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복음화율 1위 신안군 증도
120년 해풍 뚫고 세상 빛 소금 되셨네
전남 신안군 증도면 선착장에서 차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남동쪽으로 10여분쯤 달리다보면 소나무와 야생초 사이로 4㎞쯤 길게 펼쳐진 백사장과 목조 교량인 길이 470m의 짱뚱어다리를 만난다.
석양 녘 이곳의 노을은 장관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차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어떤 이에게는 ‘비장감’을 주기도 한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 섬이 바로 국내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한국컴퓨터선교회에 따르면 지난해말 현재 복음화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은 신안군(35.1%)이며 그곳에서도 증도는 100%에 육박한다.
섬 관계자들은 복음화율이 90∼95%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6개의 유인도와 93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증도면에는 지난달말 현재 2200명(930가구)이 거주하고 있다. 면적은 고작 41.03㎢.
이렇게 작은 면에 11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야말로 ‘기독교 공화면’이란 표현이 결코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특히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된 방축리의 복음화율은 거의 100%에 가깝다는 게 교회연합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는 이 섬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 면단위 섬 지역에서 교회당만 들어서 있는 곳도 전국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많은 한국 교계 지도자들이 이곳 출신이라는 점이다.
김준곤(CCC 명예총재), 이만신(전 한기총대표회장), 이봉성(전 기성
총무), 이만성(전 기성 총회장), 정태기(전 한신대총장) 목사 등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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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2,200명 외딴섬에
교회만 11곳......
순교이야기,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곳......
순례객 발길끊이지 않으니
외롭지 않네......
주일이면 이 지역 유일한 대형 할인점 하나로마트에는 관광객들만 북적거릴 뿐 주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리 바쁜 농번기라 해도 주일 낮 예배시간에는 지역 전체가 조용하기 그지 없다. 길가에서 행인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해마다 증도를 찾는 관광객들은 줄잡아 3만여명. 이들 가운데 절대 다수는 육지 교회에서 찾아온 순례객이다. 1950년 10월4일 낙조가 바다를 붉은 물들인 해질 녘과 다음날 새벽 사이에 인근 백사장에서 순교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지를 찾기 위해서다.
하늘에 피의 소리(창 4:10)가 울려퍼졌던 문 전도사의 순교 현장과 증동리교회 뒷산에 조성된 묘지,그리고 그의 활동상을 조촐하게 보존하고 있는 기념관과 순교비 등을 돌아본 순례객들은 선착장으로 발길을 돌리다가 비로소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을 풀게 된다. 국내에서 육지도 아닌 이렇게 작은 섬이 왜 가장 높은 복음화율을 기록하고 있는지... (남병곤 편집위원)
120년 해풍 뚫고 세상 빛 소금 되셨네
섬주민 10명중 9명이 기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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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역의 복음화율이 90%를 상회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재적교인이 아니고 출석교인으로서 부풀려진 허수가 아닌 실수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기독교가 국교인 스위스의 경우에도 복음화율은 다소 높을지 모르지만 출석률은 형편없이 낮은 게 사실이다. 스위스교회연합회에 따르면 올해초 기준으로 평생 교회에 출석하는 횟수가 3회 정도에 불과한 교인이 스위스 국민의 반에 불과하다. 태어날 때,결혼할때,그리고 임종 때가 전부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증도의 높은 복음화율을 떠받치고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지역 교회 관계자들의 설명을 듣고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문준경 전도사가 우전리 백사장에 뿌린 순교의 피였다.
문 전도사는 증도 인근 임자면에 1933년 임자진리교회를 개척한 후 증도에 1935년 증동리교회,36년에 대초리교회와 병풍리교회 등을 잇따라 세우는 등 증도에만 10개의 교회를 건립했다.
그후 10개 교회에서 1개 교회가 분교돼 지금의 11개 교회가 됐다. 따라서 이곳의 교회는 사실상 문 전도사에 의해 모두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개 교회 가운데 장로교회 1곳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성결교회라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전체 교회 중 네 곳만 빼고 모두 재정자립도가 높다.
다른 도서·벽지교회 실정과는 전혀 딴판이다. 불과 41㎢의 작은 지역에,그것도 전체인구가 2200명밖에 되지 않은 국토 남단 자락에 이렇게 많은 교회가 이처럼 높은 자립률과 복음화율을 보이고 있는 것과 관련,어떤 이는 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한다.
육지와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던 주민들은 따돌림을 받지 않기 위해 지도자를 따라야만 했는데 그 지도자가 바로 문 전도사였을 것이란 그럴싸한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연합회 관계자들은 ‘천만에’란 단어로 이 해석에 일고의 가치를 두지 않는다. 비복음적 해석이란 의미다.
지금의 복음화율은 전적으로 문 전도사의 ‘영적 유산’이라는 것이 지역 교회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순교자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를 통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성서 말씀이 지금 증도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나눔의 교제를 들 수 있다. 이들 교회는 하나 같이 예배를 마친 후 점심식사를 함께 한다. 누구는 쌀을,누구는 마늘을,또 다른 이는 고추장 된장 간장을,그리고 심지어 참깨까지 자신들이 때를 따라 수확한 농산물과 어패류를 예배 하루 전쯤 교회로 가져온다. 초대교회 당시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음식을 나누면서 갖가지 정보를 교류한다. 교회 소식뿐만 아니다. 농사 짓고 고기 잡는 일에서부터 자녀들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털어놓으면서 식탁을 함께 한다.
가감 없이 털어놓는 성도들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청취한 목회자는 성도 가정에 대해 기도 제목을 정하고 새벽마다 기도의 제단을 쌓는다.
셋째,스포츠를 통한 전도를 꼽을 수 있다. 이 지역 교회들은 반드시 한달에 한번씩 축구경기를 즐긴다. 교회 성도끼리는 물론 교회 대항 축구경기도 펼친다. 교회 주변 잔디밭이나 백사장을 축구경기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예 교회가 축구경기를 위해 잔디구장까지 소유하고 있는 교회도 있다. 바로 우전리교회(양봉곤 목사)다. 증도교회연합회는 매년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행사에서도 추모예배가 끝나면 교회별 축구 리그전을 개최한다.
축구는 이미 증도면에서는 전도·화합 스포츠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순교로 일군 믿음의 전통...
예배후 식사·축구대회 두터운 친교도 부흥 거들어
이런 증도에도 변화의 바람은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다. 2009년이면 증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개통을 위해 연륙교 교각 공사가 한창이다. 다리가 완공되면 서해안고속도로 무안IC에서 증도까지 승용차로 불과 50분 정도면 족하다.
그때에는 순례객들도 지금보다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교회 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증도를 찾는 순례객이 한 해 거의 10만명에 이르게 된다. 증도교회연합회는 변화의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
문 전도사가 뿌린 순교의 피를 더욱 순수하게 간직하기 위한 순교사업에 열정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열정이 한국 교회 성도들을 끌어들이는 ‘블랙홀’로 자리매김할지 사뭇 기대가 크다. (남병곤 편집위원)
섬주민 10명중 9명이 기독인
11개 교회 개척하고 쓰러진 신앙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 문준경전도사 |
기념사업회가 소장하고 있는 문준경 전도사 일대기에 따르면 문 전도사는 1891년 2월 전남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 문 진사댁 셋째손녀로 태어났다.
17세 때 증도면 대초리에 살던 정삼남씨와 결혼했으며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1927년 3월. 당시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목포에서 북교동에 초가교회를 개척한 이봉성 목사(전 기성 총회 총무)의 전도로 그의 삶은 성령의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예수를 영접한 그 이듬해 6월 세례를 받고 곧바로 집사로 임명돼 1931년 5월 서울 성서학원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 당하자 청강생으로 수강한다. 기념사업회측은 그때의 일을 일대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식비가 부족해 배가 고파 쓰러지기도 했고 기숙사 식당에 들어가 솥에 남은 누룽지를 긁어 먹고 숭늉을 마시며 기운을 차린 후 원장 목사를 찾아가 본과생으로 받아주길 애원했다.” 결국 이 목사의 보증으로 본과에 입학,1936년 5월 졸업한다.
그후 무안군 일대 21개 섬 지역을 순회하면서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몸을 워낙 돌보지 않았던 탓에 55세에 몸져 누웠으며 그 와중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그러다가 성도들이 그의 회갑을 앞두고 조촐한 잔치를 준비하던 중 비운이 닥친다.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1950년 9월28일 새벽 문 전도사는 이 목사와 함께 공산당원들에 의해 목포 정치보위부로 압송된다. 하지만 연합군의 반격으로 일시적 자유를 찾는다. 그러나 10월4일 밤,공산당의 대대적인 숙청 작업 때 순교한다.
신안군 지역에서 ‘종교적 반동 제1호’로 몰려 사형수 대열에 끼여 짱뚱어다리 근처 백사장으로 끌려가 붉은 피를 뿌린 것이다. 공산당원들은 곤봉과 비수,죽창 등으로 문 선교사를 난도질하면서 이렇게 내뱉었다.
“너는 반동의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 60세를 일기로 백사장에 순교의 붉은 피를 뿌린 문 전도사는 ‘아벨의 핏소리’(창 4:10)를 내면서 이렇게 순교했다. (남병곤 편집위원)
11개 교회 개척하고 쓰러진 신앙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힘모아 추모 기념관 지어야죠”
↑ 지영태목사 |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사업회장인 대초리교회 지영태 목사(사진)는 “문 전도사가 순교 직전까지 무안군(지금의 신안군) 섬 지역에 세운 교회는 증도에 10개를 포함,기도처까지 합하면 무려 60여 곳에 이른다”고 말했다.
따라서 순교하지 않고 현재 생존해 있다고 하더라도 순교자 이상으로 평가 받았을 것이라고 지 목사는 설명했다.
특히 기도원이나 교회 등지에서 기도 중 순교한 순교자와는 그 형태가 다르다고 지 목사는 강조했다.
지 목사는 “문 전도사는 당시 무안군 일대 모든 섬과 목포 일부까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제공하고 병든 자에게는 사랑의 의사로,임신부들에게는 산파 역할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으며 “1년이면 보통 고무신을 아홉 컬례나 갈아 신었을 정도로 그의 삶은 사랑과 봉사의 열정으로 넘쳐흘렀다”고 문 전도사의 활동상과 삶을 소개했다.
그러나 지 목사는 “지역교회연합회의 재정이 워낙 열악해 아직도 변변한 기념관 하나 건립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면서 “그의 신앙과 삶을 신학적 교회사적 측면에서 조명하고 그에 걸맞은 기념관 건립을 위해 한국 교회와 교단에 적극적인 관심을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히고 교단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랐다.
매년 3월10일이면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연합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내년에는 좀 더 색다른 예배를 기획하고 있다. 지금까지 추모 연합예배를 증도면 주민들만 참여하는 지역 축제로 치렀으나 내년에는 주민은 물론 교단 관계자 및 순례객들과 함께 순교 현장인 증동리 백사장에서 전국적인 추모 예배를 드릴 계획이다. (남병곤 편집위원)
힘모아 추모 기념관 지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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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는 험하고 부정직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시각에 비추어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온 국민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새겨줬으면 합니다.
한손에는 복음,한손에는 국민일보를 들고 그리스도인은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매진해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탄식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고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우리가 애통하고 갈망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영적 요구를 국민일보가 제시해주고 있어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시작할 때 많은 염려 때문에 하나님께 많은 기도가 필요했던 국민일보가 벌써 창간 18주년을 맞았습니다. 성년식을 치러야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책임 있는 여론을 선도하는 신문이 돼야 합니다.
또한 성경적 관점으로 정론을 펼침으로써 독자들이 성시화의 역군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참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을 기대해봅니다. 18년을 한결같이 국민일보를 섬겨온 관계자 여러분의 수고를 하나님이 축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국민일보 창간 18주년을 맞아 지구촌의 굶주린 이웃을 섬기는 한국 NGO와 기아대책 가족들을 대표해 축하인사를 드립니다.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국민일보를 구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물론이고 기독교 안에 숨어있는 신실한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접하고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기아대책이 1989년 지구촌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탄생했을 때 국민일보는 기아대책 아프리카 사역 현장을 생생하게 보도하고 오늘의 기아대책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 선진 각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던 국내 NGO들로 하여금 원조를 하는 NGO로 전환하는 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은 물론 이 땅에 기부문화를 정착시키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앞으로도 어려운 이웃을 위한 일에 귀한 지면을 많이 할애해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믿음의 아침 열어줘서 고마워요!
나와 국민일보
↑ 김성일 소설가 |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성경의 ‘욥기’에 등장하는 욥도 자신에게 갑자기 닥쳐온 고난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질문을 하다가 결국 폭풍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태풍과 천둥 가운데서,또는 재난과 지진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즉 국민일보에 실려 있는 모든 기사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담겨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사람이 그 음성을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욥 37:2∼3) 온 국민의 관심과 열정을 하나로 끌어모았던 서울올림픽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허탈해졌다.
그때를 틈타 종말론의 안개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들떠있던 국민의 열기를 이어줄 만한 국가적 프로젝트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럴 때 국민일보가 탄생했다. 그것은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뉴스의 행간에 하나님의 음성이 담겨 독자들의 손에 배달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 역시 날마다 국민일보 기사를 오려서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필자는 소설과 칼럼 등으로 재생산해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건은 1990년과 91년 국민일보에 장편소설 ‘땅끝의 시계탑’을 연재했던 일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리고 있던 당시 미국과 유럽,그리고 중국,북한까지를 넘나들며 전개된 이 소설은 이경조 화백의 멋진 삽화와 함께 독자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고 국민일보와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데도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또 하나 감회 깊은 일은 97년 국민일보의 후원으로 창조사학회에서 진행했던 ‘한민족기원대탐사’ 프로젝트였다. 필자의 장편소설 ‘홍수 이후’와 ‘성경으로 여는 세계사’의 배경이 되는 이라크와 터키,그리고 시베리아,몽골,중국에 걸친 광활한 지역을 답사하는 대장정이었다.
현지를 누비며 노트북에 원고를 써보내던 필자는 물론 탐사대원 모두가 감격했으며 연재되는 기사를 읽는 독자들도 놀랐고 답사 결과는 학계에도 큰 충격을 안겨줬다. 그후에도 필자는 자주 국민일보에 글을 게재하고 있다.
국민일보의 기사를 오려서 스크랩하고 그것으로 글을 쓰다가 이제는 독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하는 처지가 되었다. 지구촌에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국민일보에서 전화가 걸려 온다.
이번 사건을 복음적 시각으로 조명하는 원고를 급히 써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필자는 지금까지 국민일보와 함께 살아왔다. 그래서 아침마다 국민일보를 받아보는 기쁨이 매우 크다. 신문을 만들고 배달하는 모든 분들을 떠올리며 혼자서 말한다. “여러분,고마워요.”
나와 국민일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문전도사의 헌신과 사역은 한톨의 밀알이 되어 30배, 60배, 1백배의 열매를 거두었고, 그녀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우리 곁에 남게되었습니다.
스무살때부터 국민일보를 보아왔다는 가수 장나라씨는 소외이웃돕기에 앞장서온 국민일보를 보면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웠다며 진한 애정을 표현했다.
국민일보 창간 18주년을 축하드립니다.
← 가수 장나라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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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국민일보에 실린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님의 글
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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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1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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