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마이너스 5백만 원
이정미
그녀는 오늘도 폐장 삼십 분 전의 떨이 시간에 맞춰 마트에 도착했다. 숨이 차다. 도보로 이십여 분 거리를 숨이 턱에 닿도록 부지런히 뛰고 걸었다. 기름값이 아까워 승용차는 거의 세워두고 있는 상태다. 남편 역시 오래 전부터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호주머니에서 동전 짤랑거리는 소리가 거북하다고 툴툴대는 남편에게 교통카드를 사다 쥐어주자 그 뒤로는 군말이 없다.
콩나물 세 근에 천 원, 자반 한 손에 천오백 원, 한 봉에 육백 원짜리 순두부가 이백 원, 대파 한 단에 오백 원……. 어느새 장바구니가 가득 찬다. 화장품 코너를 지날 때 바닥을 드러낸 트윈 케이크가 떠오른다. 잠시 주춤대다 지나쳐버린다. 로션이라면 모를까 색조화장은 어림없다. 맨 얼굴로 다니는데 익숙해진지 오래인데 왜 화장품 가게 앞에서는 아직도 마음이 흔들린다.
한동안 모든 욕구를 접어야 한다. 쇼핑을 하면서 가장 괴로운 게 유혹과의 싸움이다. 하지만 초등학생 둘이 있는 4인 가족이 월 백만 원으로 살려면 별 수 없었다. 딱 열 달이다. 열 달 후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다. 생각하면 꿈만 같던 그 시간들, 이제 그 악몽에서 벗어날 날도 머지 않았다.
남편이 증권투자로 날려버린 5백만 원 때문에, 매달 5십만 원씩 빚을 갚아야 했다. 그 책임은 허튼 꿈을 꾼 남편에게 있지만 사실 원인제공은 그녀가 했다. 해서 그녀는 뼈저린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아이들 학용품과 준비물은 매번 쓰던 것을 재사용하게 했다.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고 복지관 ‘방과 후 교사’에게 가라할 때 아이들은 왜냐고 따져 물었다.
“형편이 좋아지면 다시 학원에 보내줄게.”
“왜 갑자기 형편이 나빠졌는데요?”
“욕심부리다가 실수를 했어.”
“근데 왜 우리가 피해를 봐야해요?”
아이들은 집요했다. 얼렁뚱당 넘기려다 결국 전후 사정을 솔직히 공개하고 협조를 구해야 했다.
샤워하는 아이들에게 절수, 절전을 하도 외쳐 아이들에게 그녀는 ‘할머니 엄마’가 되었다. 핸드폰은 받기만 하고 거는 전화는 공중전화를 이용하는데 식구들 모두 동참했다. 아무 잘못 없이 불편을 견디는 아이들이 대견했다. 우환이 도둑이라는데 식구들 중 누구도 병나는 일없이 건강한 것 또한 고맙기 그지없었다.
남편은 취업난 때문에 대졸학력임에도 전문대졸 대우를 받는 급수를 택해서 보건소에 들어갔다. 결혼할 당시에는 남편의 직장과 직급이 실제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조용하고 따듯한 심성에만 폭 빠졌다. 그런데 막상 함께 살다보니 남편의 등이 점점 좁고 답답해 보였다.
“그 나이 그 학벌이면 다들 최소한 연봉 이천 이상인데 당신은 참 딱도 하네요.” 남편의 무능을 시시때때로 건드린 것이 시발이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건 도무지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마다 남편은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빼물었다. 가정에 충실하고 아이들에겐 자상한 아빠인 남편을 자꾸 몰아댄 자신의 어리석음을 이제야 깨닫는 그녀다. 크진 않지만 내 집이 있고, 운 좋게도 친척한테서 헐값에 넘겨받은 중고차가 있어 움직일 때 불편하지 않고, 아이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족하던 남편이었다. 욕심 없는 남편에게 무리수를 두게 한 건 분명 그녀 자신이었다.
주변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남편 입에서 재테크니 투자니 하는 낯선 말들이 자주 오르내렸다. 그녀도 내심 흥미롭고 기대가 되었다.
“나도 주식투자 한 번 해볼까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위험하지 않을까요?”
“모르는 얘기! 정보에 밝으면 그럴 일은 없어. 결국 머리 싸움이지 뭐. IMF 때 정리해고 당한 내 친구 얘긴데, 꿈속에서도 주식현황판이 왔다갔다할 정도로 종일 컴퓨터에 매달려 살다가 결국 몇 백만 원을 몇 천만으로 둔갑시켰다잖아.”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단, 나는 책임 안 져요.”
다음 날 남편은 5백만 원을 대출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만에 홀랑 날렸다. 쉽게 벌 수 있는 만큼 쉽게 날릴 수도 있다는 걸 간과한 까닭이다. 남편을 코치했던 친구가 찾아와 사과를 했다.
“제수 씨 정말 죄송합니다. 도와준다고 하다가 그만 헛짚는 바람에…….”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던 남편 친구가 한 번만 더 투자해보라고 권유하는 걸 간신히 돌려보냈다. 남편 친구는 미안하면 그만이지만 이쪽은 뒤를 감당해야 했다. 하긴 누굴 원망할 것인가? 자신 있으면 마음대로 하세요. 단, 나는 책임 안 져요. 그 말 또한 허망했다. 책임을 누가 지든 상관없이 현실적인 부담은 몽땅 그녀 몫이었으니까.
다음 달부터 안 그래도 심에 안 차던 월급에서 5십만 원이 제해진 채 그녀에게 들어왔다. 처음엔 뭣부터 줄여야할지 대중이 안 가 좌충우돌했다. 짜증만 늘고 얼굴은 종일 펴질 새 없었다. 사람 망가지는 게 순식간이었다. 마음을 바꾸었다. 어떻게든 열 달만 견뎌보자.
욕구불만 투성이이던 지난 날이 어찌나 그립던지……. 과거로 돌아가는 걸 목표로 눈물겨운 내핍생활에 들어갔다. 삼분의 일이 줄어든 생활비로는 못 살 줄 알았는데 살 수 있었다. 돈에도 고무줄 속성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힘들긴 했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다. 안 쓰고 사는 재미도 재미는 재미다. 고통이 재미로 바뀐 요즈음 어느새 종점이 보인다. 십 개월. 대출금을 상환하는 십 개월이 코 앞에 온 것이다. 그녀는 날마다 행복하다. 저녁마다 떨이를 찾아 나서는 길도 힘이 펄펄 솟는다. 알뜰 쇼핑으로 정성 담긴 식탁을 마련할 때면 간을 보겠다며 다투어 달려드는 아이들, 그 작은 소란도 행복이다.
전화도 없이 남편 퇴근이 늦다. 웬 일이지? 불안하다. 지난 열 달 동안 남편은 회식이 있는 날을 제외하곤 항상 집에서 저녁을 들었다. 남편의 자리가 빈 식탁이 어색해 그녀는 자꾸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9시 뉴스를 시청하는데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좀 나올래? 긴히 할 얘기가 있어.”
포장마차의 남편은 소주 한 병을 다 비워가고 있었다. 안주도 없이 우동국물만 마시면서. 뭐야? 혹시 또 대출 받아 증권 투자를? 가슴이 벌렁거린다.
“당신도 한 잔 하지.”
남편이 술을 따라준다.
“당신 왔으니 이제 안주 하나 시킬까? 뭐 먹고 싶어?”
“됐어요. 긴히 할 얘기가 뭔지 그거나 하세요.”
속이 탄 그녀가 소주를 냉수처럼 털어 넣는다. 집을 놔두고 굳이 밖으로 불러낸 걸 보면 사고를 친 게 분명하다.
“여보, 내가 그 동안 고의 아니게 당신을 속였는데 용서해 줄 수 있겠어?”
고개를 떨구고 잔뜩 주눅든 남편의 모습이 보기 싫다.
“뭔지 알아야 용서를 하든 말든 하죠. 당신답지 않게 웬 뜸을 그리 들이세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용서해줄 거지?”
남편이 재차 다짐한다. 까짓 거 한 번 겪어봤는데 두 번 못하랴. 다시 열 달이 연장된다 해도 두려울 건 없다. 그녀는 단단히 마음먹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머쓱한 표정의 남편이 불쑥 뭔가를 내민다. 통장이다. 역시 또 대출을?
“여보, 펴 봐 어서!”
당치도 않게 사뭇 다그치는 목소리다.
그녀 이름의 통장이었다. 정기적금통장. 매월 오십만 원씩 불입한 통장은 만기를 한 달 앞두고 있었다.
“뭐예요 이게?”
남편이 그녀의 손을 꼬옥 잡는다.
“미안해 여보, 사실은 나 증권투자 한 적 없어. 당신이 하도 돈타령을 하길래 화가 나서 얼떨결에 친구와 짜고 그만……. 내가 심했지? 자, 이젠 이 못난 남편 월급 백오십 만 원이 달리 보일 거야. 그렇지?”
화가 나야 하는데 웃음이 나온다. 그녀가 웃는다. 젖은 눈으로 남편을 흘겨보며 오래 웃는다. 안주로 나온 구운 양미리도 덩달아 온몸을 휘며 웃는다.▣
첫댓글 4년전에 썼던 것입니다. 근무경력이 10년 된 공무원 월급이 150만원이었다는 것은 5년전 시세였습니다. 제가 알기론 모든 공무원이 다 그런 것은 아닌데요, 그 당시 일부 대우 낮은 부서와 직급이 있었다고 합니다.
굉장히 현실적인 잼있는 꽁트,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