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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 수은공파 시조 휘 홍조 - 효제 - 석보 - 재화( 생부 명화) - 현정 - 경 - 첫째 병하 둘째 병은의 여식 김수담(독립운동가)을 출산하다
수은공파로 시작된 안동의 활동상을 이야기하면서 약와 휘 현정 < 강동파 강동할배 > 의 후손인 저자의 가계도 이야기 4탄을 이어가고자 한다
오늘 삼가 게시 하는 위인 이외에도 너무 훌륭한 분이 많아서 차후 천천히 올려두고자 한다
약와 휘 현정의 자중 휘 곤 암 경 상목<응년이 후사이음> 중 세째 아들이신 휘 경의 아들 4분중 모두다 기술을 못하고 신암 휘 병하와 설죽 휘 병은 위주로 기술을 하지만 두분의 이야기는 시작도 못했다
그만큼 그당시 유학의 스승으로써 타 지역 및 후손 제자들에게 미친 영향이 대단하다
문집간행 및 기타 자료를 보면 그당시 정재 류치명 신암 이병하 긍암 이돈우 대은 이수영 천사 김종덕 서산 김흥락 등 위대한분이 많으시다 긍암이돈우는 서산 김흥락 권세연 등에 영향을 주었고 안동 의병장 권세연이 통혼한 처부가 한산이문 휘 문직이며 안동의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다음에 게시 예정이다
또한 신돌석하면 역사책에 많이 나오는 인물이다 이 편은 다음에 연재 하고자 한다
정조때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한 영남 만인소사건의 수장 소산 휘 광정의 자 휘 우의 서간에 가계보 정보가 있고 좋은 내용이라서 이야기른 더해 올려두고자 한다
이우(李㙖) 서간(書簡)
원소장처: 안동 소호 한산이씨 소산종가 /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이우(李㙖) 서간(書簡) 9월 8일에 이우가 딸(여식 따님 이하 한국학 편집자원문)의 친정 방문 등과 관련하여 사돈에게 보낸 편지이다.
9월 8일, 俛庵 李㙖가 딸의 친정 방문 등과 관련하여 사돈에게 보낸 편지 9월 8일에 俛庵 李㙖(1739~1810)가 딸의 친정 방문 등과 관련하여 사돈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어제 인편이 있었는데도 편지를 보내지 못하였던 점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였다. 이어 깊은 가을철에 상대의 조부 및 상대가 평안하게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특히 자신의 여식과 외손자가 모두 평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李㙖는 딸이 친정에 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9월에는 자신의 근력이 딸을 맞이할 형편이 되지 못하고 10월은 추운 계절과 가까워서 아이를 데리고 왕래하기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李㙖는 자신이 딸이 오려는 것을 막는 꼴이 되었으므로, 딸의 실망이 반드시 클 것이라고도 하였다.
李㙖는 병을 앓다가 근래 살길을 찾게 되었다고 하였으며 아이들도 별탈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곧 열릴 科擧로 인해 이래저래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끝으로, 이곳에서 忠立(信菴 李秉夏)의 동생인 生員 李永年이 長水의 관리로 있는 그 外舅의 任所에 가려고 하는데 가는 길을 잘 모르는 관계로 상대 쪽에 들러 상대의 조부에게 자세히 물어보게 하였다고 하면서, 잘 부탁한다는 뜻을 전하였다.
信菴 李秉夏(1780∼1852)는 본관이 韓山, 자는 忠立, 호는 신암이다. 生員 李{土+敬}의 아들이며, 雪竹 李秉殷(1782∼1860)의 큰형이다. 저서에 문집이 있다. 生員 李永年은 본관이 한산, 자가 德久이다. 李秉夏의 동생으로 李尙穆의 후사가 되었다.
李永年이 1805년에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므로, 이 편지는 1805년에서 1810년 사이에 작성된 것이다.
1차 작성자 : 김장경
이우(李㙖) 서간(書簡) 昨有便。而不能致問。雖委以 老廢。爲恨則深矣。秋深霜 重。未審 重堂體候萬安。省下履用平 安否。女息子母皆獲吉慶 否。有來覲之意。而此月內則我 之力。不能相邀。十月則迫寒節。 不宜率兒來往也。不免自此 拒其來。太不近情。渠之落莫 必甚矣。歎如之何。生。近入生道。 兒少亦無他憂。然科聲逼人。 得不得外。不免一場惱擾。奈何。 此去賓。卽忠立之弟。在京永年 上舍也。方自此赴其外舅長水 任所。迷其路。使之歷訪。仍詳稟 於尊府。想不外之矣。餘。拭 昏不多及。 九月初八日。老生。㙖。拜。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휘 병은과 휘 병하는 당대 유학의 대가들 중에서도 타인이 인증하고 따르는 스승이었다고 한다
안동향교지(安東鄕校誌)는 第一節 人物 이병은(李秉殷) (정조6:1782~철종2:1860) 한산인(韓山人)으로 약와(約窩) 현정(顯靖)의 손(孫)으로 자(字)는 질여(質汝) 호(號)는 설죽(雪竹)이다.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문인(門人)이며 문집(文集)이 있다라고 하는데 아마 휘 현정때부터 제작한 유문집과 유유집 작업이었던것이라고 유추해본다
한국국학진흥원 간찰 자료를 통해 유학의 깊이를 나름 판단해보면
첫째기사>
계유년 2월 27일 이병은(李秉殷)이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에 빗대어 옥살이를 하는 상대방을 위로하며 보낸 간찰(簡札) 계유년 2월 27일, 이병은(李秉殷)이 보낸 간찰(簡札)이다.
간찰은 동문, 친척, 친구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로 서찰(書札)이라고도 하며 형식은 편지글 형식으로 서두 인사, 근황 및 가족 동향 여쭈기, 자신과 가족의 안부 전하기, 현안 설명 및 부탁 사항, 마무리로 구성되어 있다.
공자(孔子)가 『논어(論語)』에서 공야장(公冶長)이 자신의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것을 보고 조카 사위로 맞아들인 것처럼 상대방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다고 하면서 위로하였다. 그리고 여러 가족의 근황과 건강 등에 대해 염려하면서 평안을 기원하였다.
계유년 2월 이병은(李秉殷)이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에 빗대어 옥살이를 하는 상대방을 위로하며 보낸 간찰(簡札) 글자크기 서지 해제 기사본문 기사목록 反浦調几下執事入納。蘇湖李生上候狀。謹封。公冶長之縲絏也。不知有司之爲誰。而夫子直稱之曰。非其罪。況今有司之明。難及古人。執事之賢。又未必居公冶之右。則一時儻來之厄。何足爲白玉之玷也。第惟念晩景。攝養之餘。囹圄械楊。尤非所可堪者。卽當趨診。以效加餐之祝。而適滯遠地。未剋遂誠。歸聞從者已浩然矣。伏不審調中體度若何。愷悌君子。神明所勞。必不使一番外證。久爲身體之辱矣。弱齡令允。倉皇煎煼之狀。想未不勝憐恤。歸後仍無疾病。仰昭惟憂否。伏爲之溯慮切切。秉殷。家嚴爲西神所迫。遠寓山寺。而連承諐候綿綴。重以兒輩染痘。戒心出場無期。有何悰況。可以仰聞。適聞三從妹行。撥忙不備。書禮。伏惟下察。謹再拜。上候狀。癸酉二月二十七日夜。李秉殷再拜。
두번째기사>
계축년(1853) 4월 이병은(李秉殷)이 운촌(雲邨)에 문안과 근황을 보낸 간찰(簡札)
계축년(1853) 4월 4일, 아우 뻘인 이병은(李秉殷 : 1782∼1860)이 보낸 간찰(簡札)이다.
간찰은 동문, 친척, 친구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로 서찰(書札)이라고도 하며 형식은 편지글 형식으로 서두 인사, 근황 및 가족 동향 여쭈기, 자신과 가족의 안부 전하기, 현안 설명 및 부탁 사항, 마무리로 구성되어 있다.
서두에서 봄 절기에 맞는 인사를 올리며, 그리운 정회가 간절하다고 했다. 그리고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 대한 염려의 마음을 담아 보냈다.
그리고 자식과 손자들의 근황과 질병 등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렸다. 그리고 이별 이후의 정회를 언급하면서 상면하기를 희망하였다.
계축년(1853) 4월 이병은(李秉殷)이 운촌(雲邨)에 문안과 근황을 보낸 간찰(簡札) 글자크기 서지 해제 기사본문 기사목록 一春花事。盡送風雨中。人生足別之恨倍覺。憫然。忽此人至手滋在其留喜。而后可知也。仍審頥攝體節。恒諐常度。吾輩手紀無病爲難病而良已爲尤難。只有安身常理。而聽造物者。處分而已膝下貽憂。又何支離種種勞仰。弟不病而呻不事而撓。一則氣餒。二則心恙重以孤存悰地。了無生人。況七十過關。是走似印遣。何足嘆嗟。仰聞美愼。則其不可北轅。一會之期。惟在我矣。而一年二年計。莫之遂三復。來喩。又爲之一喟耳。崧母三口厪厪免恙。增尾之憂。癡聾者固不知。然來牟之貽望。絶受明是可憂也。兒子一候禮。則然焉。情非但已而一身固緾。六足難辦。雖曰。心之勤。不如事之急。而亦惟信哉。餘希。保嗇。不備禮。情焰。癸丑二月四日。弟李秉殷拜。蘇湖。弟謹謝書。雲邨。調座。執事。
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휘 우나 휘 병은 선조님들의 자식사랑은 남달랐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문집기록을 보면
극난재집 克難齋集 시문집으로 편저자 권제경 제작시기 1869년(고종 6) 권수·책수 6권 3책 간행·발행·발급자(처)
소장처 규장각 도서 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 권제경(權濟敬)의 시문집.
내용 6권 3책. 목활자본. 1869년(고종 6) 손자 기(炁)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대진(金岱鎭)의 서가 있고,
권말에 이병은(李秉殷)의 발이 있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권1·2에 시 26수, 서(書) 39편, 권3∼5에 잡저 7편, 기 1편, 전(傳) 1편, 권6에 명 2편, 축문 1편, 제문 6편, 묘지명 1편, 행략(行略) 3편과 부록으로 뇌사 1편, 만사 16편, 제문 4편, 행장·묘지명·묘갈명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거경(居敬)·궁리·심성·이기(理氣) 등을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서(書)는 권무회(權无悔)·조공보(趙恭甫) 등과 주고받은 예설·심성·이기·사단칠정 등에 관한 문답이 대부분이다.
잡저 중 「진수록(進修錄)」은 학문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자세에 관하여 기술하였으며,
「위학십목시학자(爲學十目示學者)」는 입지·주경·명리·독행·무실·체험·지요(知要)·개과(改過)·자성·취정(就正) 등 학문하기 위한 덕목 열 가지를 열거하여 설명한 것이다.
「독서차의(讀書箚疑)」와 「독서만록(讀書謾錄)」은 사서(四書)와 정주학설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또한 형인 휘 병하 신암공이 졸하여 쓴 내용을 형제의 우애를 더했다
與李雪竹 慟哭言, 家兄起葬之夕, 伯氏文丈計車至, 蓋其六十 年, 莫逆之情, 至於死生之際, 친형의 장례식 날 설죽 이병은의 伯兄 訃音을 듣고 60년 막역한 친구였던 고인과의 정리를 생각하고, 멀리서 애도의 뜻을 전한 편지이다.
위에서 보듯이 대유방가 집안에서 출생하신 휘 병은 설죽공의 따님 (여식/ 딸) 은 안동 김씨 사촌마을 김헌유에게 시집가셔서 항일독립운동가인 김수담을 출생하셨다 시댁의 부친이 바로 김양징이다
또한 형인 휘 병하의 따님은 사촌마을 김석유에게 시집갔다
서애 류성룡의 생가인 사촌마을의 인물 몇분을 살펴보자
첫째기사>
김양정(金養楨) (1785∼1847 정조 9∼헌종 13) 자는 제언(濟彦), 호는 정암(定菴)이다.
체화당을 지어 후진을 양성한 농은 종택(宗宅)의 손자로 아버지는 해진(海進)이고 어머니는 예안인 김훈(金訓)의 따님이다.
어릴 적 동생 양식(養植)과 함께 조부 김종택(金宗宅)이 건립한 글방 체화당(棣華堂)에서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 아래 학업에 정진하였고 자라서는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의 문인이 되어 학문이 고명하였다.
30세 무렵부터 도남서원과 도산서원에서 중용(中庸)을 강론하였고 학문에 대한 집념이 강하여 부친 3년 상중에 만사(輓詞), 뇌문(?文), 묘지문(墓誌文) 등을 수습하여 《통모록》(痛慕錄)을 편찬하였다.
광뢰 이야순(廣瀨 李野淳)은 상(喪)중에 있으면서도 학문에 힘쓰는 모습을 보고 함께 강마(講磨)하자고 격려하였다.
이야순(李野淳), 정상진(鄭象晋), 이언순(李彦淳), 이가순(李家淳), 신정주(申鼎周), 금시술(琴詩述), 이원조(李源祚), 유치명(柳致明), 이휘녕(李彙寧),
이병원(李秉遠), 이휘양(李彙陽), 참봉 강장흠(姜長欽)?김재진(金在振), 진사 이고숙(李姑叔),
이병하(李秉夏) 이병은(李秉殷), 현령 홍종호(洪鍾浩)?조건(趙鍵)?원석주(元錫周) 등 영남의 명유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족형 양휴(養休) 족질 희유(羲裕) 등과 더불어 후산사, 도담사에서 강회를 열어 후진들을 지도하였다. 충북 괴산(槐山) 안렴사공문중 사안 김진옥(士安 金鎭沃) 등과도 내왕하였다.
공은 1827(丁亥 순조 27)년 의성향교 전교가 되어 향교를 중수하고, 기문을 지었다.
《퇴계선생문집》중간에 참여하였고, 이야순(李野淳) 등과 고운사(孤雲寺)에서 천사선생문집(川沙先生文集), 제암집(濟菴集), 후산 이종수(後山 李宗洙)의 유고를 교정하였으며,
1832(순조 32) 겨울 도담사를 건립할 때 의절(儀節)을 정하고 창건록(創建錄)을 지었다. 1834(순조 34, 50세)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도담사 앞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교담이라 이름 짓고 마음을 닦으며 시상을 떠올리는 곳으로 삼았다.
그리고 후송재의 역사를 기록한 귀중한 자료 「후송재중수기」(後松齋重修記)’를 남겼다.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정종로(鄭宗魯)가 학계에 끼친 내용을 열거하면서 정종로에게 정2품(正二品)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는 정입재선생증시소(鄭立齋先生贈諡疏)를올렸다.
《통모록》은 전하지 않고《추로논사록》(鄒魯論士錄)과《정암선생문집》(定菴先生文集 9권 5책)이 전한다. 이 문집은 1950년대 5세손 김위윤(金渭允) 등이 간행하였다.
시 200여수, 학문을 논한 서찰 110여 편이 수록되어있다.
행장은 판서 이원조(李源祚), 묘갈명은 감역관 이만각(李晩慤),
묘지명은 이병은(李秉殷)이 지었다.
자료출처 : 사촌마을6백년 김광남
위 정종로는 대산 휘 상정의 제자이다
두번째 기사>
김양징(金養澂) (1794∼1856 정조 18∼철종 7) 초휘는 용우(龍우), 자는 복원(復元), 호는 백암(柏庵)이다.
제암 종섭(濟菴 宗燮)의 손자로 아버지는 통덕랑으로 유집 3권을 남긴 백실 경진(白室 經進)이고 어머니는 생원을 지내고 사의(史議)에 추증된 전주인 유성휴(柳星休)의 따님이다.
성품이 맑고 밝았으며 자질이 총명하여 경전(經傳)을 깊이 연구하였다.
족질 석유(奭裕)와는 30년간 교유하면서 학문을 나누었고 시를 지어 스스로를 즐기면서 강회를 열어 후진을 지도하였다.
1849(헌종 1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56세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시집을 남겼으나 병란에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공의 글은 만사(輓詞) 6수가 전해온다.
자료출처 : 사촌마을6백년 김광남
세번째기사>
김수담(金壽聃) (1852∼1896 철종 3∼건양) 자는 근수(謹叟)이다.
생원 양징(養澂)의 손자로
아버지는 인암 헌유(忍庵 憲裕)이고 어머니는 한산인 이병은(李秉殷)의 따님이다.
성품이 강인하고 가학으로 학문을 익히다가 병신년(丙申, 1896)에 창의하여 선봉장(先鋒將-앞장 선 군대를 거느리는 장수)으로 의성의진에 참전하였다.
의성 구성산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황산전투에서 참패하여 45세에 순국하였다.
순국 당시 사촌마을이 보이는 황산 중턱에 안장하였는데, 1997년 10월 17일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698)에 이장하였다.
1995년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묘비명은 종손 김성회(金晟會)가 지었다.
자료출처 : 사촌마을6백년 김광남
바로 독립유공자 휘 수담을 출산하셨으며 친오빠인 대은 이수영은 그시대 타인이 알아주는 대유학자였던 것이다
출처 안동향교지(安東鄕校誌) 第一節 人物
이수영(李秀瑩) 본관(本貫) 한산(韓山)
시대(時代) (순조7:1807~고종29:1892) 자(字) 장국(章國) 호(號) 대은(大隱)
이수영(李秀瑩) (순조7:1807~고종29:1892) 한산인(韓山人). 병은(秉殷)의 자(子)이다. 자(字)는 장국(章國)이며 호(號)는 대은(大隱)이다.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지헌(止軒) 최효술(崔孝述)의 문인(門人)으로 성독효우(性篤孝友)하고 강변예설(講辨禮說)하였다. 유집(遺集)이 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설죽 휘 병은은 2남 2녀를 두셨으며 4분다 현달하시여 향촌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셨다 휘 병은의 자 나머지분은 지면상 생략하였다
나머지 독립운동의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게시하고자 합니다
5대조 현고모님을 기리면서 대은 이수영 후손 이대원 삼가 글을 게시하다
< 위 자료를 게시할 수 있도록 온라인을 열어 주신 저자의 5대조 고모부인 사촌마을에 감사를 이글을 통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
첫댓글 훌륭한 독립운동가의 생모가 되신 자랑스런 강동파의 할머님 이야기며 큰 학자 대은 휘 수영 선조님에 관한 내용 잘 읽었소. 읽다가 한가지 느낀점은 당시에 전주인 정재 유치명이 한산이씨 소호문중과 참 두터운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것이네. 대산선조의 외증손이며 병운-병진-병원의 생질이였던 큰 학자 유치명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군. 아마 정재 선생댁도 나중 몇대를 거쳐서 독립운동에 이바지한걸로 아는데..
예 옳은 지적입니다 그부분까지 기술하려니 너무 지면도 길고 하여 제외했는데 다음에 더게시 ㅎㅎ
정재 류치명 통정대부 으로 대단하신분입니다 저희 집 가계보의 신암 휘 병하와 매우 친하게 지냈으며 저희집3~4대 정도 전주류씨와 통혼하였지요 이후 긍암 휘 돈우와 대은 휘 수영 두분이 말년에 정재집 작업을 마무리 하십니다 다음편에는 게시예정인 안동의 독립운동 권세연 편이 게시예정입니다 긍암 이돈우 편은 너무 길어 두번정도 소암 휘 병원의 손자인 휘 문직의 사위가 바로 권세연입니다 그래서 이전 2탄에 소암 휘 병원이야기를 복선으로 잠시 넣어두었지요 과연 자랑스런 독립 운동가를 길러낸 한산이문의 선조님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