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우 박사님 주안에서 잠드심
강영우 박사님께서 2월23일 68살의 나이로 주안에서 잠드셨습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석은옥 여사와 두 아들 장남 폴(진석) 강은 안과의사와 막내 크리스토퍼(진영)가 백악관에서 선임 법률고문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7개 국어로 번역 출간된 `빛은 내 가슴에'를 비롯해 `원동력 : 자녀 교육과 리더십' '오늘의 도전은, 내일의 영광' '꿈이 있으면 미래가 있다' '내 안의 성공을 찾아라' 등이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사랑·감사' 메시지 남긴 강영우 박사
강영우 박사께서 부인과 두 아들에 이별편지 -
“행복하게 떠납니다. 너희들과 함께 한 추억이 내 맘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가 있단다"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난 가슴 한 가득 품고 떠납니다"라며 강영우 박사는 임종을 앞두고 아내와 두 아들에 남긴 편지를 남기셨다 합니다.
강 박사는 지난해 10월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차분하게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해왔고 가족들에게도 마지막 편지를 쓰셨습니다.
23일(현지시간) 별세한 강 박사의 가족이 전한 편지는 그가 가족과 함께 하며 행복했던 순간을 회고하고 부인 석은옥 여사와 진석, 진영 두 아들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빼곡히 담고 있다.
"이제 너희들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로 시작되는 두 아들에 보내는 편지는 "내가 너희들을 처음 품에 안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들과 이별의 약속을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니,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 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온다"고 두 아들과 헤어지는 아픔을 담았습니다
그는 "하지만 너희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리고 너희들과 함께 한 추억이 내 맘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하시며 두 아들을 키우는 과정의 추억을 회고했습니다..
그는 "해 보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긴 채로 자라준 너희들이 고맙고, 너희들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 왔다는 게 나에게는 축복이었다"며 특히 지난해 연말 췌장암 판정을 받은 후 손자들까지 모든 가족이 함께 했던 크리스마스가 "너무나 소중한 선물이었다"고 아들들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 합니다.
강 박사는 "내가 떠나더라도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기에 너희들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항상 함께 할 것이기에 아버지는 슬픔도, 걱정도 없다"며 "나의 아들 진석, 진영이를 나는 넘치도록 사랑했고 사랑한다"고 편지를 맺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라는 제목이 붙은 부인에 보내는 편지는 젊은 시절 첫 만남부터 회상하며 시작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게 벌써 50년전 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 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
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였습니다"
강 박사는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이라며 시각장애인인 자신과 결혼하고 보살펴준 부인의 헌신적인 삶을 떠올리셨습니다.
미국 유학과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회상하며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느냐"며 "항상 주기만 한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좀 더 배려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회한도 담았습니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주지 못할 것이라서... 미안합니다.”
강 박사가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이라고 지칭한 부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는 말로 맺고 있습니다.
믿음의 삶을 세상에 현실화 하신 강박사의 소천에 조의를 표하며, 유가족들께 위로를 전합니다.
강영우 별세, 마지막편지 네티즌 뭉클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말았으면.."
강영우 박사가 별세한 가운데 강영우 박사가 마지막으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네티즌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강영우 박사는 지난해 성탄절을 앞두고 가족과 지인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작별인사를 미리 했다.
강영우 박사의 마지막 편지는 지난해 11월 췌장암 진단을 받은 뒤 남은 날이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은 뒤 남긴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온통 행복과 축복으로 가득한 강영우 박사의 마지막 편지는 강영우 박사 별세 후 다시 네티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강영우 박사는 "올해는 그 어떤 해보다 듯깊고 아름다운 한 해였다"며 지난날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강영우 박사는 자신이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 그리고 이제는 한 가정을 이뤄 미국 주류 사회의 리더로 훌쩍 성장한 아들 진석, 진영 씨에 대한 뿌듯함에 대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라고 표현했다.
강영우 박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평생을 살아왔다"며 "나의 실명을 통해 하나님은 내가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역사들을 이뤄내셨다. 휩쓸고 가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두 눈도, 부모도, 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이라고 고마워했다.
강영우 박사는 "두 눈을 잃고, 나는 한 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것을 얻었다"며 모든 것에 감사했다.
강영우 박사는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람"이라며 "나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왔다"며 "끝까지 하나님의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 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 받았다"고 안타까운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강영우 박사는 "한분 한분 찾아뵙고 인사 드려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란다"며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했고 은혜로웠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앞서 강영우 박사 가족은 장애인 인권 운동 선구자 강영우 박사가 투병 중이던 암으로 소천했다고 2월 24일 밝혔다.
강영우 박사는 시각장애인으로, 한국계로는 처음 미국 백악관 차관보까지 올랐다.
14세에 시력을 잃은 강영우 박사는 연세대 졸업 후 미국 피츠버그대로 유학 가 한국 최초 시각장애인 박사가 됐다.
2002년 강영우 박사는 조지 부시 대통령 임명으로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역임했다. 강영우 박사는 정책차관보로 6년간 일하면서 미국 5,400만 장애인을 대변하는 직무를 수행했다. 강영우 박사는 장애인 사회 통합과 자립, 권리 증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영우 박사 장례식은 3월 4일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 한인 중앙장로교회에서 추도 예배로 치러질 예정이다.
[다음은 강영우 박사 마지막편지 전문]
즐거운 성탄과 2012년 복된 새해를 맞이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요즘입니다. 올해는 그 어떤 해보다 뜻 깊고 아름다운 한해였습니다.
50년전 서울 맹학교 학생이었던 저는 자원봉사자 여대생인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40년전 저는 그 예쁜 여대생 누나에게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비젼이 담긴 이름 석자, "석.은.옥"을 선물하며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제가 아내와 함께 유학생의 신분으로 미국에 온지도 30년을 훌쩍 넘어 40년이 다 되어 가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창립한 사회복지법인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은 2012년 20주년을 맞이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속에서 저희 두 부부의 사랑을 듬뿍 먹으며 휼륭하게 자라난 두 아들은 한 집안의 가장으로, 미국 주류 사회의 리더로서 각자의 분야에서 아버지인 저보다 훨씬 훌륭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2011년 큰아들 진석이는 워싱턴 포스트가 선정한 최고의 안과의사로 뽑혔고, 차남인 진영이는 지난 8월 오바마 대통령의 선임 법률 고문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경사에 경사가 겹친다고 10월에 진영이는 어여쁜 딸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단 둘뿐이었던 저희 부부가 올망졸망 손녀딸들과 손자를 데리고 바쁜 일정속에서도 짬짬히 식사도하고, 산책도 하고, 놀이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행복입니다.
게다가, 요번 크리스마스에는 조카들과 조카손주들까지 모두 모인다고 하니 어른들과, 초등학생부터 이제 막 태어난 간난아기까지 함께하는 아주 시끌시끌 정신없는 크리스마스가 될것 같아 기대가 매우 큽니다.
저는 지난 해 4번이나 한국을 방문하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 냈습니다. 한글책 "원동력"이 두란노서에서 출간되었고, 미국에서는 "Today's Challenges, Tomorrow's Glory"가 출간되었습니다. 특히나 원동력은 한국 기독교 출판협회에서 2011년 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내도 자전적 에세이인 "해피라이프"를 출간하여 지난 10월에는 함께 한국을 방문해 출판 기념회를 가졌습니다.
이번에 함께 연세대학교에 강연회를 참석하느라 오래간만에 아내 팔짱을 껴고 교정을 걷게 되었는데, 예전 아내와 함께 캠퍼스 커플이라도 된냥 신이나서 교정을 누비고 다니던 그때가 생각이나서 둘이 한참을 웃기도 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저는 참으로 복되고 감사한 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의 실명을 통해 하나님은 제가 상상조차 할수도 없는 역사들을 이루어 내셨습니다. 전쟁이 휩쓸고 가 폐허가 된 나라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두 눈도, 부모도, 누나도 잃은 고아가 지금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덕분입니다.
실명으로 인하여 당시 중학생이라면 꿈도 못 꿨을 예쁜 누나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었고, 실명으로 인하여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 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됬습니다. 실명으로 인하여 책도 쓸 수 있었고, 세상 방방곡곡을 다니며 수 많은 아름다운 인연들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아름다운 인연들로부터 받은게 너무 많아 봉사를 결심 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는 강연들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눈을 잃고, 저는 한 평생을 살면서 너무나 많은것을 얻었습니다.
늘 여러분의 곁에서 함께하며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은 마음은 무엇보다 간절하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다는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여러번 병원에서 검사와 수술,치료를 받았으나 앞으로 저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다는것이 의료진들의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로 인해 슬퍼하시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작은 바램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하나, 둘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할 시간도 허락 받았습니다.
한분 한분 찾아뵙고 인사 드려야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왔습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12월 16일
강영우 드림
[ 두 아들에게 ]
이제 너희들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내가 너희들을 처음 품에 안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너희들과 이별의 약속을 나눠야 할 때가 되었다니
좀 더 많은 것을 나누고,좀 더 많은 것을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하지만 너희들이 나에게 준 사랑이 너무나 컷기에,
그리고 너희들과 함께한 추억이 내 맘속에 가득하기에
난 이렇게 행복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단다.
해 보기도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나의 말을
가슴 속깊이 새긴 채로 자라준 너희들이 고맙고,
너희들의 아버지로 반평생을 살아왔다는게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내가 떠나더라도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기에
너희들 곁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항상 함께 할 것이기에
아버지는 슬픔도,걱정도 없다.
나의 아들 진석,진영이를 나는 넘치도록 사랑했고 사랑한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당신을 처음 만난게 벌써 50년전입니다.
햇살보다 더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예쁜 여대생 누나의 모습을 난 아직도 기억합니다.
손을 번쩍 들고 나를 바래다 주겠다고 나서던 당돌한 여대생,당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내주신 날개없는 천사였습니다.
앞으로 함께 할 날이 얼마남지 않은 이 순간에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당신을 향한 감사함과 미안함입니다.
시각장애인의 아내로 살아온 그 세월이 어찌 편했겠느냐.
항상 주기만 한 당신에게 좀 더 잘해주지 못해서,
좀 더 배려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떠난 후 당신의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해주지 못할 것이라서..
나의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