사람은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성 예로니모 사제'입니다.
욥은 모든 소유가 사라진 큰 시련 앞에서도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욥1,22)
예로니모 성인은 사람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 언어인 라틴말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그 성경이 바로 '대중 라틴말 성경'인 '불가타(Vulgata) 성경'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합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루카 9, 48)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세상은
보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작은 사람
큰 사람의
잣대는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고정된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주는 것이
진실한
복음입니다.
큰 사람이
되려는
거품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예수님의
작아지시는
사랑입니다.
허풍에 익숙한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고 살아야할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작아지고
작아지는
곳에서
보게 되는
우리자신의
참된
모습입니다.
작아지는
진실한
성찰이
우리를
키웁니다.
작은 사람의
진실한 실천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어떠한
인간관계도
가장 작은
사람이 되면
평화가 늘
함께합니다.
완고한
나 중심을
내려놓는
가장 작은
사람의
삶입니다.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하시고
간절하게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 먼저
가장 작은
사람이 되십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듯
우리자신의
가장 작고
진실한 모습을
다시 만나는
기쁜 날
되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