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겨울의 어느 날,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가지고 있던 미련의 끝엔 진한 후회만 남는다는 것을.
그 미련을 뒤로 한 채 달려왔지만 결국 점점 더 영글어가는 그리움은 마치 실과 바늘처럼 내 마음 속에 엉켜있었다.
남김없이 버리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최소한 못된 마음만큼은 끌고 오지 않았다.
남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또다른 삶의 첫 번째 목적지는 예천이었다.
네 개의 도시 사이에 홀로 '군'으로 남아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높은 장벽에 부딪혀 좌절하고만 마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이유도 없이 정이 가는 곳 중 하나였다
직접 눈으로 보아온 예천은, 생각보다 많은 말을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경북 북부, 예향의 고장 예천.
안동, 영주, 상주, 문경이라는 네 개의 도시 사이에 끼인 조그만 군이다.
한 때 16만명까지 늘었던 인구는 어느덧 4만 5천명까지 줄었고,
일제강점기에 점촌과 영주보다 먼저 읍으로 올라섰지만 아직까지 읍으로 남아있어 정체가 심각한 곳이다.
그래서 한 번은 와보고 싶었다.
3번국도의 상주-문경과 5번국도의 안동-영주 사이에 끼어있는 지리적 입지 덕분에,
둘 중 어디를 가도 접근이 쉽다는 점까지 겹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물론 부대가 부대고 보직이 보직인지라 대대를 방문하면서 2013년 초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기는 했었다.
허나 부대 안에서밖에 움직인 기억이 없었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 흑역사와 같은 추억을 하나 쌓아놓기까지 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구 감소가 전국에서도 손 꼽을 정도로 심했던 곳이었던 만큼 발전이 정체된 모습은 많이 보인다.
뭐 그렇다 해도 읍내 중심가가 중앙차선도 없는 2차선에 불법 주정차 차량들로 가득하다.
군청도 몇십년 전 자리 그대로, 몇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
주차장도 아담하고 저 옆의 창고같은 건물에서도 업무를 본다.
하지만 의외로 정돈이 무척 잘 되어 깔끔하기도 했다.
군청 주변의 집들도 새로 지은 듯 반듯한 단독주택이 많았고,
아직 예천에서 최고로 쳐주는 예천재래시장 또한 깔끔하게 정돈하고 사투리로 큼지막하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보통 재래시장 안 도로가 2차선인 경우는 보기 매우 힘든데 예천만큼은 예외다.
불조심하라고 번영회에서 현수막을 걸어놓았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불이 난다면 소방차가 들어올 수 있을거라며 자랑을 하는 듯 했다.
좁디좁은 1차선 골목이지만 가게도 많고 차도 많고.
이른 아침이라 사람은 많이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없는 활기가 느껴진다.
십 수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고향 정읍엔 아직 시내에도 쓰러져가는 집들이 많은데.
어찌 시내가 이 곳 예천읍내만도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천을 따라 길게 늘어선 예천읍내는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기 애매할 정도로 규모가 제법 있다.
서쪽 끝, 평야가 널찍히 자리한 공간에는 예천의 관문 두 개가 나란히 마주본다.
하나는 예천역이오, 하나는 예천시외버스터미널이랬다.
예천역 광장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면 살짝 왼쪽에 간판이 보일만큼 가깝다.
갈아타기엔 이만큼 편한 곳이 없겠지만, 아쉽게도 예천역이 열차가 너무 적게 다니므로 그냥 환상에 불과하다.
둘 다 읍내에서 워낙 끄트머리로 떨어져 있어 군청, 시장 쪽에서 도보로 이동하기는 조금 어렵다.
특히 노인이 많은 동네 특성상 어지간하면 한 번 환승을 거쳐야 이 곳에 올 수 있다.
읍내가 워낙 오래되어서 아직도 차선 구분 없는 2차선 동네 골목 수준인데,
여기는 이미 개량된 외곽도로가 합류하여서 4차선의 번듯한 도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너머로 보이는 모텔.
어디가나 버스터미널과 숙박이라 쓰고 유흥이라 읽는 업소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예천의 사실상 유일한 관문이지만 지금은 바람이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는 것 같다.
인도와 도로의 구분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택시가 추운 날 연인들이 허그하듯 찰싹 붙어있는 이 곳의 이름은,
'예천시외버스터미널'이다.
내부는 그럭저럭 평범한 버스터미널이다.
얼마 전에 갔었던 함창과 상당히 비슷하게 생겼다. 물론 군 소재지인 이 곳이 그래도 활기가 넘친다.
사람이 없을 시간대에도 몇 명의 사람이 표를 사고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매점도 입구에 두 개가 나란히 마주보며 물건이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입구에서 들어오면 정면에 보이는 모습은 이렇다.
표를 사고 시간표를 확인하기는 더없이 좋은 구조다.
돈에 정신팔려 마치 던전 찾듯 헤매야 하는 최근의 일부 민자터미널들은 여기를 보며 반성해야 한다.
어딜 가나 핵심 노선은 서울과 지역 중심지이다. 예천도 예외는 아니다.
동서울과 강남행이 적절히 섞여있지만 역시나 동서울행이 더 많다. 소요시간은 둘 다 3시간 내외.
그렇대도 둘을 합쳐 겨우 1시간 배차다. 생각보다 배차가 좋지는 않다.
대구가는 노선도 별로 없다. 여기서 대구라면 북부정류장일텐데, 직통노선이 겨우 하루 8회 뿐이다!
경상북도 맞나 싶을 정도로 적다.
서울이나 대구보다 안동행 노선이 더 많다. 풍산을 경유하고 40분 정도 걸리는데 평균 40~50분 정도 배차간격이다.
막차도 상당히 늦게까지 있어 무려 청주-대전 막차보다 늦다. 그와 대비되게 첫차 역시 늦은 편.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점은 경북선이라는 대체제가 있음에도 경북선 라인으로의 노선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영주-예천-점촌-상주-김천을 잇는 노선은 거의 20~30분 간격으로 있다시피 한데,
이들 도시 중 지역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동네가 하나도 없고 인구 역시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 서울, 대구, 안동을 모두 뛰어넘을 정도로 배차가 조밀하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교류가 많다는 건데 안동보다 많을까? 싶을 정도면...
아예 김천, 대전, 태백행은 경북선라인에서 따로 분리해서 정리해 놓을 정도로 안내까지 친절하다.
철도로 한 번에 갈 수 없는 서울, 대구, 안동보다 경북선이 있는 이쪽 동네들 가기 더 편한 '불편한 진실'.
나중에 시승이라도 한 번 해보고 싶어진다.
서울, 대구, 안동, 경북선라인 아니면 행선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편.
그나마 청주, 대전, 구미가 하루 5~6회, 수원, 충주, 태백이 하루 3회 있다.
부산, 마산도 있긴 하지만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고속도로가 거의 2000년이 다 되어서 들어온 동네기 때문에 국도 경유 버스의 비중이 높다.
영주-김천간 버스는 말할 것도 없이 전 구간 국도여서 요금이 상당한 편이다.
점촌 3,100원, 안동 3,500원, 영주 4,500원, 상주 4,600원.
대구는 직통과 완행이 따로 있었지만 완행 승차는 거부하는건지 아예 요금조차 적혀있지 않다. 북대구 8,700원.
서울은 역시나 거리에 비례하면 저렴한 편이다. 동서울, 강남 16,500원.
시골의 한적한 버스터미널이라도 나름 있을건 다 있다.
입구에도 놓인 공중전화가 여기까지 있고, 하나은행 ATM기계도 있다.
올리지는 않았지만 내가 나왔던 부대 홍보물도 있다.
군대와는 거리가 먼 동네인데도 은근히 군인 편의시설이 잘 되어있는 것 같다.
다른 터미널과는 다르다는걸 뽐내듯 입구도 참신하게 바꾸어놓았다.
내부 색감은 찜질방에 온 듯, 또 나가면 나가는데로 느낌이 다르다.
자동문 게이트를 통과하면 다시 평범한 버스터미널의 승차장이 나온다.
출입구와 제일 가까운 곳부터 차례대로 서울-대구-점촌-영주-안동 순이다.
경북지방을 양분하는 진안고속의 따끈따끈한 신차들이 나란히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갈수록 보기 힘들어지는 대우버스를 고집하는 몇 안 되는 회사인지라, 유독 이 동네에선 대우가 많이 보인다.
수도권 기준으로는 KD를 제외하고는 고속부터 시내까지 가릴 것 없이 현대로 갈아타는게 대세인지라,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대우버스가 이젠 신기하기까지 할 정도다.
근본없고 두서없는 이야기는 잠시 정리해두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부끄러운 뒷모습을 잠시 담아둔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과 따스한 햇살을 동시에 맞는 예천터미널의 모습을 보며,
밤과 낮의 다른 예천의 모습까지 떠올리며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든다.
과거의 끈을 놓고자 왔지만 결국 여기에 온 이유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이미 이 곳을 떠나 다른 고장으로 가면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자고도 했기 때문에 더욱 설레는 감정이 앞선다.
옛 모습을 나름대로 잘 유지하면서 조금씩 변화해가는 예천의 모습이 정확히 매치가 된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예천의 한적한 버스터미널은 나에게 진한 속삭임을 전해주는 것만 같다.
첫댓글 아무래도 경북선 열차 운행횟수가 적고 소요시간 면에서도 큰 차이가 없는 것이 하나의 원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김천-옥산-청리-상주-점촌 등 경북선을 따라 움직이는 구간에서도 기차보다는 버스로 이동하는 승객들이 대부분이더군요. 그만큼 그 지역에서 이 라인을 따라가는 수요는 보장되어 있고, 열차가 버스보다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시외버스가 저 정도로 좋은 배차를 가져가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더욱이 상주 같은 곳처럼 기차역이 시내 중심가와 멀찍이 떨어져있는 것도 한가지 원인이지 싶구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경북선 열차의 운행횟수가 적어진 것도 버스에 밀려서라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버스 요금이 너무 올라 경북선이 훨씬 싸지만 횟수 차이와 익숙함 때문에 버스가 우세한 것이겠죠. 그렇다 해도 오로지 버스로밖에 갈 수 없는 대구, 안동같은 곳보다 많아서 조금 놀랍습니다.ㅎㅎ
어떻게 일죽이 수원보다 요금이 더 비쌀까요???충주-일죽-수원코스일텐데....
국도와 고속도로 요율의 차이때문에 일죽이 수원보다 비싸게 되었습니다만, 차이가 점점 커져가는 느낌입니다.
요금이 너무 터무니 없이 비싸고 형편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곳이네요. 들쭉날쭉
같은 코스를 밟는데도 환승하는것보다 비싼 것은 뭔가 문제가 있네요. 말씀하신대로 적절히 맞는 요금으로 조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어떡케 버스요금이 동서울보다 일죽이 더 비싸나요 /점촌 ---충주 --주덕 ---감곡 장호원 ---일죽 ---중부고속도로
이렇게 타야 동서울로 올라가는데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이네요
동서울행 노선은 점촌함창IC를 통해서 직통으로 올라갑니다. 전구간 국도로 가는 일죽과는 그래서 요금 차이가 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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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문이 가장 신기했던거 같습니다. 편의시설은 아직 더 필요해보이고요.^^
예천-점촌-상주는 교류가 많아요..유동인구도 많았구요...
그렇군요. ^^
옛날 예천터미널을 매일 지나고 다녔는데 터미널 위 천일화물이 나의 중간 종착지
아침저녁으로 터미널을 봤는데~~이곳에서 만나니 더 반갑네요~
이 근방에서 일을 하셨었군요. 한참 몸을 담갔던 곳을 또 보는 느낌이 다르겠네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렇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