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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지 마 오봉옥 웹툰시집
저자 오봉옥. 출판 솔
발행 2024.03.02.
출판사 서평
대중의 의식과 감성의 개선에 화응하려는
새로운 문예의 시도
1985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해『지리산 갈대꽃』, 『붉은산 검은피』, 『나 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노랑』, 『섯!』 등을 발간한 중견 시인 오봉옥의 국내 최초 웹툰시집이 출간되었다.
신작 시집을 웹툰시 형식으로 발간하는 일은 유례가 없는 새로운 문예의 시도라는 점에서, ‘웹툰시’라는 명칭을 다는 일에도 많은 고민이 뒤따랐다.
이렇듯 시의 대중화에 기여하려는 노력은 웹툰이라는 매체와 시를 결합해 시적 상상력이 만화에 영향을 주어 재미의 차원을 넘어서게 하고,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 또 다른 영감을 주고 시의 세계와 그 저변이 더욱 넓어지게 한다.
또한 웹툰시집의 발간은 ‘장르 혼합’이라는 측면에서 문예사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문학의 정수라 불리는 시 장르와 친근한 웹툰의 만남은 문학계의 새로운 도전과 시도임을 넘어 시너지를 발산하는 작업임이 분명하다.
천진난만의 기운이 어린 시세계
맛깔나는 구어체와 방언의 시언어
오봉옥은 이번 시집에서 천진난만의 기운이 서린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이순’이 넘어서야 ‘이슬의 뜻’을 깨닫고는 “이제야 무릎 꿇고/ 막 태어난 갓난아이 넘겨받듯이/ 풀잎에서 미끄러지는 이슬 한 몸/ 두 손으로 정섯껏 받는다”(「이슬을 받는다」) 하고, ‘앳된 비구니 스님 셋이/ 인사동 카페에 들어와 까르르 까르르’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되는 게 해탈이다’(「해탈」)고 깨닫는다. 천진난만의 기운이 전해져, 진실한 예술작품의 창조성이 독자의 마음과 생생한 기운으로 교감하고 교류하게 되는 것이다.
또 오봉옥이 꿈꾸는 세상은 순수의 세계 그 자체이다. “시인은 죽어서 나비가 된다하니/ 다음 세상에선/ 번잡한 세상 따윈 기웃거리지 않고/ 고요한 숲속 문지기가 되어야지/ 아침이면 곤히 잠든 나무들 흔들어 깨우고/ 낮엔 새들 불러내 함께 노래해야지”(「꿈」) 하며 만물의 교감을 노래한다.
그가 보여주는 천진난만의 기운은 언어 사용에 있어 맛깔나는 구어체로 드러난다. “휠체어 탄 울엄니 등산 간다는 나에게 말하시네./ 산에 가서 구절초를 보거든 그 냄새 쪼깨만 개비에 넣어 온나./ 오는 길에 바다에도 들를 거라는 말엔 또,/ 갯바닥에 가믄 파도소리도 쬠만 귓구녕에 담아오고 잉.”(「자식 생각」) 산에 혼자 가면서 미안해할 자식의 마음을 헤아리며 농담을 건네는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촌철살인의 시정신을 극대화하는 웹툰의 만남
이번 시집의 흥미로운 점 하나는 촌철살인의 시정신을 보여준 짧은 시들이 웹툰을 만나 그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있다. 「사랑은 경주마처럼2」 를 보면, “경주마처럼 그대만 보고 달려가리/ 화살처럼/ 번개처럼/ 그대의 가슴에 가 꽂히리/ 가서 히이이잉 대책 없이 무너지리”의 내용이 번개처럼 달려가는 말의 이미지와 결합 되어 전달력이 배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의 연과 행 사이의 시정신이 웹툰이라는 표현 방식을 만나 행간에 담은 시인의 의도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나아가 독자로 하여금 즐겁고 적극적으로 시의 의미를 체화할 수 있는 방식을 선보이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웹툰과 시의 만남은 이렇듯 의외의 시너지를 가진 새로운 문예시도라는 발견을 하도록 했다.
(박남기 교수) (고종사촌 동생인) 봉옥아, 보내준 웹툰시집 '달리지 마' 단숨에 다 보았다(읽었다). 신선한 발상이구나. 젊은 세대에게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겠다. 네 시작과 성장, 그리고 완숙기의 깨달음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시집이구나. 고맙다.
주인 / 오봉옥
나 지금껏
세상의 주인이라고 뻐기고 살았다
고작 백 년을 살 거면서
허리 한번 비트는데 백만 년이 걸린다는
저 산 앞에서
수수 억 살을 자시고도 말이 없는
저 바다 앞에서
감히
달리지 馬 1 / 오봉옥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마음의 눈을 잃어버려
나도 모르게 죄를 지을 때가 있지
잠든 풀잎을 건드린다거나
개미 한 마리 밟아 죽인다거나
그건 술 진탕 먹고 필름이 끊긴채
운전대를 잡는 것과 다를 바 없지
그럴 땐
말을 타고 달리던 인디언들이
가끔 말에서 내려
자기가 달려온 길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제 영혼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주듯
달리던 걸음 딱 멈추고 읊조려야 하지
달리지 마
달리지 마
마음의 눈을 다시 찾을 때까지
버릇처럼 혼자서 되뇌어야 하지
달리지 馬 2/ 오봉옥
누가 저 말에게
죽어라고 달리는 걸
가르쳤을까
죽을 때까지
숙명적으로 달려야 하는 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죽어서야
질주를 멈추게 될
너와 나
가진 게 발밖에 없어서
달리고 또 달려야만 하는 우리
이 세상에
흙먼지나 잔뜩 일으키고
가뭇없이 사라져 갈
슬픈
존재들
조율 / 오봉옥
살다 보면 숨을 죽여야 할 때가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세상을 조율하는 순간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이 툭 떨어지거나
새한 마리 날아와 나뭇가지에 가만히 앉거든
누군가 지금 세상을 조율하고 있다고 생각하라
피아노 조율사가 귀를 가까이 대고
건반을 톡 톡 토독 하고 건드려보듯이
누군가 균형추를 맞추기 위해
이슬 한 방울도 떨어트려 보고
새 한 마리도 불러내 나뭇가지 위에
가만히 올려보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의 거리와 무게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그러니 함부로 움직여서야 되겠는가
개미 한 마리 흙 쓸어내도 세상은 삐끗한다
시인과 낫 / 오봉옥
내 시는 낫을 버린 지 오래
이젠 쓸모가 없어졌다
풀 하나 벨 수 없는 펜으로
누구의 가슴을 후비겠다는 것인가
내 펜은 흙을 버린 지 오래
이젠 쓸모가 없어졌다
경작할 땅 한 평도 없이
무엇을 갈아엎겠다는 것인가
흙벽에 내걸린 오래된 낫처럼
자꾸만 녹이 슬어가는 나의 시
낫 한번 휘둘러보지 못한 사람보다
더 비참한 건
거두어들인 낫을 다시는 쓰지 않는 것
그리하여 그 기억의 낫이
저 혼자 떠돌아다니며 비웃는 것
누가 와서 이 녹슨 낫을 들고
마지막으로 한번 휘둘러다오
내 분홍빛 원고지를 갈가리 찢어다오
후레자식 / 오봉옥
울 아덜은 하늘이 내린 자석이어라우
울 어매 날 두고단 한 번도
당신이 낳은 자식이라 하지 않았네
내가 사고 쳐 속 썩일 때에도
회초리 대신 눈물 글썽거리시며
태몽 이야길 꺼내곤 했지
글씨, 마당에 비양기 한 대가 떨어졌시야
근디 그 비행기 사다리를 불고
학 한 마리가 영판 멋드러지게 내려오드라
그게 니다
긍께 넌 하늘이 내려준 자석 아니냐
그런 울 어매 돌아가셨는데
난 참 좋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전화하던
치매 걸린 어매 목소릴 듣지 않으니 좋고
이젠 가슴 졸이며 잘 일도 없으니
이보다 더 홀가분할 순 없네
세상의 비밀 / 오봉옥
이순 지나
비로소 내가 어린아이가 되어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별밭이 빛나는 것은
더불어 합창을 하기 때문이고
풀밭이 푸르른 것은
서로 어깨를 걸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다가 하늘이고
하늘이 바다라는 것을
의자가 혼자서 한숨을 내쉬거나
심심해 말을 걸어오는 것도
보고 듣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되어 보니
세상은 전쟁터가 아니라 놀이터
그 위에서 걷고 뛰고 달리는 건
인간만이 아니라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은 경주마처럼 1 / 오봉옥
날랜 발이 있어야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
사랑도 그렇다
아름다운 망각 / 오봉옥
지하철에 올라 내 나이 잠시 잊어먹고 머리 희끗한
한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더니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나보다 더 나이 많은
양반이 이래서야 되겠느냐고 정색을 하며 나무란다
난 그만 머쑥해져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슬쩍 한번
비춰보다가 자리를 얼른 피하고 말았다
나만 잊으면 / 오봉옥
나만 잊으면 된다는데 힘드네요
나만 잊으면 처음으로 돌아간다는데
오늘도 난 그대 곁에서 맴도네요
세상에 이렇게 슬픈 말 있을까요
나만 잊어주면 우리가
남이 될 수 있다는 말
세상에 이렇게 야속한 말 있을까요
나만 잊어주면 우리가
남이 될 수 있다는 말
나만 지우면 끝이라는데
강가를 걷고 또 걷네요
나만 지우면 끝이라는데
취하고 취해
지나온 길 또 걷고 있네요.
나만 잊으면 된다는데
또 묻네요
오늘 하루 어떻게 살았는지
나만 잊으면 된다는데
또 묻네요
다시 돌아올 수 없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