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인천에서 산 적이 있다. 협궤열차 수인선은 지금도 마음의 고향이다. 아니 기찻길 옆 인천역이, 송도·남동·소래역 또한 그렇다. 한국전쟁 직후, 어린 시절의 엄니가 잠시 인천역전에서 국수와 우동을 판 적이 있다. 막걸리도 팔았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빚때문에 속초땅으로 도망가고 안 계셨다. 나는 鳳鎭이란 이름으로 가끔 도원국민(초등)교를 다녀와서 책보를 팽개치고(나는 반장이었다) 부반장 명란이란 계집앨 그리워하며 있었다. 어디 <티비는 사랑을 싣고>에서 출연 제의는 없나, 돈 안 받고 해줄 낀데. (투둘툴…) 아빠 없어 가끔 외롬을 느낀 나는 수인선 기찻길로 홀연히 표표히 나간다. 손에는 대못이 몇 개 들려 있다. 삐이익, 덜컹, 기차 신호가 온다. 내 옆을 ‘온다/간다’는 신호다. 웬 대못? 위험천만케도 난 기차가 지나기 전에 철로 위에다 대못을 얹는다. 기차가 지나간다. 오호, 신나는 납작못! 납작칼, 칼. 난 나쁜 자식이다. 그걸 가슴에 품었다. 따스함을, 생각만 하면 눈물나는 이 따스함을 아니, 당신? 그걸 살살 숫돌에 갈아 칼을 만든다. 겁나는 게 없었다. 그건 내게 슬픈 칼이었다. 슬픈 비밀병기였다. 시인 임영조의 시를 보면, 그때 그 시절의 납작칼이 생각난다. 그는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가슴 내면에 지성미를 은닉한 시인이다.
찻집 로코코(☏535~3275). 4호선 총신대입구(이수)역에서 내리면 태평백화점이 보이고 그 뒤로 파출소, 그 옆이 찻집이다. 따뜻하다. 점 보는 집, 약국 등으로 골목길이 좁고 주차한 차들로 빼곡한 동네는 사람들이 지나기 쉽지 않다. 그런 곳에 형은 산다. 김현식이가 여기서 <골목길>을 불렀다면 아마 몰매 맞았을 걸. 사람좋은, 촌스러워 뵈는, 시골 이장급 정도의 농부 얼굴로 임영조 형이 나타난다. 말씀이 어눌타. 곧장 형의 사무실로 간다. 보고 싶었던 집 耳笑堂에 웃는 귀는 없었다. 미당 선생께서 임영조의 웃는 얼굴을 보고 말씀하셨다는 ‘耳笑’. 글씨만 있었다. ‘대학 때 未堂 선생이 주신/아호에 집 堂자 붙여/近園이 써준 <耳笑堂>/걸고 나니, 가가대소/누옥 한 칸이 확 넓어진다/귀가 웃는 집인가?/귀로 웃는 집인가?’(<耳笑堂 詩篇 1>)가 흥미롭다. <耳笑堂 詩篇 2>는 ‘청하늘 문득 이웃처럼 가까워/귀를 쫑긋 세운다/어디선가 왈왈왈 개 짖는 소리/저런, 미친 놈!/남향창 도로 닫는다/귀도 그만 닫는다.(부분)’를 대하면 쓴 웃음이 내 안에서 밀려나온다. 그렇구나, 이소당은 닫혀 있다. 절해고도 같다. 아하, 일부러 닫아놨구나. 생각에 잠길 때 ‘어디선가 왈왈왈 개 짖는 소리’에 짜증부리듯 깨어나 ‘미친 놈!’ 하며 ‘남향창(을) 도로 닫’게 된다. 그러니 형의 귀도 닫힐 수밖에. ‘웃을 소笑’자. 한자 笑를 난 정말 좋아한다. 크게 써서 보라, 읽으시라. 웃음이 절로 나온다. 형상을 본뜬 모양이지만 역시 거듭 감탄스럽다. 나도 笑笑笑, 하고 웃어볼꺼나. 요사스러움(夭)이 뵈는 걸 보니 웃음은 간드러짐도 실낱 웃음도 다 좋은 건가 보다. 요모조모로 글자뼈를 한번 쫀쫀히 핥아보자.
그런데 기막힌 건 웃음 모양을 본뜬 글자 형태 역시 기막히게 웃음띤 생얼굴 그대로라는 점이다. 매우 편안한 해학적 본능과 웃음의 관능미! 그렇다, 편한 웃음에도 관능미가 살아있다. 잔 실주름 펴지는 웃음을 짓는 영조 형이 글자와 닮았다. 또 부처 형상의 임영조도 있다(그는 카톨릭 신자다). 깔끔하다. 원, 홀아비방 같지 않고 워찌 이처럼 깨끗하다냐. 나랑 비슷한 성질과 성깔이 보인다. (난 좀 좀스럽다.) 형의 사무실이 부럽다. 이런 방이 있다면. 댓 평짜리라도 원 룸이나 오피스텔을 꿈꾸는 나는 3천만원짜리 전세방 이소당이 내겐 아직 ‘드림 하우스’다. 적적·적막, 적요∼. 그 방을 둘로 나눴다. 응접실 깔끔, 집필실 깨끗. 글씨는 근원 金羊東 선생이 주었다. 근원은 43년생 경북 의성 출신으로 경북대 국문학과에서 김춘수 시인에게 배웠고 대학원에서 한학을 전공했다. 현재는 계명대 서예과 교수로 봉직하고 있으며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는 형의 자상한 설명이다. 그리고 보니 소월시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글씨도 보인다. 김 선생은 ‘내 가난한 유년의 꿈이/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직조되는/그 질긴 모정의 베틀 곁에서/나는 늘 허기진 불씨로 눈떠/구구단을 외우고 일기를 썼다’는 시인의 <허수아비의 춤 2-베틀頌>(부분)에 반했다고. 한쪽에 선으로 맹글어진 앙리 마티스의 동판화 <裸婦>가 요염하다. (글쎄, 난 이렇다니까!)
탁자 가까이
나는 지금까지 <커버 스토리>인터뷰를 하면서 녹음기처럼 혼자 중얼중얼 말하는 이를 난생 처음 보았다. 임영조 형이 그랬다. 그는 나의 커버 스토리 계획 과정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응큼하다. 그러니까 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내가 주도하는 게 아니라 형이 인터뷰를 끌고 간다. 묵묵히 기록만 하던 내가 형의 말을 잘라 ‘그러니까…’ 할라치면, 형은 ‘그러므로…’ 하며 재빨리 말을 잇는다. 말씀도 어눌한 양반이, 어쩌믄 말이 쉴 새 없네. 이런 분은 또 처음! 나에 대해 연구 많이 하신겨. 아, 위태위태해.
거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서라벌예대 시절, 김수영과 이형기 시인에게 배웠다고. 그의 깊은 은사로는 역시 미당과 신동엽·이형기 시인. 또 어머니가 내 어머니와 같은 ‘광산 김 씨’라는 사실이다. 우린 어쩔 수 없는 충청도임을 재삼 확인한다. 그 집안은 생활력이 억척이고 총명하며 추하지 않고 당당하다고 한다. 물레를 잣던 형의 모친이 그러셨고 2남 4녀를 돌보신 내 어머니 또한 그러셨다. 《詩와詩學》(’93. 가을)의 자전 <늦깎이의 얼룩진 초상화>에서 형은 이렇게 밝힌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바느질 곱고 베를 잘 짜시기로 소문난 분이셨다.(…중략…) 어머니는 모시를 삼는 일보다 베를 짜는 일에 더 능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가 짠 베는 피륙이 고운 상등품으로 정평이 났었고, 남보다 이삼 일은 더 빨리 짜셨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어머니는 남의 삯베 짜는 날이 잦았다. 뜬구름처럼 대처로 나가 가끔 우울한 소식이나 풍편에 전해 올 뿐, 가산이나 축내는 부친과 자식교육에 무관심한 조부모님께 의탁하기보다 당신의 헌신과 노동으로 아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한 필의 삯베 값은 모시로 예닐곱 자. 서너 필의 삯베를 짜야만 겨우 나의 한 학기 공납금이 마련된 걸로 기억하고 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임영조는 ‘매사에 완벽을 추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갖게 된다. 그렇다. 세모시 올과 결을 타는 어머니의 모습… 형의 손마디에서 나는 그의 어머니를 발견한다, 그 분의 눈물과 땀을 발견한다. 형이 쥔 흐르는 펜에서 한산 세모시 타는 어머니의 섬섬옥수를 떠올린다. 어머니의 자식 학자금 건으로 일한 삯베질에서 나는 전업시인의 노동의 짠 흔적을 채록하고 만다. 나도 잠시 귀를 쫑긋대다 말고 내 어머니를 돌이킨다. 어머니는 다 그립다. 모든 어머닌 모든 자식들의 살과 뼈에 인박혀 1천 2백 년을 사신다, 오천 년을 계신다. 우린 모두 어머니의 피땀을 갉아먹고 살았으니까. 지금은 무지 한스럽다. 어머니는 어머니….
기아의 홍보책자 《수레바퀴》(’98. 1·2월)를 보면 이런 시대를 대비한 고향엄마들의 눈물겨운 저축미 얘기가 나온다. ‘단지쌀·좀저리쌀’이라고도 했다는데, 밥을 지을 때마다 한 움큼씩의 쌀을 한쪽에 담아두었다지. 형의 시 <염소를 찾아서 3>은 슬프다. 슬프다 못해 ‘맴’이 저려온다. 기말고사 보는 날, 미납금때문에 쫓겨난 고2 학생은 ‘고향집에 내려가 식구들 몰래/새끼 밴 염소를 내다’판다(여기서도 시인은 자신의 고달픈 생을 발견하고 있다. 헐값 받고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강제로 판 시인은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굴레 쓴 노역의 염소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어머닌 삯베질로 자식의 학자금을 마련하고, 지금 그 아들은 이소당에서 오로지 시업에 충실하고 있다….
부인이 현직 고교 교사로 오랫동안 학교에 봉직하고 있어 생활비야 문제될 건 없지만, 전업시인 임영조는 그래도 애처럽다. 전업인 만큼 단돈 푼이라도 반드시 원고료를 받아야 한다는 게 철저한 지론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간혹 얼마 안 되는 원고료로 마음을 쉬이 다칠 때가 많다. 이런 걸 방치한 뭇시인들에게도 책임이 크다. 그러고 보면 아내 오계실에게 너무 고맙다. 영원한 직장이 될 뻔했던 <태평양 출판부(홍보실)>를 사직한다는 일은 아내의 큰 격려없이는 불가능했으니까. 그녀는 지금도 고교 교사로 근무중이다. 형, 오 선생님을 어떻게 만났수, 하고 묻는다. 형이 처음 취직한 휘문출판사에 성대 국문과를 갓 졸업, 입사한 오 씨와 근무한 것이 계기라고. 형이 3개월 사이로 두 군데(월간문학/중앙일보)에 당선하자 출판사장의 격려금으로 축하 회식을 했는데, 마침 그 날은 눈이 펑펑 쏟았다.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 한 잔 걸친 그는 음식집을 나가면서 그녀의 뒷 모습께로 이렇게 말을 걸친다. ‘미쓰 오, 우리 데이트 한번 하지.’ 형의 엉큼·구수한 말 솜씨로 평소 음심(?) 품던 여자를 꼬드겼으니, 뭐. 2년 사귀다가 시민회관 별관에서 미당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나니, 얼마 뒤 시민회관이 훨훨 불타오름. 김 선생, 그게 재수 좋다면서? 되묻는데 웃음에서 한자 글씨(笑) 두 개가 보인다. 소설가 이문구 형이 같은 충청도라고 예식날 접수를 맡아줬는데, 끝나고 액수를 물어보니 ‘신혼여행, 하룻밤만 자고 오라’더라고.
어눌한 다변가
형이 나를 어쩌다 만난 자리에서 농을 흘린 적이 있다. ‘강태 씨가 날 싫어하니까 아직 <커버 스토리>대상으로 삼지 않는다’고. 에헤이, 성님, 그건 망칙한 발언이우. 처음엔 제가 형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어유. 같은 충청두 사람끼리 솔직히 말하는디, 왜 그려유. (형은 보령 사람, 나는 부엿사람) 미리 말하자면 요새 와서 형이 좀 좋아진 거다. (필자는 난디?) 임 시인이 소월시문학상 받고 현대문학상 받고 뭘 받았다고 해서, 또는 유명하고 안 하고가 문제 아니다. 데스크와도 교감이 통해야 한다. (필자는 난디?) 건방진 말 같으니. 그 다음에 아뢸 말씀이, 내가 쓸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무리 그(그녀)가 유명해도 감춰진 얘기가 있다면 ‘그 후로도 오랫동안’ 어찌 생각해왔는지를 캐내야 하는데, 이를 완전히 밝힐 수 없다면 대상의 결격사유에 해당한다. 나의 스타일로 양심상(!)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다. 기왕지사 밝히는 거지만 데스크나 나에게 항의 전화가 꽤나 오는 편이다. 직간접적으로 서열을 따지고, ??이 자기보다 먼저 나와 기분 나쁘다느니, 그(그녀)가 뭐가 모자라 아직도 인터뷰를 하지 않느냐느니…. 이렇게 아조 ‘짝은 가슴’을 지닌 시인들이 문단에 너절하다. 가만 있어도, 천방지축 요란 떨어도 알아줄 사람은 알아준다. 접싯물에 코 박고 기절허슈, 시나 잘 쓰쇼! 차라리 값진 무명시인을 찾는 게 낫소. 망동 금지, 경고! …독자는 시인의 모든 걸 알고 싶어 한다. 이만한 분량(매회 100매∼110매)을 쓰면서 가급적 시인의 생애를 ‘전부’ 밝히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히 나의 직무 유기다. 난 결코 쓸 수 없다. 핵심사항(주요 개인사)을 빼고 도대체 뭘 쓰란 말인가. 그래도 믿어주며 화이팅, 팅, 밀어주는 독자들이 고맙다.
형은 말이 많다. 질질 끄는 듯한 뒷끝맛도 개운치 않다. 아마 동향이라는 점도 형을 대함에 편히 작용했으리. 언젠가 이형기 시인이 시협 회장이고 형이 사무국장일 때, 두 분이 나를 사무차장으로 천거한 적이 있다. 흥흥, 받아주던 나는 그 뒤로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내가 행정가 스타일이 아니기에.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형은 샤프한 외모에 비해 길고 질고 지저분(!)하고 코맹맹이고 코믹한 데다가 진지·진중하지만, 실상 말씀이 산문쟁이처럼 겉돌고 질퍽해서 싫은 구석이 있었던 거다. 주위엔 별 이빨을 부득대며 문단을 오염시키는 룸펜들이 얼마나 많으신가. 좋은 말, 나쁜 말 등의 문단 정보 대부분이 형에게 전달된다는데, 형은 그만큼 정보통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휴, 징그럽워라. 별로 달갑잖은 후배의 고언이지만, 이젠 진실로 일상의 불출不出 언어를 감추셔야겠다. 약간 뽈똑배를 가진 내가 배포유하게 이런 말 드릴 자격 있는지. 형의 어눌한 입심을 시의 똥구녕에 처박아 후련한 시를 더 써주셔야겠다. 난 가슴이 뭉클해져서 갑작스런 콧노래로 우리 시대만의 미혹적 언어 을 부른다. 어떤 그녀의 도 흥흥 댄다. 오, 그리움과 쓸쓸함. 내겐 쓸쓸함과 그리움이 동격인 걸.
우린 전철을 사당역으로 달려 복집으로 간다. 복국물에 말아먹는 밥맛이 기막히다. 향원복집(☏583~2373·521~2368)은 형뿐만 아니라 천양희·김명인·오세영 시인 등이 가끔씩 들른다고. 얘기 중엔 서운함에 대한 기억도 있었다. 오래 전, 문학아카데미가 주최한 시낭송회에서 한동안 내가 사회 본 적이 있는데, 임 형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자꾸(두 번씩이나) 출간 시집《바람이 남긴 隱語》의 ‘은어’를 ‘언어’라고 소개하더라고. 나:그걸 이제 말해요? 쩨쩨하게. 형:그렇소. 아주 불쾌했소. 그래서 저쪽 가서 동료들과 술이나 퍼마셨소. 그럴 수 있소? 그것두 두 번씩이나. 그리곤 웃었다. 형은 신세 진 걸 절대 잊지 않는다. 요즘 와서 모 대학 겸임교수 제의에 수락했다는 소문과 달리 형이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 30년 시를 써왔으면 됐지, 무얼 더 이상 바라겠느냐는 투덜거림, 구시렁거림…. 형의 깊은 관심으로 이문구 형이 전임교수가 된 사건(?)에 제 일처럼 기뻐하는 임 시인. 그는 참 묘한 시인이다. 그러면서 빠짐없이 할 말은 다 한다, 재밌다. 사람이 갑자기, 은근히 커보인다.
우린 다시 근처의 카페 에또아르(☏584~4207)로 간다. 거긴 웃음이 약간 매력있는 소진이란 여자가 주방장으로 있다. 언니를 가끔 돕는다고. 그녀는 글쟁이들 모임을 순수히 좋아하는데, 가끔 이숭원·송희복·이승하 등도 모이기도 한다. 주변에선 많은 이들이 대부분 ‘씰데없는’ 말을 퍼붓곤 한다. 그토록 많은 말을 하고 나면 허탈하지 않는지, 사람들아.
은사 신동엽 선생
신동엽 시인은 그의 마음에서 꺼지지 않는 은사다. 주산중학을 다닐 때 역사과의 신 시인이 지리를 담당했는데, 지리는 가르치지 않고 거의 시감상만 지도하셨다고. 아이들에게 느낌을 말해보라 하곤, 학생이 대답하면 ‘응, 너도 맞다’ ‘너도 맞다’ 해서 별명이 <너도 맞다>였단다. 애들이 자주 선생님 뒤에서 ‘너도 맞다!’ 하고 놀려 댔다 해서 나는 한참 웃었다. 이 분이야말로 백제의 고도 부여가 낳은 큰 시인이 아닌가. 그 분과의 만남은 휴전 직후 열린 위문편지 쓰기에서 중학생 임영조가 중고 통털어서 장원한 것이 계기였다. 형의 <자전>회상기.
문학 연보
·1958년 신동엽 시인 만남
·1962년 명성여고 재직중인 신동엽 시인을 다시 만나 사사·1965 신 시인의 권고로 서라벌예대 문창과 입학(김동리 손소희 서정주 박목월 김구용 김수영 이형기 선생 등께 배움/동기생 이동하(소설) 김형영 마종하 등과 교유) ·1969 동아일보 출판부 사직하고 飛來寺에서 6개월간 30여편 습작·1970 한국일보 신춘문예 최종 낙선. 그 해 11월 월간문학 제6회 신인상에 <出航>당선(심사:김현승 서정주 박두진 김남조)·1971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木手의 노래>당선(심사:서정주 박남수 김종길) ·1975 이인해 임홍재 정대구 시인 등과 <육성>동인 결성·1985 제1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고려원)
형은 말의 톤을 높인다, 문창과의 시는 창작하는 시인이 가르쳐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작품에 서정을 기본으로 한 서사적 구조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독자에게) 깨어쳐 주는 일/즐거움을 주는 일/또는 그 둘을 겸비하는 일’이 시인의 몫이라는 그의 시론은 더욱 간명하다. ‘좋은 시인이 되려면 좋은 시 300편을 암송하고 200편을 쓰고 100편을 퇴고하라’는 절대 주문을 한다. 요즘 문청들의 잘못은 시류에 편승하기에만 급급하지 다른 시인의 훌륭한 시를 깊이 읽지 않음에 있다며 흥분한다. 그러고도 어찌 ‘언어미학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겠는가. ‘시란 무엇인가’와 ‘생은 무엇인가’는 동격이란다. 나는 술을 기피하고 형의 낯은 열이 뜨기 시작한다. 그는 거듭 시 쓰기의 어려움에 대해 갈파한다. 시집 4권을 내고 이미 유명해진 영조 형을 보면 나는 부끄럽다. (그치만 푸른 공기를 나의 폐에 심자! 심장에 팍, 팍, 꽂는 일부터 하자꾸나.) 형은 문학적 알레르기가 하나 있다. 1)종교적 엄숙성, 2)철학적 심각성이 주는 폐해가 못마땅해서 못 살겠단다. 시란 보편적인 삶터에 있다, 시란 발성·발화법이 특이해야 한다! (이건 형식주의자들의 자기 목소리요 낯설게 하기 아닌가.) 이게 영조 형의 구호다. 평범하나 비범하다. 형은 오직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며 터득하려고 애쓴다. ‘지식의 과시’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이성으로 독자를 설득하려 들지 말고 진솔과 정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힘쓰라, 임영조 형의 역설이다. 구닥다리지만 공자의 ‘思無邪’를 아직도 건드려대는 임 시인이다. 시인은 발표하기 전에 <시의 효용론>을 생각하잔다. 아하, 그래서 형이 ‘욕망의 분출이 곧 시는 아니다’고 했구먼. 효용이란 곧 가치일 텐데, 모든 시에 반드시 가치를 부여하라는 주문은 조금 생각할 점이 있지 않을까. 혼자 술에 익은(?) 형이 깨면 좀 물어봐야겠네.
‘문학은 진실로 진실해야 한다.’ 형의 말이다. 소월시문학상 수상식에서 낭송한 소감에서 ‘내가 이제까지 본 나는 이미 녹슬고 고장난, 그래서 작동이 뻑뻑하고 불편한 로버트’ 같았다고 형은 실토했다. 일상이라는 ‘마음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생각한 데서 형의 새로운 시작詩作은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詩作을 하고 명상하는 동안 어느덧 종교심이 생겼다. 비록 미사에 잘 참여하지 못하지만, 현재 카톨릭 문우회원이기도 하다. 시업이 종교보다 앞선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앞으로 형은 시 쓰다가 힘이 부치면 삶의 중심축을 신앙생활에도 충실하겠단다. 그는 이렇게 말을 접었다. ‘시인 임영조’란 명함이 매우 좋다고, 진정한 프로가 되고 싶다고. 그렇지요, 내 경우도 평소에 ‘시를 쓴다’가 아니라 ‘시를 한다’는 믿음을 확연히 갖고 있는데. 그렇다, 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 그 자체다.
생태기/연보
영조는 1943년 10월 19일 충남 보령군 주산면 황율리 104번지에서 아버지 임경재 어머니 김복순 님의 6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다. 본명은 世淳으로 본관이 풍천. 호적 나이 잘못(1945년 2월 27일생)으로 9살이 되어 겨우 주산초등교 학생이 된다. 생일이 엉망인 건 동네 이장 탓이다. 읍내 장날만 동회에 가서 떼거지로 신고하다 보니, 5일장(2일과 7일)마다 나가서 부탁받은 날짜를 까먹고 신고일로 대충 생일을 정했다는 웃지 못할 사건에서 비롯했다. 57년에 주산중학생. 부친의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가산이 기울자 학업을 포기한 채 1년동안 빈둥거리다가 4년만에 중학을 마친다. 곧 서울 대동상고에 입학한 뒤, 사실상의 보호자로 재무부 관료였던 외숙이 5·16 쿠데타로 실직되자 학업도 중단, 즉시 서울전신전화국 토목공사장 급사로 일하며 5년 만에 겨우 졸업한다. 초등에서 고등까지 꼭 15년이 걸렸다. 실상 비극의 나날이었다. 이때 소월시 200여편과 이미지스트 김광균 시집 《와사등》《기항지》를 완벽히 암송하며 시 쓰기로 작정한다. 불확실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빈곤이 엄습하는 외롬증이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주선한 셈이다(형은 ‘그들 영향으로 소월의 전통적인 민중 정서에 기반을 둔 간결한 리듬과, 김광균의 온건 깔끔한 수채화 이미지 구사가 눈에 잘 익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숭문서림 2층 월계다방에서 신동엽 시인께 시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오직 지독한 퇴고 훈련의 연속이었다. 이때 김수영·남정현 선생 등을 소개받는 영광을 누린다. 서라벌예대 시절의 도강꾼으로 윤후명·임정남·고 송유하 등이 기억된다고. 그러다가 ’66년에 이동하가 서울신문에, 김형영이 《문학춘추》로 등단하자 임영조는 자신의 문재文才에 회의를 품으며 입대를 결심. 묘하게도 군에 있던 조태일·권오운·이가림 등이 신춘문예로 데뷔하자 ’66년 8월에 드디어 논산훈련소에 자원 입대한다. 군대에서의 에피소드. 훈련 중 틈틈이 신동엽 시인께 편지를 드리자 ‘너의 소속과 병과를 다 알았으니 보리밥 많이 먹고 훈련이나 열심히 받아둬라’는 엽서를 받는다. 지금도 엽서를 소장하고 있다. 이 내용은 <제목을 유보한 私信>(부분)에도 실려 있다.
당신 가신 뒤
침묵의 바다에 그물을 던져
내가 건져 올린 건
몇 마리의 서러운 절망이었습니다
그 절망은 때로 밤하늘로 날아가
뒤늦게 빛을 내는 별도 되었습니다
퇴소 뒤 그의 특별 배려로 형은 육본 통신 운용대대로 배속되는 특혜(?)를 얻는다. 당시 유근창 합참본부장이 신동엽 선생의 고향 선배인데, 아마 그 ‘사이’가 긴밀히 유지된 듯. <전우신문>에 작품도 발표하자 문화부장이던 유정 시인의 격려를 받기도 했다. 제대를 석 달 앞둔 ’69년 봄에 ‘잠깐 다녀가라’는 신동엽 선생의 급한 전화 연락을 받았지만 그해 초 김신조 등의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찾아뵙지 못하다가 며칠 후 부음을 듣고 만다. 평생 회한으로 남아 있다고. 후배 송기원을 그 부대에 밀어넣고 군 복무를 마친 임영조 형은 평론가 홍기삼의 배려로 동아일보에 입사했지만 시에 대한 미련 때문에 얼마 후 그만둔다. 마침 친척이 대처승으로 있던 대전 부근의 비래사에 6개월을 묵으면서 습작한 시에 자신감이 생기자 신춘문예에 도전키로 결심. ’70년 한국일보에 응모했으나 고배를 들고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하고 석달후인 ’70년 중앙일보에 또 당선한다. 중앙일보에 투고한 것은 당시 상금이 타 신문의 5만원에 비해 7만원이기 때문이었단다. 시상식 날, 심사위원장 김동리 선생이 축사 서두에서 ‘나의 제자인 임 군은 바로 몇 달 전에 등단한 신인인데 또 당선해서 어느 유능한 후배의 앞길을 막은 못된 선배’라는 비난성 격려에 좌중이 웃기도. 당시는 마포 도화동에서 2만 5천원짜리 전세를 얻어 사는데 고지대라 물이 나오지 않아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상금은 정말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72년에 한림출판사로 일자리를 옮기고, ’73년엔 아들 진수를 얻는다. ’74년에 지방고 교사였던 부인이 서울시교위 순위고사에 합격, 성동중 국어교사로 부임하면서 결혼 뒤 비로소 동거(?)에 들어간다. 이때 형은 주문돈 시인의 알선으로 (주) 태평양 홍보실에 입사한다. 곧 <육성동인>이 결성되어 동인지(사화집)를 2집까지 발간하지만 ’76년 임홍재의 타계로 중단된다. 이때부터 시 쓰기보다는 난에 몰두하기 시작, 40여종의 난을 가꾸며 못읽은 시집 읽기와 시를 체계적으로 공부한다. 난은 보통 사랑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시 형식을 말할 때 그는 곧잘 한 그루 꽃나무에 비유한다. 아랫글은 형의 중심 사고인데 지난 해 불교방송의 대담 대본에서 발췌, 요약한 것이다. 형의 시는 쉬워서 이해하기 좋은데 산문이 더 어렵다. 산문에서 폼잡았네, 웬 일?
나의 시 쓰기는 한 그루의 꽃나무를 가꾸는 정성으로 혼신을 다해 시의 꽃을 피워내고 독특한 향기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자 노력한다. 흔히 접하는 자연현상, 즉 동식물, 갖가지 사물 등에서 얻어지는 직관이 시의 소재를 이루는 가운데 비유·연상·유추를 통해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를 자문하고 성찰하는 내면 탐구도 병행하고 있다. 나의 존재와 더불어 타자인 사물에 감춰진 비의와 우주적 신비를 새로운 눈으로 읽어냄으로써 관념과 형이상학이 아닌 직설적 구조와 비유적 구조로 오버랩시켜 양자의 동질성을 창조하거나 파괴하는 형식을 취한다. 시는 가급적 평이한 언어와 간결한 구문으로 시의 전달 기능과 공감 효과를 높이기 위해 개성적인 화법 구사에 치중하고 있다.
시를 쓰는 일은 곧 세상을 살면서 직접 보고 느끼고 체험한 사물을 시인만이 지닌 프리즘을 통해 언어적 구조물로 형상화시키는 행위라는 정의 아래, 나는 내용보다 아름다움을, 메시지보다 향기에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76년엔 딸 지영을 얻는다. 맏이인 아들은 군대를 제대한 만 25세의 청춘으로, 계속해서 건축공학과만 고집, 대학에 도전하는 중이고 딸은 올해 3학년이 되는데 이화여대에서 영문학과 사학을 전공하고 있단다.
’85년에 한국문학 편집부장 김초혜 시인(작가 조정래 부인)에게서 처음으로 시를 청탁받고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재개하지만, 최승호 시인의 권유로 첫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 출간 3일 뒤 불행히도 63세의 모친을 잃는다. 이후 왕성한 시창작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는데 특히 이형기·오세영·박철희·이승훈 시인의 상찬을 받게 된다. ’86년은 1년동안 ‘최다발표 시인’ 중 2위였고 ’87년은 1위를 누릴 만큼 많은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 물론 많은 문인들의 배려였음을 잊지 못한다. 형은 조남현·이숭원·남진우와 오세영 시인, 이들에 대한 신뢰가 특히 깊은 편이다. ’89년엔 잡지언론상을 수상하면서 출판부장으로 승진, 기쁨을 곱으로 누린다. 그리고 ’94년, 생업과 시업 중에 시업을 택하기로 마음먹고 20년 남짓 생활을 하던 태평양을 나온다. 대단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형은 1년 전에 담배를 끊었다. ’96년 세밑, 창비시선 《귀로 웃는 집》의 교정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런데 담배란 것이 암팡스러워서, 지난해 말 멕시코에서 시인 김명인과 한 방에서 지내다가 너무 빡빡한 여정의 긴장감으로 슬슬 또 피운다고. 가끔 애달아서, 술 마실 때만 담배가 고파 피운다고. 그런데 너무 흡연이 잦다. 영조 형, 담배를 모질게 끊지 못하면 시 못 쓸 줄 알우∼. 이게 김강태이즘Kimkangtaeism이유, 笑笑.
좋은 詩 몇 편
시집을 펴면 ‘예라, 웃통을 홀랑 벗고 내가 눕는다/누워서 산을 받는 이 쾌감!/왜 몰랐을꼬? 이 손쉬운 열락을!/이 다음 나 세상 뜰 때도/옳거니, 무릎 치듯 문득 떠나리/내내 기척 없던 매미들/쑤왈쑤왈 범어로 염불하는/저 아래 으슥한 숲속/조루증의 사내들 대여섯이/식은땀 뻘뻘 개고기를 뜯는다/나무아미타불! 비호같이 내려가/모조리 산 채로 어흥! 관세음보살!/여름 한낮 꿈이 비리다’(<여름 산행>부분)가 눈에 선하다. 지금은 겨울인데, 추위가 시원함으로 선뜻 다가온다. 시행의 이 정도의 명쾌明快가 ‘비호같이’ 가슴을 친다. ‘비호같이 내려가/산 채로 어흥!’, 소름끼칠 상상력이지만 참 독특하다. 매미가 ‘쑤왈쑤왈 범어로 염불’한다든가 ‘조루증의 사내들 대여섯이/식은땀 뻘뻘 개고기를 뜯는’ 표현이 매우 해학적인데, 예리한 감각적 상상력이 그의 산 재산인 것 같다.
① 저 황홀한 춤사위로/꽃잎술 헤벌어진 산도화/싸리꽃 노린재꽃 엉겅퀴꽃 앵초꽃/일제히 손짓하며 발을 구르네/오빠! 오빠! 열광하는 십대들처럼//오, 氣가 승한 風客이여!/너는 천지간에 수놓듯/소리 없는 박수로 이승을 소요하니/가난도 한낱 사치겠구나/어디에 머문들 정 두지 않고/훨훨 몸 자주 털고 가니/일생이 무겁지 않겠구나
─ <나비>부분
② 오, 성가신 친구여,/나는 가끔 네가 부럽다/도무지 어디에 허리 꺾고/손 비비고 사는 재주도 없어/이 둔한 손으로 허공이나 저을 뿐/너의 아연한 활약에 속수무책인/나는 다만 어디론가 숨고 싶단다/(…중략…)/탁!/생전에 가장 날렵하고 근면했던/그러나 역시 파리목숨인/한 乞神의 비명횡사에/나는 오늘 기꺼이 獻詞를 쓴다.
─ <파리>부분
임영조에게는 나비나 파리란 미물조차도 삶을 조망하는 내재적 존재다.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임영조만의 해학과 감각은 활개를 친다. ‘오빠! 오빠! 열광하는 십대들’을 포착한 작품 <나비>는 ‘무겁지 말아야 할 생애’를, <파리>는 ‘도무지 어디에 허리 꺾고/손 비비고 사는 재주도 없어/이 둔한 손으로 허공이나 저을 뿐/너의 아연한 활약에 속수무책인/나는 다만 어디론가 숨고 싶’음을 그리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나비와 파리를 바라보는 시인의 방향감각이다. 시인은 양성성 나비에서 존재의 가벼움을, 음성성 파리에서 존재의 무거움을, 즉 긍정과 따스함으로 바라보니까.
시 <도꼬마리씨 하나>는 ‘아찔한 벼랑을 지나/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억센 가시손 하나/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도꼬마리씨 하나/왜 하필 내게 붙어왔을까?/(…중략…)/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아내여, 내친김에/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할부금 갚듯 정 주고 사는 거지 뭐/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에서는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가 단연 압권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이 결구가 왜 우리들 시선을 끄는 걸까. 첫째는 싫지 않은 ‘남루’를, 둘째는 극소한 존재를 놓치지 않고 탐색하는 예리한 정신의 힘이 빛나기 때문이다. 나는 엉큼해서 되도록이면 시를 감추지, 임 시인처럼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라며 뻔뻔하게(!) 대갈일성을 하진 못한다. 별명을 ‘임 초월’로 할까. 다른 시 <孤島를 위하여>는 ‘면벽 100일!/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들어올 문 없으니/나갈 문도 없는 벽/기대지 마라!/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마음 속 집도 절도 버리고/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그 섬에 닿고 싶다’고 읊고 있는데 역시 시적 발상은 <도꼬마리…>와 같다. 덧붙인다면, 임영조만의 날푸른 고독이 보인다고 할까.
저격을 꿈꾼다/가장 편한 자세로/앉거나 서서 또는 누워서/증오의 화상을 처치하는 꿈/귀신도 곡할 범죄를 꿈꾼다/잠시 숨을 멈추고/긴장을 풀고/일격필살을 노리는/복수의 버튼만 살짝 누르면/세상은 전혀 딴판으로 바뀌고/놈은 쥐도 새도 모르게/눈 앞에서 썩 사라지겠지/외마디 비명은커녕/피 한 방을 남기지 않고/행적은 묘연한 채/별의별 소문만 분분하겠지/물증은 없고 심증만 가는/이 시대의 테러리스트/언제나 깨어있는 눈으로/완전무결한 단죄를 꿈꾼다.
윗시 <리모콘>(전문)은 날카롭다. 하이라이트는 ‘저격을 꿈꾼다’이다. 그는 리모콘이란 물건에게서 ‘증오의 화상을 처치하는 꿈’과 ‘귀신도 곡할 범죄를 꿈꾼다’. ‘power’를 작동시키며 ‘일격필살’을 훔쳐 쓰고,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행적이(은) 묘연한’ 존재에게서 나는 ‘시간성과 타자성他者性’을 읽는다. 엠마누엘 레비나스의 매력적인 저서 《시간과 타자》(강영안 역, 문예출판사, 1996)를 보면 ‘존재의 고독’과 ‘사건과 타자’ ‘고독과 물질성’ 등이 언급되어 있다. 레비나스는 <생산성>(113쪽)에서 말한다, ‘원인의 개념이나 소유의 개념으로도 생산성(f럄ondit?의 사실을 파악할 수 없다.’ ‘<존재한다(이다)>라는 동사에는 일종의 다수성과 초월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존재하는 모든 물질성은―앞 글에서 레비나스는 아이(자식)조차 자기 소유물이 아니라 한다. 아버지의 존재조차도 타인이요, 낯선이로서 다만 관계하고 있을 뿐이며 ‘아이는 하나의 자아이며, 인격이다. 아들의 타자성은 다른 자아(alter ego)의 타자성이 아니다’―소유의 개념으로 진단할 수 없다. 그렇다. 동양적 사고의 무소유 정신과 같지 않겠는가. 결국 ‘다수성’은 서구식 합리주의에서, ‘초월성’은 동양의 정신주의에서 출발하는 개념으로 풀이하고 싶다. 임영조는 존재하는 가시적 불가시적 사물들을 통해서 <비존재>, 즉 ‘존재 없음’이 아닌 ‘존재 아님’을 인식하며 살핀다. 물론 무의 개념이 아니다. 레비나스의 이 책을 ‘인간 주체에 대한 진실한 규명서(?)’라 해도 괜찮을까. 전제컨대, 임영조의 <소유론>에 대해 평자들의 견해는 어떨지.
나는 이 책을 통해 인간 임영조를 읽고 영원한 타자 인식에 젖은(사로잡힌) 그의 작품 속을 헤맨다. 사물에서 스스로 고독을 감싸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고독의 울타리에 자주 집어넣는다. 시인 이형기만큼 그는 처절한 아웃사이더가 되고 싶다. 내가 보는 임영조 식으로 말하면, 철저한 인사이더가 되고 싶다는 역설적인 절규이기도 하다. 임영조에게 리모콘은 문명의 이기利器가 아니라 ‘복수의 버튼’이다. 그러므로 ‘물증은 없고 심증만 가는/이 시대의 테러리스트’이고 ‘언제나 깨어 있는 눈으로/완전무결한 단죄를 꿈’꾸는 영원한 이단아요 탕자인 것이다. 그러나 보라, 임영조가 아무리 ‘범죄성 리모콘’이라고 호들갑떨지만 나는 거듭 쓴 ‘꿈꾸기’에서 ‘절대 희망’을 읽는다. 멋진 반어다. 역설일 수도 있겠다. 그것도 ‘완전무결한 단죄’의 꿈꾸기. 그러나 ‘단죄’란 여기서 ‘희망’으로 바꿔도 괜찮다. 이쯤에서 임영조의 독한 염결성이 읽힌다. 그래서 그가 말이 많은 걸까, 많을 수밖에 없으리라. 말은 느리지만 분명하다. 임영조는 빈 말, 빈 말틈바구의 그 사이, 또 맹한 침묵을 허용치 않는다. 말의 공간이 생길라치면 그가 얼른 메꾸니까. 임영조의 계속되는 시작업이 나에겐 무우채 써는 일꾼처럼 다가든다. 채가 썰어내는 ‘무우똥’이, 하얗고 곱고 일정하기 때문이다. 논의 대상은 ‘완전무결’을 추구하는 임영조의 습관성(=취향)이다. 요컨대 임영조는 고독하다. 그런가 하면 귀한 감성이 곳곳에서 처연히, 흥건히, 질펀히 노출된다. 시인은 <목련>에서 꽃을 보며 ‘터지는 슬픔’을 읽고 ‘그 얼얼한 생인손이/찰칵찰칵 셔터를 누르면/순백의 플래시가 터’진다는 서정 감각을 드러냈다. 다음 시들은 우선 쉽게 읽힌다는 점이 돋보인다.
① 아무도 모른다/그들이 출옥하면 또/무슨 일을 저지를지/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다//오랜 연금으로/흰 뼈만 앙상한 체구에/표정까지 굳어버린 돌대가리들/언제나 남의 손끝에 잠혀/머리부터 돌진하는 下手人이다//어둠 속에 갇히면/누구나 오하려 대범해지듯/저마다 뜨거운 敵意를 품고 있어/언제든 부딪치면 당장/焚身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
─ <성냥>부분
② 청량한 가을볕에/피를 말린다/소슬한 바람으로/살을 말린다//비천한 습지에 뿌리를 박고/푸른 날을 세우고 가슴 설레던/고뇌와 욕정과 분노에 떨던/젊은 날의 속된 꿈을 말린다/비로소 철이 들어 禪門에 들듯/젖은 몸을 말리고 속을 비운다/말리면 말린 만큼 편하고/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성성한 백발이 더욱 빛나는/저 꼿꼿한 老後여!//갈대는 갈대가 배경일 뿐/배후가 없다, 다만/끼리끼리 시린 몸을 기댄 채/집단으로 항거하다 따로따로 흩어질/反骨의 同志가 있을 뿐/갈대는 갈 데도 없다//그리하여 이 가을/볕으로 바람으로/피를 말린다/몸을 말린다/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 <갈대는 배후가 없다>전문
그런데 우리들의 시선을 붙든다. 작품 <성냥>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이고 ‘돌대가리들’이며, ‘下手人’이고 ‘焚身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이다. 작품에서의 ‘갈대’란 ‘비우면 비운 만큼 선명해지는/홀가분한 존재의 가벼움’이고 ‘꼿꼿한 老後’의 대상이다. 그러나 ‘갈대는 갈 데도 없다’. 다만 ‘홀가분한 존재의 탈속을 위해’ 갈대가 피를 말리고 몸을 말리며 서걱댄다는 것이다. 참으로 팽팽하다. 활시위를 당기는 듯한 긴장의 연속이다. 아쉽다면 이형기 시풍이 약간 배어있는 듯. 그런가 하면 시인은 <白磁頌>에서 ‘가장 속 깊은 사랑을 연옥에 던져/영원한 색깔로 다시 태어난/李朝의 한 여인, 그 슬픈 내생을/쟁쟁(錚錚) 울리는 속살을’ 보고, <파도>를 보며 ‘야성의 사내들이/알몸으로 퍼렇게 발기한다’고 묘사한다. 푸성귀 내음이 진하다. 또 ‘스크럼을 짜는’ 파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아무래도 이미지라는 쪽에서 언뜻 김광균이 읽히고, 갖은 서사성에서 신동엽이 노출되는 걸 보면 임영조가 그들의 확실한 내 제자인가 싶다. (김광균 시인의 경우는 작품만 암송했지만.)
근작시 두 편
내 하던 말 마감하면
그대에게 가리라
영화 속을 빠져나온 주인공처럼
영욕과 슬픔과 臺詞도 버리고
그대 중심으로 들어가 쉬리
89년식 르망 몰고 소백산 넘어
부석사 들러 소조여래와 눈 잠깐 맞추고
풍기 봉화 영양 스쳐 길을 계속 당기면
나 홀로 세 들다 뜨고 싶은 곳
갯마을의 고요가 나를 당기네
침엽수들 냇물에 그림자 씻는
불영계곡 백여리길 돌고돌아
그대 찾아 가는 길 내내
뙤약볕에 목 타는 하루를 건너
저물녘 내가 당도한 곳은
그대 자궁 속같이 아늑하고 감감한
오, 아름다운 환멸이었네.
─ <그대에게 가는 길 1>전문
근작시 <그대에게…>에서는 이제 인생의 한 굽이를 돌아선 시의 화자가 보인다. 그도 꽤 늙었다. 아니, 이 말은 틀린다. 그는 어느새 시의 숙련공이 되었다. 그런 다음 임영조는 어디를 등반할 것인가. ‘영욕과 슬픔과 臺詞도 버리고’ ‘부석사 들러 소조여래와 눈 잠깐 맞추고’ 나면, 이제 그까짓 이승의 삶은 그만해도 될 게 아니런가. 당연히 ‘저물녘 (내가) 당도한 곳은/그대 자궁 속같이 아늑하고 감감한’ 곳일 뿐이며 ‘아름다운 환멸’의 세계를 등반하는 그가 이젠 다소간의 허무에 젖는다. 오, 아름다운 허무감에.
가다 보면 길들은 자주 끊기네/끊어진 길은 때로 아련한 기억 속/메꽃빛 등불로 사운대거나/벼랑 끝에 이르면 언어로 집을 짓네/먼 마을 스치는 구름의 기척에도/마음벽 쩍쩍 금이 가는 집/온채가 제 무게로 기우뚱거려도/모든 길은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네/가파른 삶은 때로 길을 비뚤게 하고/고행은 서역처럼 멀고도 쓸쓸하나/더러는 가슴 아린 열락을 덤으로 얻네/이녘은 조용한데 밤낮 치대는 파도/그 소리 좀 엿듣다가 오던 길 놓고/한결 순해진 귀로 그대에게 가는 길/아직도 위험한 불씨를 감춘/그대 뜨거운 언어의 중심으로 들어가/나 화려하게 자폭하리라, 그 후는/바다에 떠 출렁이는 그리움 되리/오래된 시집처럼 해어진, 그래서/눈길보다 추억이 먼저 닿는 섬/허나, 제부도는 늘/물때를 알고 가야 길을 내주네.
─ <그대에게 가는 길 5>전문
윗시는 <그대에게…>1번에 비해, 우리에게 ‘깨끗한 삶의 順理’를 가르쳐 준다. 작품 1)이 약간의 허무감에 젖었다면, ‘한결 순해진 귀로 그대에게 가는 길’을 노래한 작품 5)는 ‘황홀한 열락悅樂’의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좀더 뜨겁고 화사하며, 갈수록 진한 그리움이 와닿는 것이다. 언젠가 오세영 시인은 임영조의 첫시집 해설에서 ‘식물 이미지와 광물 이미지’로 나눈 바 있다. 그리고 대표적 심상으로 ‘나무와 바람’을 꼽았다. 제2시집에서 조남현은 ‘발견과 냉정한 자기 응시의 시’를 써왔다고 평했다. 그의 시를 정효구는 제3시집에서 시인의 ‘시작 방법의 단순화’를 은근히 걱정하기도 했다. 제4시집을 읽고 남진우는 ‘탈속과 통속의 사이의 길’이라는 제하에서, ‘욕망의 과잉과 욕망의 소멸 사이로 난 길’임을 밝힌 뒤 ‘현실주의자 임영조’로 정의한 바 있다. 이숭원은 <소월시 수상작가 작품론>에서 ‘자성의 시’ 및 ‘풍자와 익살의 언어유희’ ‘언어의 표현 미학과 자아 존재의 탐구’라는 말로 정리하기도 했다. 나는 임 시인의 ‘안주安住의 위험성과 허무주의’를 경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 임 시인의 ‘시 울타리’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앞으로 ‘침묵’할 것인가. 무슨 존재를 위해 어떤 장고長考에 들어갈까. 그 침묵의 무늬는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