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왕을 섬기리라
2011년 3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30:7-10
(렘 30:7, 개역)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 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렘 30:8, 개역)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렘 30:9, 개역)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렘 30:10, 개역)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오늘 본문에서 두 인물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야곱이요 다른 한 분은 다윗입니다. 이 두 인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들이 언제나 추구하는 것처럼 존재나 생존을 위함이 아닙니다. 언약을 위함입니다. 사람이란 우선적으로 자기 살 궁리부터 먼저 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버릇은 타고난 겁니다.
이점에 있어서는 야곱도 예외가 아닙니다. 야곱 본인도 하나님의 계시나 언약이 주어졌을 때, 그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언약이요 계시인 줄 알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목숨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연히 챙길 수 있는 것이고 덤으로 부자되고 자식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막상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얍복강에서 만나고 난 뒤, 그는 자신의 목숨은 살 가치도 없는 목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야곱은 비로소 제대로 ‘축복’의 의미를 알면서 ‘축복’해 달라고 사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언약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식의 축복이 아님을 말해주는 겁니다.
진정한 축복이란 ‘하나님 앞에서도 살 수 있음’이며 그 근거는 결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바로 이 야곱 언약에 근거를 두고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단지 야곱의 언약만 있었고 나라는 실제하지 않던 그 시절, 야곱의 혈통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었습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보내어 ‘야곱의 나라’를 만드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야곱의 나라에 편입될 자들이 전혀 하나님의 뜻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출애굽기 5:20-23에 보면,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애굽 나라의 히브리인들은 나름대로 엉뚱한 구원자 여호와를 생각한 겁니다. 자신의 편익과 생각에서 구상해 낼 수 있는 그런 나라를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모세와 아론이 등장해서 일을 하는 것을 보니 더욱더 구원이 어렵게 진행되니 그들로서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철회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요소가 맨 처음 야곱의 언약 속의 요소로서 담겨 있었습니다. 전혀 인간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고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취지는 마지막 때에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솟구쳐 올라오게 하는데 취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성도는 이 언약을 성사시키는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들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참으로 사랑하시는 자는 인간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만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언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새언약을 이루는데 있어 예수님말고 다른 이들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또한 다른 그 어떤 인간도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정성을 드려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종말인 이 때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 그 어느 인간도 생존할 가치가 없음을 분명히 하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만들어지고 그 내부에는 언약궤가 가동되고 있습니다. 언약궤란 마치 원자핵발전소 내부와 같아서 방사능이 나오는 연료봉을 물이 보호해주므로서 주변 지역으로 무서운 방사능이 퍼지지 않게 막는 역할을 같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축복이나 구원 같은 것은 모두 죄가 되는데 그 죄의 본질은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이라는 생각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기 우선입니다. 궁극적으로 자기 밖에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우선 생존해야 그 다음 것들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기가 죽는다면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하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자비로 전환시켜주는 언약궤의 자비를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언약궤의 의미 자체를 위하여 이스라엘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보내시는데 그 왕은 곧 백성들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해서라도 섬겨야 될 분이라는 겁니다.
즉 나부터 챙기기 위한 다윗왕이 아니라 다윗왕이 이루어내시는 그 새언약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그런 성도가 마지막 때에 등장하는 겁니다. 이들은 자기를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 자기 목숨도 버릴 즐거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들이 존재하는 그곳이 바로 새언약 사건이 솟구쳐 올라오는 현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섬길 생각을 말게 하옵소서. 내 것을 따로 갖게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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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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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18 11:41 |
102강-렘30장7-10(다윗 왕을 섬기리라)-jer11031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30장 7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99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30:7-10
“슬프다 그 날이여 비할 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꺽어버리며 네 줄을 끊으리니 이방인이 다시는 너를 부리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고 네 자손을 포로 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라 너를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오늘 본문에 보면 중요한 두 인물이 나오지요. 한 사람은 ‘야곱의 환난의 때’라고 해서 야곱이라는 인물이 나오고 그 뒤 9절에 보면 ‘왕 다윗’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야곱의 나라 이스라엘이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았더라면 ‘다윗이 오리라’ 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었을 텐데 ‘야곱의 환난’을 계기로 해서 다윗 왕이 강림하는 것을 봐서는 야곱의 나라, 곧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 야곱의 의미에 대해서 본인들이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야곱 뒤에 뭐가 붙느냐 하면, 야곱의 ‘환난’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야곱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인데 그 분의 나라가 환난을 당한다는 이것은 그 나라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것보다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듯이 야곱에서 열두 아들이 생기고 그 아들들이 모여 지파를 이루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될 때에 그 이스라엘 나라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그 이스라엘 나라도 얼마든지 환난 받을 수 있는 요소가 그 안에 내장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본인들이 몰랐지요. 우리가 예수의 피를 믿는다 하면 마치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이 그냥 받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예수를 진짜 믿게 된 그 순간부터 그 피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고난에 우리가 동참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처음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할 때는 마트에서 물건 고르듯이, 피가 있어야 구원된다 생각해서 자기 구원,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그래, 믿습니다.’라고 예수의 피를 생각하지만 성령이 와서 제대로 예수의 피를 알도록 하게 되면 ‘아하, 나 좋으라고 예수님 죽으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가치와 예수님 한 분의 의미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나를 예수님 쪽으로 끌어 당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채 예수를 믿는다든지, 이스라엘이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 채 여호와를 믿겠다고 나오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이 생각해 놓은 진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나라에 속하면서도 자기 이익을 생각하는 이스라엘과의 틈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내부에서 환난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실 때는 이스라엘을 그냥 살기 좋으라고, 생존하라고 만든 나라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피어나는 나라입니다. 언약이 피어나는 나라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동원된 것입니다. 사람이 원래 그렇잖아요. 항상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자기 좋은 쪽으로만 자꾸 생각하잖아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뭐 하나 솟구쳐 오르도록 하기 위해서, 뭔가 위를 향하여 만들기 위해서 나를 불렀다, 그 생각은 안하고 그저 우리끼리 어울리고 평화롭게 살면 그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고 생각들을 하지요.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잘 살았습니다.’ 그것은 땡! 틀린 소리예요.
‘하나님, 오늘도 저를 통해서 언약을 어떤 식으로 나타나게 하셨습니까?’ 이렇게 해야 되는데,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로 몸 건강해서 안 아프고 밥 잘 먹고 잘 지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환난을 자초하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이 집에서 아무 일없이 평안할 때 집에 와서 불 켜면 전구에 불이 오지요.
전기의 혜택을 입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일본사람들 가운데서 그 전기가 원자력발전의 어떤 구조로 인해서 전기가 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그냥 자기에게 전기 혜택이 오면 그것으로 오케이고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그 원자로 연료봉이 물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요. 물이 빠지니까 그 연료봉에서 전기가 안 나오고 갑자기 방사능이 나와 버렸어요.
그 방사능이 그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통과해서 자기의 모든 세포를 비정상으로 죽여 버리는 힘이 나온다는 사실을 몰랐지요. 그 연료봉을 둘러싸고 방사능을 보호하는 장치 같은 것이 바로 언약궤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방사능이 예수님의 희생양 피로 말미암아 잠겨 있으니까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 전체로 퍼지지 않는 겁니다.
대신 뭐가 퍼지느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용서와 생산물, 먹을 것을 제공하는 혜택이 주어진 거예요. 일본 사람들이 가만있어도 전기를 공급 받으니까 저절로 생기는 줄 알지만 막상 지진이 일어나서 원자력 발전소에 문제가 생기니까 평소 원자력 발전소에 관심도 없고 상식도 없는 사람이 방송에 그 문제가 연일 나오니까 그때서야 일반사람들도 원자로가 어떻게 되었기에 방사능이 유출되었느냐, 하고 관심을 가지는 거예요.
야곱이 환난을 받아야 그 동안 우리가 받았던 은혜와 사랑과 용서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어서 우리에게 주어졌느냐, 비로소 거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겁니다. 9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일으킬 너희 왕 다윗을 섬기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본문에 야곱이라는 사람과 다윗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 야곱과 다윗 중간에 있는 그 여정을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야곱에 대해서 그토록 무지했으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야곱의 나라 이스라엘에 환난을 일으키기까지 하면서 결국은 다윗 왕을 따로 보내셔야 되는가, 그 과정을 봐야 되는 거예요. 이런 과정을 우리가 모르게 되면 항상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과 편한 것만 생각하면서 그저 ‘하나님, 고맙습니다. 편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다가 좀 불편하면 ‘하나님, 뭐가 잘못되었기에 이렇게 불편합니까?’ 하고 하는 식으로 자기 이익을 우선해서 뭘 해도, 헌금을 해도 항상 자기중심으로 머물고 마는 거예요.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다 이루었다.’ 할 때 그 다 이룬 것이 뭐냐, 새 언약을 다 이룬 겁니다. 그 새 언약이란 것은 사람들이 어떤 율법을 지킨다든지, 윤리도덕적인 어떤 행위를 한다든지 해서 새 언약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새 언약은 우리들, 인간들을 상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은 오직 예수님하고 하나님, 성부와 성자사이에서만 새 언약이 만들어져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새 언약 만들 때 가담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그 질은 다 떨어졌다, 하나님의 새 언약을 이룰만한 자격자가 못된다고 판정이 난 이후에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다 이루신 겁니다. 그것을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하면, 여러분이 다 아시는데, 그것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라, 이렇게 되지요. 그렇다면 마지막 때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언약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예수님 자리에 어느 인간도 들어설 수 없다는 사실이 다 드러나고 그것이 완전히 온 천지에 알려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기에 어떤 인간도 사람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 확정이 된 상태가 바로 종말입니다.
그래서 종말에 새 언약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한다는 말은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두 번 다시 그 사람의 행함이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그 사람의 어떤 태도 등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 확정된 상태임을 알려주는 것이 종말의 시대의 특징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자기 가치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혹은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살아보겠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모든 것이 일체 새 언약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겁니다. 새 언약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써도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저주와 진노밖에 없습니다.
시편 90편에 보면 ‘우리 한평생이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지나갔다.’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일본 사람들은 그 동안 수십 년 동안 방사능을 내뿜는 연료봉을 감싸서 방사능 유출을 막는 그 물 덕분에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그 물을 빼버리면 그들은 수십 년 동안 방사능과 더불어서 살아온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살아온 거예요.
예를 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평생토록 살아온 거예요. 그 평생을 순식간처럼 살아온 겁니다. 시편 7편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매일같이 분노한다.’고 되어 있어요. 매일같이 분노하는데 왜 하나님의 그 저주와 분노가 우리에게 도달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나라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매일같이 분노하지만 그 매일의 분노를 삭이는 장치가 이스라엘 내부에 장착되어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사랑으로 전환시켜서 장착하는 그 요소를 위하여 누가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느냐, 바로 야곱이 이 땅에 태어나야만 했었던 겁니다. 창세기 25장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그리고 형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이삭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나중에 야곱언약이라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야곱이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역사가 전개가 되는데 그 하나님의 준비된 야곱의 역사는 곧 무엇을 보여주느냐, 이 인간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것을 스스로 하나님 쪽에서 삭여주시고 사랑으로 전환시키고 용서해주시는 그 장치가 같이 붙어서 나가는 요소가 들어있는 역사가 전개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뭐가 중요하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그 장치가 중요한 거예요.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용서받고 은혜 받는 이것은 안중요합니다. 쉽게 말해서 야곱 안에 있는 언약이 중요하지 야곱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중요하다 그 말이죠. 아브라함이 안중요해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생산될 그 아브라함의 의, 하나님의 약속된 의가 더 중요한 겁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원자력 발전소를 세웠다면 하나님의 관심은 원자력 발전소에 있지 그 혜택 받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은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난 그것을 가지고 종말이라, 마지막 때라 합니다. 마지막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내 기뻐하는 자라.’ 한 분 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언제나 오직 예수님만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만약 섭섭하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내서 ‘네가 나한테 한 게 뭐가 있나?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왜 섭섭하게 생각하나, 네가 한게 뭐가 있는데?’ ‘제가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것도 지킨 거냐? 그것도 지킨 거야? 그것 지켜서 네가 내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인가? 그런 식으로 말씀 지켜서 내 진노가 피해지는가?’ ‘그러면 잘 지키겠습니다.’ ‘잘 지킨다고 해서 네가 내 진노 앞에 설 수가 있느냐?’ 그 말이죠.
반듯하게 살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성심성의껏 하겠습니다, 뜻을 다해 마음 다해 목숨 다해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목숨 바쳐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만족스러운 하나님의 의가 되느냐 그 말이지요. 도리어 ‘말씀을 우리가 지키겠나이다.’ 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관심 두는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계속해서 ‘내가 뭘 할 수 있다.’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계속 고수하려는 교만의 죄가 들통날 뿐인 겁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생긴 열두 지파의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원래는 그냥 하나님의 언약만 있고 구체적인 나라는 없어요. 나라를 만들려면 언약을 집어넣어야 됩니다. 언약을 집어넣으면 거기서 나라가 생기는데 처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집어넣는 그 시점에서 구원받아야 될 이 히브리인들이 언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던 대목이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5장에 그것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애굽에 모세와 아론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인줄 알았지요. 자기들이 이렇게 힘든 노예생활을 하니까 구원자가 와서 자기 형편이 좀 나아질까 싶었는데 모세와 아론이 애굽이 권력자 바로를 만나고 난 뒤에 사태가 더 악화되어 버렸어요.
바로왕이 화가 나서 전보다 더 심하게 ‘히브리인들을 족쳐라.’ 해서 사는 형편이 모세와 아론이 오기 전보다 더 심해지고 말았어요. 그러면 히브리인들이 끝까지 믿었습니까, 아니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까? 5장 20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그들에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히브리인들이 누굴 들먹이느냐하면, 여호와를 들먹이면서 또 여호와께서 친히 보낸 자를 들먹이면서 지금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격을 시도하고 있는 거예요.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는다.’라는 식이라는 말이지요. 마치 사도바울보고 고린도 교회가 이단이라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점을 이해를 해야 돼요.
‘아, 그들은 너무 철이 없다.’ 이렇게 매도하지 말고요. 현재 우리가 지금 조작해서 믿는 예수, 진짜 예수가 아니고 내 포부에 의해서 목각같이 다듬어진, 내 편리에 의해서 내 형편 좋으라고 만들어낸 예수를 섬기지 않는지를 우리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2절에 “모세가 여호와께서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점점 더 구원되기기 힘들게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중요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현재 구원받고자 했던 그들이, 여호와께 기도했던 그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하나님, 이러면 구원이 안 됩니다. 더 힘듭니다. 구원이 어렵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바로 그것이 진짜 하나님이 진짜 구원자를 보냈기에 생겨버린 야곱의 환난 같은 겁니다.
왜냐하면 야곱 본인도 그랬어요. 야곱 본인도 재산이 늘어나고 자식이 많으면 자기에게 준 축복인줄 알았어요. 왜, 자기 목숨은 그냥 기본으로 챙기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 줄 때 내 목숨은 건전하다고 보고 건전한 목숨을 구원했으니 이제 구원에 합당한 재산이 늘어나고 자식이 늘어나서 남들 보기에 복 받았다 하는 것, 그것을 가지고 축복을 받았다는 그것을 이미지로 스스로 구성을 해놓았어요.
막상 밤에 하나님을 직접 만나니까 지금 재산이나 자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인 것을 폭로당하는 것, 이게 바로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언약을 주시면서 이미 야곱의 인간적인 요소가 야곱 언약 속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그것을 야곱언약 이후의 이스라엘 속에서 줄줄이 다 풀어져 나오는 겁니다.
야곱이 했던 그 오해가 야곱의 나라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계속해서 더욱더 넓혀지고 깊어지고 확산되고 확대되어 가는 겁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 할 때 사람들은 일단 자기자신의 목숨은 챙기고 하나님을 알았으니까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 구원은 구원대로 챙기고 거기에 착한 일을 하고 말씀대로 살면 복 주신다, 라는 식의 조작된 엉터리 같은 예수, 그 하나님, 그 삼위일체를 딱 쥐고 있던 거예요.
바로 그런 것들이 나중에 이스라엘나라가 되면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그 나라를 내 것이라고 하고, 나의 것, 나의 구원, 나의 소유된 이스라엘로 그들은 오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 이스라엘은 내 것이야. 나의 구원은 내거야. 나의 하나님도 내거야.’ 하여튼 나라는 것이 죽지를 않았어요. 이 사람들이 방사능 맛을 못 봐서 그래요.
하나님의 언약을 솟구쳐 올라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시켜 놓았건만 그들은 기어이 자기 것을 포기 못하고 자기 것을 더 살찌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것처럼 주객이 거꾸로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문제점이 뭐냐, 성경 모든 말씀을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는 이 구원론으로 다 종결시켜요.
구원론이 아닌데, 십자가 새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마지막 때의 우리에게 복음이 왔건만 그 의미도 하나도 모르고 어쨌든지 간에 내 구원만 받으면 나는 땡이다, 자기구원은 챙겼다는 거예요. ‘나는 부처 믿어서 구원 안 받았어.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어. 그걸로 땡이다. 끝났어. 이제부터 성경대로 살면 복이 더 올걸. 사업 잘되고 애들 잘되고 주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게들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종말의 의미, 어떤 인간도 복 받을 자격 없고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이 종말의 현상, 예수님만 사랑한다는 이 마지막 현상을, 그런 눈으로 전혀 성경을 볼줄 모르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 언약을 위해서,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같이 솟구쳐 올라와서, 새 언약을 위하는 들러리의 존재에 불과해요.
적어도 어느 정도 되어야 성령 받았다 할 수 있느냐하면, 뭔가 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명분을 새 언약에서 발견했을 때 그때 그 사람은 성령 받았다, 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고 ‘아, 이 목숨마저 가져다 바칠 확실한 사건 없나?……이 진리를 알았으면 네 목숨 가져다 바쳐도 오히려 너한테 영광이야. 거기에 목숨 바친다는 그 자체가 너는 땡잡은 거야.’ 할 확실한 진리, 그것은 바로 이 마지막 때는, 십자가 새 언약에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것뿐입니다.
다른 것은 없어요. 이런 복음을 전하니까 자식부터 먼저 챙기고 복음은 뒷전이고, 이런 복음을 전하니까 교회부터 먼저 챙기고 언약은 뒷전이고……, 우리는 매일같이 주께서 분노하기 때문에 매일같이 분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밥 먹고 이렇게 사는 것은 주께서 그 분노를 잠재워주고 전환시키는 어떤 분이 있기에 그러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효과에요. 그렇다면 십자가가 결정되어 버리면 우리는 내가 살려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방사능)를 온몸에 옴팍 덮어 쓰는 것이 돼요.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굴 믿느냐 하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버린 몸이에요. 백년을 살아도 죽은 몸이고 두 시간을 살아도 죽은 몸이에요.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우리 목숨도 아깝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진리,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주께서 시간적인 여유를 제공하신 겁니다.
‘나의 것, 나의 구원, 여기까지는 내 것입니다. 하나님도 손대지 마세요. 이것은 내 자식입니다. 하나님도 손대지 마세요. 이것은 내 교회니까 손대지 마세요.’ 이스라엘이 이것을 주장할 때 하나님께서는 ‘얘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구나.’ 하고 완전히 그 야곱, 이스라엘을 폭파시켜 버리지요. 완전히 원자로가 폭파되듯이, 수소폭발이 일어나서 이제는 떠나고 피할 수밖에 없어요.
‘누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가리우랴.’ 요한 계시록에 나오거든요. 땅에서 솟아난 방사능은 반경 50킬로 밖으로 피하면 되지만 하늘에서 방사능을 쏴버리면 피할 구석이 없어요. 왜, 마지막 때니까. 마지막 때는 마지막답게 끝나야 돼요. 음악 피날레 하고 끝나잖아요. 마지막 때는 어느 장소에 가든지 간에 우리가 살 장소, 살 기회는 없습니다.
끝나버렸어요. 우리가 아프리카 간다고 더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 간다고 더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어디 가든지 간에 다윗 왕이 오시면, 다윗 왕을 섬기면 그게 미국이 되었든 아프리카가 되었든 일본이 되었든, 원자로 바로 옆에 있든, 거기서 언약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이 바로 우리와 산화되어서 불꽃을 피우게 되면 그 불꽃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그림자 같은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지금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로 바뀌었는데 그런 혜택을 입은 사람은 나중에 죽어서도 계속되어서 천국 가서도 주님의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어서 살 수 있는 겁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이처럼 내가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섬길 분만 만나고 그분이 했던 그 새 언약을 위하여 도리어 우리가 주님 섬기는 그 즐거움과 그 기쁨에 자기목숨마저 신경 안 쓸 정도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준 감격이고 축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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