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왔던 그 불쌍한 사람은 병들어 있었다.
누가는 그를 문둥병으로 뒤덮여 있는 사람으로 설명한다.
문둥병은 귀와 눈과 코에 극심한 감각의 마비를 가져온다.
최근 의학 연구에 의하면 문둥병으로 피부가 문드러지는 것은 그 육체의 감각체계가 파괴되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 병은 고통 없는 지옥으로 불려진다.
본문에 나타나는 불쌍한 사람은 오랫동안 느낄 수 없었으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그 육체는 불결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레위기 13:45-46에는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고 하였다.
우리는 문둥병자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하며 소외되는가를 거의 상상할 수조차 없다.
문둥병자는 사회에서 완전히 배척 받았다.
그 당시 사람들은 문둥병이 크게 전염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둥병자는 일반인이 사는 지역에 들어오면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만 했다.
그럴 때 그 문둥병자는 얼마나 자신이 무가치하고 멸시 받는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되겠는가?
문둥병자들은 전형적인 거지들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탱할 어떤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 시대의 랍비적 가르침은 더 문제를 악화시켰다.
문둥병자가 어느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면 그 집은 부정하다고 선포되었다.
문둥병자에게 인사하는 것도 불법이었다.
문둥병자는 사람들로부터 적어도 100규빗 정도의 거리를 떨어져있어야 했다.
문둥병자들은 죽은 자처럼 취급되었다.
무엇보다도 문둥병은 어떤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서 미리암, 게하시 그리고 웃시야 왕과 같은 사람들이 문둥병으로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잘못된 이해에도 불구하고 문둥병자들의 고통은 죄의 결과를 예증해 주었다.
문둥병자가 동료 유대인들보다 더 죄가 많고 더 나쁜 사람이 아니었지만 문둥병은 영적으로 타락한 것이 외부에 보이는 것이라 간주되어 죄를 비유하는 것이었다.
문둥병자는 그리스도의 깨끗케 하시는 사역에서 떠난 인간을 육적으로 예증하는 것이다.
죄는 우리 모든 것에 침범했다.
죄의 문둥병은 우리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뒤덮여 우리는 전적으로 부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진 상태며 그 상태 안에 인간은 자연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영적으로 그리스도 없는 인간은 죽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난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문둥병자들이 마치 걸어가는 죽은 사람들인 것처럼 예수님 없는 인간은 그와 같다.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8:1-4절에는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하신 후 산에서 내려오실 때 그 문둥병자를 만났다고 하였다.
의심 없이 그곳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하다 부정하다”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마치 보트가 앞으로 나갈 때 물결이 갈라지는 것처럼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 사람들은 자신에게 임할 오염을 두려워하여 물결처럼 물러서고 그는 앞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 “당신은 나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로 오는데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자질을 볼 수 있다.
그 불쌍한 사람은 자기가 부정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가 부정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아무 희망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를 도와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은 그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축복 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부정한 자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불쌍한 사람이 계속해서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는 것은 그 문둥병자의 전 영혼을 나타내었다.
그는 실로 거지였다.
그는 자신 안에 하나님께로 용납될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을 진실하게 믿었다.
그와 같이 그는 은혜 받을 완전한 자세에 서 있었다.
자신이 하나님께 부탁할 아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여 자기 만족에 도취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결코 오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마음이 비어 자신의 영적 상태를 깊이 슬퍼하는 사람에게 다가 오신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온다면 이 길은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로 “부분적으로만 부정하다”라거나 “나는 25% 부정하다”라거나 “10% 부정하다”라고 말한다면 결코 하나님은 우리에게로 오시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가장 큰 비극이다.
이것은 왜 복음이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적대적인가의 이유다.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보았을 때 땅에 자기의 얼굴을 엎드렸다.
마태는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끓었다고 하였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 이 말은 입맞추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그 당시 신에게 드리는 경배의 표시였다.
그 천한 문둥병자는 예수님 앞에 경배의 자세로 전 영혼을 내려 놓았다.
그는 자신을 고쳐줄 유일한 분이신 그리스도께 예배하며 복종하였다.
그리스도의 치유하시는 접촉은 결코 지적인 반응으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인식으로 그 분께 머리를 숙이고 경배드릴 때만이 온다.
그리스도의 치유하시는 접촉을 얻는데 필요한 세번째 요인은 신앙이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장 40절은 그가 되풀이해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심 없이 그는 예수님의 이적적인 능력에 대해 들어왔고 그날에 예수께로 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문둥병자가 “당신은 나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아마도 신학적 이해를 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예수님이 그를 깨끗케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희망이 없으며 감각 없이 썩어 문드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알아차리고 그리스도만이 자기를 깨끗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을 때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셨다.
마가복음 1:41에는 그리스도께서 민망히 여기셨다고 하였다.
그 때 예수님은 누가복음 5:13에 있는 대로 그 손을 뻗쳐 그 사람을 만졌다.
아마도 20-30년의 세월 동안 그 문둥병자를 만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자녀들도 아내도 그를 만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 문둥병자를 피해 갔지만 그리스도는 그를 만져 주셨다.
주위 모든 사람은 충격을 받았다.
예수님은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되었지만 문둥병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그 문둥병자가 주님의 사랑을 느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 만지심은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를 이해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씀의 표현이었다.
나아가 여기에는 더 큰 신학적 이유가 있다.
썩어져 가는 문둥병자의 피부에 그리스도의 순수한 손이 접촉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 우리를 위해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에게 순수함을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을 붙드시고 우리를 만지시고 우리를 고치셨다.
예수님이 허리를 구부려 그 불쌍한 문둥병자를 보시고 거룩한 손을 썩어져 가는 육체 위에 얹으시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셨던 것을 보게 된다.
누가는 5:13에서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고 하였다.
그 치유는 갑작스럽고 완전한 것이었다.
그 사람의 발은 갑자기 완전하게 되었고 그 사람의 손과 손가락도 이전처럼 깨끗하게 회복되었다.
그의 머리와 눈썹도 다시 생겼고 그의 피부는 곱고 부드럽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개인을 위해 행하실 수 있는 일이다.
죄에서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치유는 즉각적이고 완전하다.
14절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하셨더니”라고 하였다.
왜 예수님은 이 명령을 하셨을까?
아마 실제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고쳐 주셨다는 소문을 들은 제사장이 그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승인해 주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치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분은 인간의 영혼의 문둥병을 고치셔서 죄의 용서를 주셨고 새 생명을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