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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시절부터 단짝이었던 장기오라는 친구는 KBS의 "TV문학관"이라는 프로에 한국 문인들의 작품들을 주로 연출하여 그 능력을 인정받아 大PD로 퇴임하였는데, 퇴임 후에는 수필문학가로 등단하여 수필집을 몇권 내었다. 그의 초기 작품 중에 "녹향의 추억"이라는 글을 쓰며, 등장인물로 나를 묘사했는데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과장을 했거나 아니면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에 오차가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처럼 내가 음악에 그렇게 조예가 깊지도 못했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10대 후반부터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으로 압박감 속에 짖눌릴 때도 있었지만 일부는 잘못 알고 있었던 부분도 더러 있다, 그리고 서울 정릉에서 건재상과 연탄가게를 겸해서 할 때는 배달원도 있었고 그렇게 비참하게 느끼지는 않았는데~~ ㅎㅎㅎ, 그 정릉시절에 포터블을 살 돈이 없어서, 일제 내쇼널 라디오 위에 사각으로 짠 나무틀을 올리고 그 위에 턴 테이블을 올려서 라디오와 연결하여 사용했지. 그렇게 하여 LP판 레코드의음악을 내쇼날 라디오의 스피커에서 소리 나도록 해서 들었었지!. 그리고 예전에 대구의 지성들의 모임장소였던 고전음악실"녹향"에 관한 글이라 애착이 가고, 그 "녹향"이 우리 대구인에게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문화유산으로서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그래서 그 친구의 수필 "녹향의 추억"을 여기에 올리며 나 또한 추억에 젖어든다. 모든 것들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름 문화의 가치를 높게 생각했던 우리들의 젊은 시절이 그립다. ------------------------------------------------------------------------------------ 녹향(綠香)의 추억 장기오 1960년대 대구에는 “녹향(綠香)”이라는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주로 세미클래식 음악을 많이 틀어 주는 감상실이었는데 여기서 나는 사라사테(Sarasate)의 ‘지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을 듣고 세상에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저렇게 아름답고 처절한 소리를 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 때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이었다. 대구에는 이 감상실 외에도 본격적인 클래식 감상실로는 하이마트(heimat)가 있었고 팝 감상실로는 심지(心池)가 있었다. 녹향은 같은 반에 다니던 친구의 집에서 운영을 했는데 우연히 놀려갔다가 그만 반해 버렸다. 그 후 우리는 갖은 핑계를 대가며 그 감상실로 친구를 찾아 다녔고 어설프게나마 클래식의 맛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라 함은 나와 ‘삼총사’라고 어울려 다니던 한 친구였는데 이 친구의 귀가 보통이 아니다. 수 십 번식을 들어야 멜로디를 익힐 수 있는 온통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음악도 그 친구는 서너 번 만에 외워 버리고 만다. 그래서 곡목이 생각나지 않을 때 그 친구한테 물어보면 단번에 알아맞힌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이면에는 당시 음악선생님의 교육이 한 몫을 했다. 피아노가 귀했던 시절, 음악선생님은 널빤지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 연주 연습을 시켰다. ‘미레도 미레도도 라도 솔미레도’ 로 시작하는 ‘머나먼 스와니 강’을 손가락을 짚어가며 연습을 했고 음악시험은 음악실에 있는 실제 피아노앞에 앉아서 연주하는 걸로 대신했다. 그 다음에는 유명한 클래식 음악들을 들려주고 테마를 외우게 하는 거였다. 거기서 우리는 베토벤의 ‘운명’도 들었고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도 들었다. 선생님은 음악은 상식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상식이 없는 사람은 지성인이라고 말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보다 일찍 클래식 음악에 눈을 떴다. 유난히 귀설미가 없는 나는 남들은 서너 번만 들어도 외우는 멜로디도 나는 열 번 정도 들어야 겨우 흥얼거릴 수 있었으니 라디오조차 귀했던 당시로서는 음악을 들으려면 감상실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또 당시에는 음악 감상실을 드나든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자랑거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곳은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돈을 주고 등을 떠밀어도 가지 않을 곳이기 때문에 그런 곳에 드나든다는 사실 자체가 나는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고 그만큼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호사취미가 없고서야 어느 시러베 아들놈이 그런 어둠침침한 곳에서 서너 시간씩 죽치고 있겠는가? 당시 문학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잡지인 ‘현대문학’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가 듣고 싶은 음악도 듣고 시도 읽고 소설도 읽으면서 졸리면 꿈결처럼 음악을 들으면서 잠도 자면서 서너 시간 보내는 것은 보통이였다. 어린 나이에 일종의 허세(虛勢)도 작용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거기서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도 듣고 쇼팽의 ‘야상곡’도 들고 베토벤 ‘로망스 F장조’도 들었다. 그 후 나는 돈이 생기면 첫 번째 하고 싶은 일이 전축을 장만하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포터블 전축이라도 있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신 나는 전축도 없는 주제에 레코드판을 부지런히 사 모았다. 그것도 돈이 없어서 정품보다는 주로 복사판을 사 모았다. 당시에 어울려 다녔던 그 친구 역시, 가난하기는 매 일반이었지만 그는 나보다 먼저 포터블이지만 전축을 샀다. 인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이공계를 택했고 그 방면에서 사업을 시도해지만 그는 아버지의 소망대로 가세(家勢)를 다시 일으키지 못했고 그가 태어나고 자란 대구를 떠나 식솔들을 이끌고 낯선 땅 서울로 흘러 들어왔다. 정릉 하천부지에 무허가 집을 짓고 그는 연탄배달과 철물장사를 시작했다. 콧구멍만한 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연탄으로 온톤 시꺼멓게 도배된 곧 부서질 것 같은 판잣집 가계에서 포터블 전축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군대에 있던 나는 휴가를 나오면 대개는 그와 이틀 정도는 숙식을 같이 하곤 했다. 낮에는 그의 가계에서 그가 연탄배달을 나가면 나는 가계를 지켜주는 따위로 그를 거들어 주기도 했지만 밤에는 음악 듣고 술 마시면서 우리들의 미래를 이야기 하곤 했다. 그 때 우리는 베토벤에서 존 덴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음악들을 섭렵했다. 지글지글거리는 형편없는 복사판에, 울림이나 반향(反響)이 전혀 없는, 모노톤의 윤기 없고 팍팍한 음질이었지만 그런 음악을 듣기 위해 나는 역촌동 누나 집에서 정릉까지 몇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그를 찾아다녔다. 그는 음악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그를 둘러쌓고 있는 그 지독한 가난과 식구들을 먹어 살려야 한다는 가장으로써의 무거운 짐 따위는 그 순간만은 없었다. 바이올린 연주가 나오면 베개라도 끌어안고 눈을 지그시 감고 활을 켜는 흉내를 냈고 피아노 음악이 나오면 미끄러지듯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의 흉내를 냈다. 그는 꿈꾸듯 음악을 즐겼다 그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무슨 악기를 다룰 줄 아느냐 하면 천만에 말씀이다. 그나 나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보면 옛날 중학교 때 연습한 ‘스와니 강’정도를 반주도 없이 그냥 쳐보는 정도다. 그의 그런 호사취미는 나이가 들어도 식을 줄 몰랐다. 고생고생 끝에 서울에서 간신히 집칸이라도 마련하자 그는 미련 없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대구로 낙향했다. 내가 가끔가다 출장 가서 만나보면 그는 술집을 가도 클래식 음악이 나오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배음(背音)으로 깔리는 음악이 아니라 한껏 볼륨을 올려 홀 전체가 음악의 울림으로 가득 찬 마치 연주회장의 설렘과 감동의 분위기가 있는, 음악이 주이고 대화는 부수적인 그런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홀을 중심으로 스톨에 앉는 높은 라운드 테이블이 있고 손님들은 빙 둘러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지만 음악을 듣는 옆 사람을 배려해서 대화는 한결같이 나지막했다. 한마디로 옛날 음악 감상실 같은 분위기였지만 커피 대신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것이 달랐다.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판을 사가지고 가서 주인에게 틀어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그런 취향에 묘한 전율을 느꼈다. 술집에서 이가 시리도록 찬 맥주를 마시면서 베토벤의 “황제”를 들어 본 일이 있는가? 비오는 날 칵테일 한 잔 시켜놓고 알비노니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생의 한숨처럼 느껴본 일이 있는가? 음악은 현실을 더욱 쓸쓸하게 하기도 하고 애처롭게 하기도 한다. 마치 드라마의 BG(background)음악이 주인공의 삶을 더욱 비극적으로 몰고 가듯이 말이다. 한 번도 자기 뜻대로 살아본 일이 없는 한 남자가 술잔을 앞에 두고 고개를 숙이고 음악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에 나는 말을 부 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할 말이 없어서도 아니고 술에 취해서도 아니다. 그는 음악을 듣는 척 하지만 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반추하는 것이리라. 꿈만 꾸었지 끝내 이룰 수 없었던 수많은 이상(理想)들을 생각하고, 용기가 없어 놓쳐버린 수많은 기회들을 회상하리라. 고개를 들 때 마다 불빛에 반사되어 차갑게 빛나는 그의 두터운 안경이 그의 눈물을 감추기도 한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 분연히 일어난다. 그리고는 나를 데리고 시끄럽기 짝이 없는 술집으로 데리고 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면서 술을 마신다. 그래서 곤드레가 되고 밤을 새운다.
그런 그가 이제는 늘그막에 안정된 직장을 가졌다. 지금은 메일이 온다. 그 속에는 차이코프스키도 있고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도 들어있다. 나이 60에도 우리는 까까머리 때 들었던 노래를 잊지 못한다. 언젠가 한번은 노래방에 가서 학교 다닐 때 부른 가곡만을 골라 부른 적이 있다. “가고파”도 부르고 “오 솔레미오”도 불렀다. 한 곡 한 곡 마다 추억을 담고 향수를 담아 불러낸 그 날의 기억은 별똥별처럼 찬란하다. 아직도 대구에는 녹향(錄香)이 있을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