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토요일(창세 27,1-5.15-29)(마태9,14-17)
제1독서 <야곱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다(27,36 참조).>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7,1-5.15-29 1 이사악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큰아들 에사우를 불러 그에게 “내 아들아!” 하고 말하였다. 에사우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 그가 말하였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3 그러니 이제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 오너라. 4 그런 다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하겠다.” 5 레베카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우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 그래서 에사우가 사냥하러 들로 나가자, 15 레베카는 자기가 집에 가지고 있던 큰아들 에사우의 옷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꺼내어,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그리고 그 새끼 염소의 가죽을 그의 손과 매끈한 목둘레에 입힌 다음, 17 자기가 만든 별미와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들려 주었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가 “나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묻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르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20 그래서 이사악이 아들에게 “내 아들아, 어떻게 이처럼 빨리 찾을 수가 있었더냐?” 하고 묻자, 그가 “아버지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일이 잘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이사악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인지 아닌지 내가 만져 보아야겠다.” 22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에게 가까이 가자, 이사악이 그를 만져 보고 말하였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 23 그는 야곱의 손에 그의 형 에사우의 손처럼 털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축복해 주기로 하였다. 24 이사악이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냐?” 하고 다져 묻자, 그가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러자 이사악이 말하였다. “그것을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너에게 축복해 주겠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그것을 가져다 드리니 그가 먹었다. 그리고 포도주를 가져다 드리니 그가 마셨다. 26 그런 다음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입 맞춰 다오.” 27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사악은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였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는 주님께서 복을 내리신 들의 냄새 같구나. 28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29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살 때에 가진 습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어에도 비슷한 표현 ‘요람에서 배운 것이 무덤까지 간다.’라는 뜻으로 ‘What's learned in the cradle is carried to the grave.’라는 표현을 보면 동서고금의 교훈의 내용은 공통적인가봐요.
이 속담을 생각하다 보면 ‘글 쓰는데 미루는 버릇’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글 원고 마감 시간이 되어서야 치약을 짜듯 마지막 순간에 글을 쓰는 버릇은 여전하거든요. 시간이 많을 때 글 생각이 나면 얼마나 좋아요. 초등학교 시절 지금 생각해도 실컷 놀며 숙제를 안 하다가 아침 학교에 등교하기 직전에 서둘러 쓰던 기억이 추억처럼 남아 있습니다. 미리 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시간 있을 때는 딴 전을 부리며 미루다가 끝에 가서 쓰는 버릇이 지금도 끈질긴 뿌리처럼 연결되었나 봅니다. 이제는 아침이 아니라 낮에는 묻혀 있던 생각들이 한 밤중에야 솔솔 나지 뭡니까? 그래서 자다가 일어나서 글을 쓰는데, 그 때는 시간도 넉넉하지만 아침이 돼서야 잠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시골 본당에 온 것이 축복 중에 축복이라는 생각을 하며 고치지 못하는 ‘세 살 버릇’담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이 속담을 생각하다보니 인간의 조건에서 ‘습관화(習慣化 habitation)라는 말에 대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습관은 반복되는 것들에 감각이 무뎌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자극을 계속 반복하다보면 감각이 둔해지고 나중에는 여기에 대한 반응이 없어지게 마련이지요. 이런 인간조건을 긍정적인 면에서는 어렵고 서툰 것이 익숙해 져서 쉬워지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전문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 조건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반복되어 굳어지기는 한데 새로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습관화에서 오는 새로운 시도새로움이 없는 무감각과 무관심의 세계로 나가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구약의 관습에 길들여 있던 사람들입니다. 비록 성경의 말씀이 굴절되었다 해도 그들은 선조들이 해오던 그 습관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대해서 그들은 당연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한번 들었던 습관화도 고치기 힘든데 대대로 내려오는 이스라엘의 전통도 사실 고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당시 단식하는 관습에 지문을 합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마태 9,14) 물론 단식의 전통에 대해서 주님께서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질문하는 세례자 요한 제자들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설명을 해 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 진정한 단식은 그 정신에 있는 것인데 오랫동안 전통으로 내려오다 보니 사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단식법 보다는 허례허식으로 흘렀던 것입니다.
이미 전통으로 굳어진 단식이다보니 내적인 정신보다는 아무래도 외적으로 드러나는 형식에 치우쳤다고 하겠습니다. 스승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차 스승을 잃고 슬퍼할 시간이 다가 오고 있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습관화 된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새로움의 시작은 도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알 듯 도전에는 언제나 저항 세력이 있기 마련이지만 주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6-17)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에서 새로운 계명을 주시는 것은 새롭고 획기적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법인 악에서 떠나 선을 실천하는 대 명제에는 공통적인 것이지요. 그러나 오랜 세월 율법의 정신이 왜곡되고 또 형식적으로 된 것을 바로 잡으려 그 정신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새 부대에 새 술’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작은 걱부터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편하고 이기적인 이유에서, 또는 환경에 의해서 잘못 밴 자질구레한 습관들에서부터 우리가 하나하나 새롭게 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정한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힘이 아닌 주님의 도움도 물론 함께 해야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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