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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ic school 지혜와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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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한 학파로서 스토아 학파는 고대의 뛰어난 지성인들 가운데 몇 명을 포함하고 있다. 제논(Zenon BC 335~263)이 스토아(현관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stoic도 같은 뜻을 의미한다)에 세운 이 학파의 철학적 운동은 아테네에 있는 지성인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후에 키케로, 세네카, 에피크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로마의 지식 운동가들을 발굴하게 되었다.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은 청년 시절 윤리적인 가르침, 특히 소크라테스의 용기 있는 죽음에 감명을 받아 철학적 삶을 삶의 목표로 삼은 인물이며 그리스 철학의 한 지류를 형성할 수 있는 학파를 이끌어 논리학, 물리학, 윤리학의 탐구에 힘썼으나 점차 윤리적 분야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로마의 철학으로 옮겨갔다. 그리스의 지식인이 로마의 가정교사로 이직하던 시기에 철학은 그와 같은 운명을 조용히 수용했다. 1. 지혜와 행복 스토아 학파의 철학도 역시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추구하였으나 에피쿠로스학파와는 달리 쾌락에서 대량의 행복을 추출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지혜를 통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길을 선택했으며 그것만이 실현 가능한 통로라고 믿었다. 즉 지혜에 의해 그들은 인간의 능력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이를 적절히 조절해야 바른 삶을, 올바른 삶을,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점잖게 조언했다. 그들은 주로 조용히, 용기 있게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적 자세를 항상 마음에 새겨두었으며 그들의 삶 또한 그러하기를 기원하였다. 스토아 학파는 생존의 위협, 죽음의 위협을 앞에 두고 감정을 억제하는 경건한 태도를 삶의 귀감으로 삼았다. 에피크테토스는 말하기를 “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죽음의 두려움을 피할 수는 있지 않을까?” 더욱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루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충고하곤 하였다. “사건들이 당신이 의도한 바대로 일어나기를 바라지 마라. 오히려 그것들이 일어나는 대로 진행되기를 원하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라고.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은 우리가 모든 사건을 통제할 수 없으며 단지 일어나는 일에 대한 우리의 자세만을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설파하였다. 어쨌든 사건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의지의 행위에 의해 공포를 억제하는 일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건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그들은 말하였다. 이 도덕철학에는 우아한 단순성은 있으나 그것은 지식의 생산자들에게나 맞는 철학이었다. 이 철학의 결론은 개인의 태도를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매우 간단한 이러한 결론은 세계가 어떻게 되어 있고 인간이 어떻게 이 세계에 적응하는가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나온 것이었다. 그들에 의하면, 세계는 인간과 물질적인 사물들이 목적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질서 정연한 배열 장소였다. 그들은 자연 전체에 걸쳐 이성과 법칙이 작용함을 조사했고 그를 일깨웠다. 스토아 학파는 세계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 특별한 신(神)의 개념을 도입하였는데, 그들이 도입한 신은 자연 전체, 즉 모든 사물 안에 존재하는 이성적인 실체라고 생각되어, 자연의 전구조를 통제하고 배열하며, 사건들의 경과를 결정하는 형이상학적 존재, 실제적인 형태의 이성이 곧 그들이 말하는 신이 되었다. 여기에 도덕철학의 근거가 놓여 있고 이러한 문제에 대해 스토아 철학이 취한 방향은 그들의 인식의 본질에 관한 이론에 의해 결정되었다. 2.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 스토아 학파는 인간이 어떻게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세밀하게 탐구하였다. 이러한 탐구가 전적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그들의 인식론은 중요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첫째로 자연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 조성과 둘째로 진리 혹은 명증성에 대한 발판을 마련한 점이 그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의 이 두 가지 결과는 관념의 기원을 설명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에 의하면, 언어는 사유를 표출해 주며 사유는 외부 대상이 정신에 미치는 충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정신은 태어날 때에는 비어 있으며, 그것이 대상들을 경험함에 따라 관념들이 채워진다는 것이다. 이들 대상은 감관(感官)을 통해 정신에 인상(印象)을 남기며, 이것은 마치 도장으로 밀초 위에 압인(壓印)을 남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사물의 세계와 계속해서 접촉하게 되면 많은 인상이 생기고 기억이 늘어나며, 또한 우리는 우리 바로 앞에 있는 대상들을 넘어서 더욱 일반적인 개념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가 직면한 실제적인 문제는 일반적인 관념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사유가 감관과 어떻게 연관되는가를 설명해야만 했다. 나무나 건물에 대한 관념은 우리가 나무나 건물을 보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어떻게 보편 관념 즉 선(善)의 관념처럼 우리의 감관을 넘어서는 관념을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실제적인 대답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스토아 학파는 결국 모든 사유는-판단과 추론을 나타내는 사유마저도- 감관과 연관되어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어떤 사물이 선(善)하다거나 참(眞)이라고 하는 판단 혹은 추론은 인상의 기계적인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사유이든 인상과 더불어 시작하며, 몇몇 사유는 감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감정은 우리에게 지식을 줄 수 있다. 그것은 확실성의 느낌을 주는 근거인 “불가항력적인 지각들”의 원천이다. 후에 회의론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설명으로는 그것에 반대하는 모든 비판적인 질문에 대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그 속에서 진리의 근본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인식론을 통하여 자신들의 일반적인 철학에 대해 매우 특징적인 시야를 갖게 되었다. 이렇듯 스토아 학파의 인식론은 유물론적 유형에 보다 천착하며 그들의 영역을 넓혀갔다. 3. 모든 실재와 신(神) 스토아 철학은 이러한 유물론에 의해 물적(物的) 세계와 인간 본성에 대한 순수한 개념을 갖게 되었다. 스토아 학파가 물질적인 자연에 대해 가지게 된 광범위한 관점은 실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적이다 라는 논리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우주 안에 있는 만물은 어떤 형태로든 물질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세계는 불활성적인 혹은 수동적인 물질의 창고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변화하는 가운데 구조화된 질서 정연한 배열을 구현한다. 그렇다면 자연에는 불활성적인 물질 외에 그러한 것들을 능동적으로 배열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고, 이 힘은 물질과 다른 것이 아니라 물질의 다른 형태이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공기나 호흡처럼 계속 움직이는 미묘한 사물이다. 스토아 학파는 그것을 불(火)이라고 말했으며, 이 불은 모든 사물에 퍼져 있어서 그것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고 하였다. 이 물질적인 불이 이성의 속성을 가지며 존재의 최고 형태를 취할 때 스토아 학파는 이 이성적인 힘을 신(神)이라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토아 철학의 중추적인 관념은 신이 만물 안에 내재한다는 개념이다. 신은 불, 힘, 로고스, 이성이며 그것이 만물 안에 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곧 자연 전체가 이성의 원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결론과 같은 이야기이다. 스토아 학파는 물질의 발산성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하였다. 그것은 여러 형태의 물질이 서로 혼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 의하면 신의 물질적인 실체가 정지해 있지 않다면 앞으로 정지하게 될 물질과 혼합된다. 물질은 자체 속에 이성의 원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이 행하는 발대로 행동한다. 이 원리에 일치된 물질의 연속된 행위가 곧 자연의 법칙(法則), 즉 한 사물의 본질에 대한 법칙이라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가 모든 사물에 대해 뜨겁게 불타는 모체인 자연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과, 모든 사물들은 직접 신의 구조화하는 이성의 각인(刻印 impress)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행하도록 배열된 그대로 계속 행위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우리는 스토아 학파가 어떻게 이러한 관념들로부터 숙명과 섭리의 개념을 전개시켰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 숙명과 섭리, 그리고 인간 스토아 학파에게 섭리가 의미하는 바는 모든 사물과 사랑은 로고스(logos), 즉 신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에 사건은 그것들이 신 안에서 행하는 바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전세계의 질서는 그것의 모든 부분의 통일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물질의 전체 구조를 통합하는 것은 만물에 퍼져 있는 불의 실체이기 때문에 우주 안에는 어느 것도 묶여 있지 않는 것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흔들리는 소리를 내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가 수립한 도덕 철학은 전체적으로 통제되는 물질적 우주에 대한 이러한 배경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를 이해하고 수긍하는 행위와 닿아 있었다. 스토아 학파는 다음의 사실을 알고 있었다. 즉 도덕 철학을 수립하고자 하면 우선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견해를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본성을 자세하게 기술할 때 사용하는 똑같은 관념들을 인간의 연구에 똑같이 적용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정당화했다. 세계가 이성 혹은 신이라 불리우는 불의 실체에 의해 퍼진 물질적 질서인 것처럼 인간은 이와 똑같은 불의 실체에 의해 퍼진 물질적 존재이다. 인간이 자신의 내부에 신성(神性)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실제로는 인간이 신의 실체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신은 세계의 영혼이며 인간의 영혼은 신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신성의 불꽃은 인간의 육체에 스며들어 그것을 움직이게 하고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순수한 물질적인 실체였다. 영혼은 유형적이며 신에게서 비롯되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부모에 의해 자식에게 전달된다. 스토아 학파는 영혼은 심장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혈류를 통해 순환한다고 생각했다. 영혼이 육체에 첨가해 주는 것은 말하는 능력과 재생산의 능력뿐만 아니라 오관의 민감한 메커니즘이었다. 신은 로고스, 즉 이성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 또한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결국 인간의 개성은 그 이성의 힘 속에서 독특하게 표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에게 있어 인간의 이성 능력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다거나 사물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연의 이성적 구조와 질서에 대한 인간 본성의 참여를 의미하였다. 인간의 이성 능력은 사물들의 실제적인 질서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음을 나타내 주었다. 그것은 모든 사물이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이 법칙의 질서에 인간의 행동을 관계시키고자 하는 것이 스토아 학파의 도덕 철학의 주된 관심사였다. 5. 윤리와 인간의 연극 스토아 학파의 도덕 철학은 단순한 통찰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인간은 연극 속의 배우로 자주 비유되곤 하였다. 에피크테토스는, 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연출가나 작가라는 사실을 지적했었다. 세계의 연극 속에서 각 인간의 배역과 역사 속에서 개인이 처할 상황을 결정하는 것은 이성의 원리인 신(神)이다. 스토아 학파에 의하면 인간의 지혜는 이 연극에서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고 맡은 부분을 잘 수행해 내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단역을 맡고 어떤 사람들은 주역을 담당한다. “당신이 가난한 자의 역을 맡는 것이 신의 즐거움이라면 당신은 그 역을 잘 소화해내야 한다. 절름발이나 지배자 혹은 소시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 당신의 할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에피크테토스는 말한다. 배우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다른 배우들이 누가 될 것인가 또는 배경의 모양과 형태 등에 대해, 그리고 극의 전개나 그 주제에 대해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그 자신의 태도와 감정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가 단역을 맡았기 때문에 화가 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영웅역을 맡았기 때문에 시샘할 수도 있다. 분장가가 그의 얼굴에 아주 못난 코를 붙인다면 그는 매우 슬플 것이다. 그러나 분노나 시샘, 모욕감도 자신이 단역을 맡았고 영웅이 되지 못했다는, 추한 코를 붙여야 한다는 사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감정에 의해 단지 그의 행복이 사라질 뿐이다. 그가 이러한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소위 무관심의 경계에 이르는 길뿐이며, 그렇게 된다면 그는 평정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현자(賢者)는 그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는 게 스토아 학파의 주제였었다. 6. 자유(自由) 그러나 스토아의 도덕 철학에 아직 남아 있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신의 이성에 의해 고정된 자연의 구조에 대한 스토아 학파의 분석은, 우리가 이 거대한 구조를 우주의 연극으로 간주하는 경우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배우 자신이 배역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연극에서 배역을 선택하는 것과 맡은 배역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하는 것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당신이 선택할 자유가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자신이 맡은 배역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인가? 신이 당신을 가난한 자로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불만에 가득 찬 가난한 자로 연기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수긍이 간다. 그러나 극(劇)의 필연성을 벗어나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배우에게 주어진다면, 태도들이 지나가는 인류의 행렬에 의해 선택될 수 있도록 제멋대로 떠다니며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가? 스토아 학파는 태도를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통제력 안에 있다고, 다시 말해 인간은 의지의 행위에 의해 사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완고하게 고집했다. 그러나 그들은 섭리가 만물을 지배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태도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전우주 안에 있는 만물의 법칙, 혹은 이성에 따라 행동하지만 인간이 그 법칙에 대한 자신의 지식에 따라 행동한다는 사실은 곧 인간의 특징이라는 점을 강조했고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스토아 학파는 자신들의 도덕 철학을 다음과 같은 신념 위에 구축하였다. 즉 인간이 엄밀한 법칙을 알고 있으며 그의 역할이 필연적임을 이해한다면 그는 무리하면서 필연적인 일에 반대하지 않고 역사와 세계의 방향에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행복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이미 필연적으로 정해진 대로 되어야 하는 과정에 동의하는 데서 비롯되는 존재의 성질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며, 그러므로 자유는 인간의 운명을 변경시키는 힘이 아니라 마음에서 혼란을 정돈하는 힘을 말하는 것이라고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은 굳게 믿었다. 7. 세계주의 스토아 학파가 세계주의의 개념, 즉 만인은 같은 인간 공동체의 시민이라고 하는 개념을 표방한 것은 무리한 발상이 아니었다. 세계 과정을 연극으로 간주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스토아 학파에 의하면, 인간은 신성한 불꽃의 운반자이기 때문에 인간 관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인간과 인간이 하나의 공통 요소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의 경우와 같다. 즉 로고스는 주 전화선이며 각 인간은 자신의 전화를 가지고 있다. 전체의 회로가 공동선으로 되어 있으므로 신과 모든 인간이 연결되고 인간들 상호간에도 연결된다.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었다. “이성은 인간에게도 신에게도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과 신의 첫 공동 소유물은 이성이다. 또한 이성을 공동 소유하는 자들은 올바른 이성을 공동 소유해야 한다. 올바른 이성은 곧 법이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이 신들과 공통되는 법을 소유해야 한다. 더욱이 법을 공유하는 자들은 정의를 공유해야 하며 이와 같은 것들을 공유하는 자들은 같은 국가의 구성원이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보편적인 형제애와 정의에 대한 보편적인 자연법 이론은 스토아 학파에 의해 서구의 정신 속에 판각되었고 지대한 기여를 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들은 사상의 흐름 속에 근본 주제들을 형성시켜 놓음으로써, 특히 다음 시대의 기독교 철학의 길을 닦았고 결정적인 영향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이 에피쿠로스 철학과 대부분 공동된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약간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마찬가지로 스토아 학파는 윤리적인 실천적 관심사들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절제를 윤리의 핵심으로 간주했으며, 본성을 유물론적인 용어로 나타냈고 행복을 목적으로 추구하였다. 스토아 학파에 의해 수행된 가장 특기할 만한 변화는 그들이 세계를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질서 정연한 정신, 즉 이성의 산물이라고 보았다는 사실이다. 스토아 학파는 인간의 지혜의 가능성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기대를 표했었다. 그러나 지혜에 대한 이러한 주장, 즉 우리가 세계의 세부적인 할동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는 스토아적 주장에 반대하는 회의론자들의 등장하게 된 것 또한 스토아 학파가 그만큼 본격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었다. 마무리 어느새 장마가 끝나고 여름이 되었다.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 어느 한 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거짓이나 위선이나 허상이 아니라는 확신을 지니는 것, 보다 어렵고 신중한 판단이 있는 그대로 강요되는 지점에 비가 그치고 무더운 바람이 분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아이의 웃음은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은 어떤 눈으로 우리를 쳐다볼까.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앞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과 있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지닌 시공이 펼쳐질 때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확실하다고 말하는 순간조차 확실한 것은 많지 않은 법이고 그것은 언제 어떻게 우리의 의식 속에 다른 확신을 꺼내놓을지 분명하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젊음이 죽고 예술은 그 가운데 살아남을 가치를 이야기한다. 뉴트롤스의 음악이 한 때 나의 지평을 갈랐던 것처럼 다만 그것이 기억되는 어느 순간 여름이 되었다. 스토아 학파는 한 때 우리가 기억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청춘의 이야기를 닮았다. 그 때는 그래도 깨끗했고 풍부했으며 신뢰할 수 있었고 또 희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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