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우크라이나!
마국사람들이 "유크레인"이라며 나라 호칭의 발음까지 바꾼 수난의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가서는 유창한 영어식 발음으로 "유크레인"이라고 하면 그 사람들 속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스코바"에가서 "모스코우"라고 할 때 처럼 말입니다.
요즘 크리미아 반도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분쟁이 큰 이슈입니다.
이 동네와 인접한 발칸반도도 한때 세계의 화약고로 불리워졌을 만큼 갈등이 계속되었던 곳입니다.
과거 세계최대의 밀 수출항이었던 오데싸를 끼고 있는 유럽의 곡창, 검은 땅 우크라이나가 어떤 곳인지 알아볼까요.
어릴 적 토니 커티스와 크리스티네 카우프만,
율 부린너가 주연한 "대장 부리비"(Taras Buriva)에 나오는 코작크족의 본거지이기도 합니다.
그 때 크리스티네 카우프만의 눈물젖은 슬프디 슬픈 청순한 눈동자가 문득 떠오르네요.
극장에서 돌아온 그날 밤은 벼개를 안고 가슴앓이한 기억도 나고요.
소생은 1990년 조선용 후판 전문 제철소가 있는 마리우폴을 모스코바에서 항공편으로 다녀왔는데
이 때 소련의 도시로만 알았지요.
그 후 소비에트 연방에서 분리 독립하여 우크라이나라는 독립국가가 되었지요.
그래서 그 후 여행수첩정리를 하며 통산 방문국가 수를 62개국에서 63개국으로 +1 수정하였고요.
자, 그럼
독일과 영국과는 반대로, 유럽에서 가장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이 곳을 좀 들여다 보도록 합시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유럽의 곡창이란 우크라이나는 직항편이 없어서 KAL기편으로 모스코바를 경유 러시아항공 AEROFLOT을 바꿔타고 15시간(비행시간 11시간) 걸려 수도 키에프에 도착한다.
생소한 나라 우크라이나는 과연 어떤 나라인지?
(지도)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흑해에 연한 나라,우리와 인연이 깊은 얄타회담이 열렸던 크림반도를 포함 7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러시아, 벨라수시, 폴랜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지정학적으로 이렇게 여러나라와 국경을 접하니 나중에 살펴 보겠지만 이 민족의 수난사도, 압록강 하나를 국경으로 하고도 수 많은 침략을 당한 우리의 역사로 미루어 짐작이 갈 만하다.
1995년에 소련에서 독립하여 300여년간 잊어버린 우크라이나어를 공식 어로 하였으나 아직도 러시아어가 쉽게 통용되고 있다.
인구는 우리와 비슷한 4천7백만명, 영토는 한반도의 3배, 그러나 80%가 평야이니 산이 70%이상인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이다.
첫 인상에 3가지 부러운 것이 첫째 끝없는 평야와 옥토. 아니 황갈색의 흙도 한번만 뒤집으면 새까만 흑토가 나온다.
(흑토)
둘째, 바다를 이룬 숲.특히 키에프 주변은 20여미터 높이의 소나무들, 우리나라라면 한 그루에 2~3천만원 할 소나무가 바다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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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프 근교의 소나무 숲)
셋째는 깨물고 싶도록 하얀 피부의 예쁜 얼굴을 가진 여인들
. (미녀) 외세의 침공에 끝없이 시달려온 우리나라 역사는 저리 가라할 만큼 다난한 역사를 가진 나라가 우크라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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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키에프城 )
먼저 13세기의 몽골군과의 전투를 살펴 보면
(몽고군의 침공도 )
세계 역사를 바꾼 징키스칸의 몽골군이 1238년 모스코바를 함락시키고 2년 뒤인 1240년에 Batu Khan은 키에프를 침공한다. 10주간의 키에프 시민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쇠뇌로 성벽을 허물고 키에프성을 함락한다
(몽고군과의 전투 장면 )
(몽고군과의 전투하는 키에프 시민들)
징기스칸의 전투 철학은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하면 기득권을 인정하고 점령통치를 상당부분 위임하였으나,
사마르칸트성의 경우처럼 저항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씨를 말리는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성이 함락된 후, 엄청난 살육과 약탈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 후 200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아야했다.
(무너진 키에프 성문 )
그러나 지금도 남아 있는 성문(Golden Gate)를 통해 입성한다.
(몽고군들의 약탈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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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복원된 옛 성문 )
이 기간 동안 슬라브족의 정치적 중심지는 지금의 모스코바로 이동하게 되었다. 14세기 들어서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당시의 강국인 인접국 리트아니아에게,16세기에는 폴란드에 의해 분활 점령되고 만다.
16세기에 접어들어 러시아황제의 압제에 못 이겨 도망 오는 난민들이 바로 코사크 족으로 이들이 우크라이나에 정착하여 폴란드에 항거하여 우크라이나 민족성을 유지 보전하는데 큰 기여를 한다.
(폴랜드와 전투하는 코사크기병대 )
이 당시를 무대로 한 영화가 “대장 부리바”이다. 폴란드가 터키의 침공을 받자, 폴란드에 인접한 기마족 코사크는 폴란드와의 동맹국으로서 전쟁에 참여한다.
하지만 폴란드가 배신하자, 코사크족은 대초원을 되찾기 위한 재기와 복수를 다짐한다.
(대장 부리바로 분한 율 부리너 )
1654년에서 부터는 러시아 황제 알렉세이에게 합병되어 고르바쇼프의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해 소련 중앙정부의 장악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1990년 7월 16일 36년이 아니라 장장 336년간의 러시아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된다. |
(옐친과 독립서명 )
물론 그 중간에 2차대전으로 나치의 침공이 있을 때,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우크라니나는 키에프를 방어하기 위해 72일간 저항하였으며 그 동안 폭격으로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 되었고,
1943년 11월 6일 나치에서 해방될 당시 키에프의 인구가 겨우 18만명만 살아 남았다고 하니 戰前의 93만 인구를 감안 하면 5사람 가운데 한 명만 살아 남았은 셈으로 그 참상을 상상하고도 남는다.
나치의 잔혹상은 우크라이나가 지금도 축구 강국이지만
점령기간 동안 1942년 여름,
키에프 클럽 축구팀과 나치군 사이에 친선 축구 경기가 있었는데 이때 져주기로하고서 키에프팀이 5:3으로 이기자 그 가운데 스타 플레이어 4명을 총살한 유명한 축구사의 “죽음의 대전”으로 불리 는 사건이 발생한 것도 우크라이나 국민의 저항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최초 여수상 )
Babi Yar 라고 불리는 유태인 대학살이 1941년 9월 29일 발생하였는데 나치가 키에프에 살고 있는 유태인을 강제로 불러 모아 발가벗긴 후, 사나운 개들로 하여금 물어 뜯게 하면서 낭떠러지에 이르자 기관총으로 학살하여 33,771명을 학살한 유명한 사건이다.
키에프에서 태어나 나중에 철의 여인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한 유명한 여자 수상인 골다 메이어가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것은 목수인 아버지가 일찌감치 그녀가 8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그녀의 키에프 생가에 동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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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동상 철거 )
러시아공화국의 연방이 된 후에도
스탈린의 집권 기간 동안 모든 성당이 허물어지는 종교적인 박해를 받으며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났는지 기록 이 없어 알 수 없다.
남의 나라의 역사이지만
이 민족도 한 번도 남의 나라 를 침공하여 정복한 기록은 없고
침략만 당하여 타 민족의 지배를 받고 산 비참한 역사의 기록뿐이니
좋게 말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지 정말 한심한 민족임에는 비켜가기가 힘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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