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 전경. 이런 산을 예상하고 오른다면 실망뿐일 것이다. 일본 속담에 후지산은 멀리서 보는 산이지
오르는 산은 아니란 말이 있다고 한다. 산자체는 볼 품이 없다. 단지 3776m란 높이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만 있을 뿐이다.

새벽녘,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네 시 반이다. 아침도 못 먹고 오합목(五合目)으로
올랐다. 등반길이 걱정이다. 오합목에 도착하니 다섯시 반, 해발 2305미터다. 한라산보다 높은 곳을 차
로 오른 것이다. 그래도 남은 거리는 1471미터. 소백산 정도의 높이를 올라야한다. 우리를 안내해준 차
가 떠나니 우리 일행만 남았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한다. 이국이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한자가 우리의 두려움을 덜어준다. 일행 중 한 명이 복통 증세가 있어 구호소(救護所)라 적힌 곳
에서 한자를 매개로 한 필담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일본은 역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육합목(六合目)을 지나 칠합목(七合目)으로 접어드니 나무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본
격적인 고산 등반이 시작된 것이다.
주로 이런 산이다. 내려다 보는 경치 이외에는 볼 것이 없다.

팔합목(八合目)(3,020)을 지나니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풍경들이 펼쳐진다. 끝없이 펼쳐지는 운해(雲海)
사이로 산들이 섬처럼 떠있다. 지리산 종주 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 때는 거의 눈 높이로
모든 것이 보였지만 여기는 아예 모든 것이 까마득히 발 아래로 보인다. 2000미터를 올라 보지 못한 내
게는 후지산의 높이가 신기함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발 아래는 구름이 오락가락하건만 여기는 구름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씩 구름위로 또 다른 구름 같은 것이 분수처럼 치솟는다. 아마도 제트기류가 아닌가
추측해보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본팔합목(本八合目)(3360) 조금 지나서 난간에 기대니 저 멀리 운평선
(雲平線) 너머 푸른색이 보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가을 하늘보다 나은 색도 아니었지만, (맑
고 투명한 우리의 하늘보다 약간 탁하고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 때는 하늘을 발아래 내려다본다는
감동에 나도 몰래 옆의 여자 분에게 말을 건넸다. 이-데스네(いいですね.). 아는 일본말이 이것뿐이다.
일본인들은 산밑에서 지팡이에 방울을 달고 와서는 방울을 이곳에 매단다. 무속신앙 같은데 의미를 확
인할 방법이 없다.

다음은 서툰 영어 컬러, 스카이 컬러. 손가락까지 동원해 한 이 말이 통했는지 일본여자가 화답한다. 모
르긴 하지만 뎅끼(天氣)가 나오고 이-데스네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날씨가 좋다는 뜻인 것 같다.
본팔합목 휴게소에서 가쁜 숨을 고르는데, 어디선가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사람에게 다가온다. 아
마 천적을 피해 이 곳까지 올라왔다가 사람들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것 같다. 파괴되어 가는 자연을
보는 것 같아 씁쓰레하면서도, 그 높이에서 생명체를 보는 것에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입맛은 없지만
등반을 위해 가지고 간 초콜릿을 먹고 산소를 한 통 샀다. 조금 올라가다 산소를 한 모금 마시고 앞서간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 조금 빨리 걸었다. 열 거름 정도 올랐을까 갑자기 숨이 콱 막혀온다. 갑자기 물에
빠졌을 때와 같은 답답함과 당황스러움, 말로만 듣던 고산병인가? 겁이 덜컥 난다. 위를 쳐다보니 정상
이 눈앞에 있다. 그래도 높이를 보니 300미터가 남아 있다. 산소는 점점 희박해질텐데. 아는 것이 병이라
했던가 걱정이 태산같다. 숨이 가쁠까 걱정이 되어 오르고 쉬고를 반복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난간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앞에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갑
자기 눈 앞이 캄캄해진다. 눈에서 별이 번쩍인다는 말이 실감난다. 아마도 기압차이 때문이리라 짐작하
산길을 재촉한다. 한 번 놀란 가슴이라 숨이 가빠오는 기색만 보이면 앉아 쉬었다. 쉬다, 걷다를 반복하
보니 이건 등반이 아니라 아예 길에다 통사정을 하는 꼴이다. 산길 자체는 너무도 잘 닦여 있어 등반이
기 보단 트레킹 수준이지만 그놈의 높이 때문에 도저히 빨리 걸을 수가 없다. 길 주위엔 아예 누워 쉬는
람들이 부지기수다. 워낙 경사가 심하고 코스가 하나 뿐이라,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정상이 손 뻗으
닿을 것 같은데 오리걸음 수준의 걸음으로 걷자니 답답하기가 짝이 없다. 강자에게 한없이 약해지는 일
본의 습성이 이 거역할 수 없는 자연에게서 배운 것이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보는 사이에 정상
을 알리는 조그만 정자가 있다.
정상 직전, 이모퉁이를 돌면 후지산 정상이다.

이 곳에서 일본인들은 지팡이에 매달고 온 방울을 떼어놓고 오른다. 하나의 의식인 것 같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갑자기 바람이 불며 추워진다. 머리가 아프다는 일행 한 명을 산장에 뉘어놓고 정상을 올라가
니 분화구가 나온다. 스펫츠를 준비하란 말에 잔뜩 기대했던 만년설은 없었지만 한라산 두 배의 산을 올
랐다는 감격에 가슴이 뿌듯하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동계 등반을 꼭 한 번 해 보고 싶다.
후지산 정상

그러고 보니 오늘 먹은 것은 초콜릿 한 개와 오이 몇 조각뿐이다. 입이 칼칼하여 밥 생각이 없었지만 하
산 길을 생각하여 우동을 주문했다. 한 그릇에 우리 돈 8000원이다. 우동을 입에 대니 도저히 먹을 수 없
을 것 같다. 향신료가 우리 입맛에는 영 맞지 않는다. 돈이 아까웠지만 몇 숟갈 먹고 반납을 했다. 내려오
려니 쓰레기를 가지고 가라고 야단이다. 후지산이 깨끗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려와서 들으
니 일본 속설에 후지산은 멀리서 보는 산이지 오르는 산은 아니란 말이 있다고 한다. 그런 산이 이렇게
깨끗해지다니, 자연을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8.000원 짜리 우동을 파는 휴계소, 이 갈리게 비싸단 생각도 했지만, 높이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받아야
될 것도 같다.

경사가 심하니 내려오는 길은 힘이 별로 들지 않는다. 화산 특유의 자갈을 밟으며 내려오노라니 몇 번
씩이나 신을 벗고 돌을 골라내어야 했다. 눈도 없는 산에 스펫츠를 착용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먼지
때문에 아예 고글까지 착용한 사람들도 있다. 눈이 아닌 자갈과 먼지를 막기 위해 스펫츠를 신고 고글을
착용하는 곳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다 보니 버스정류장이다. 영어와 일어를 주워
섬기며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요꼬하마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정상의 분화구. 백두산 천지는 아름다운 물이 있지만, 이 곳은 약간의 만년설이 있을 뿐이다.

호텔에서 샤워를 하려니 욕조가 너무 좁아 움직이기조차 불편하다. 그러고 보니 일본은 모든 것이 작다.
버스의 칸이 좁아 키가 작은 나도 다리를 펼 수가 없었다. 거의 차렷 자세로 앉아 왔고, 전철도 마찬가지
였다. 음식도 푸짐하다는 개념이 없다. 김치건 마늘이건 모두가 계산을 한다. 지진과 좁은 땅, 근검과 절
약이 민족성으로 굳어진 것 같다. 일본은 국가가 경제대국이지 국민 개개인이 삶의 질은 우리나라보다
떨어지는 것 같다. 누군가 일본의 문화를 축소 지향적이라 하셨지만 그것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
한 일본의 노력이 근검과 절약이란 민족성으로 굳어진 것이고 그것이 오늘의 경제대국을 만들어낸 힘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후지산 등반 지도

후지산 등반시 유의 사항
1.반드시 자외선 차단 크림을 준비할 것(높이 때문인지, 기후때문인지, 일행 네명 모두 화상(목부분)을
입어 며칠 간 고생했다.
2. 스팻츠와 고글, 마스크를 준비할 것(먼지와 자갈이 장난이 아니다. 숨도 못 쉴 지경이다. )
첫댓글 윤철친구 후 지산 오르는 기분 느끼게해 줘서 고마우이
일본을 정복하고 왔군요.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외국을 가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알게 됩니다.
후지산 밑자락 <하꼬네> 유원지/온천도 한번 가 보고 왔으면 더 좋았을걸 .....
후지산 정복을 하고 3.776미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기분 . 와 - 생각만 해도 좋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