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휴가 & 연극 <햄릿>
1. <82혁사> 세미나를 마치고 후반기 <역사적 예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 피로도 풀고 재충전을 위해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지방으로 떠나는 것은 여로모로 부담이 커서 서울 도심을 휴가 장소로 잡았다. 명동역 9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스카이파크 명동 3호점’을 숙박 장소를 선정했다. 인터넷 숙박 사이트에서 찾은 가성비가 좋은 숙소였다.
2. 오후 3시 체크인을 마치고 숙소에서 <역사적 예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한 계획을 점검했다. 원래는 한 권의 책이든가, 아니면 학위논문 성격으로 완성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대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주제에 맞춰 몇 개의 소논문으로 ‘역사적 예수’의 핵심적인 윤리적 지향점을 정리하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올해에는 ‘예수’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하고 싶다. 결코 깊이있는 연구도, 새로운 이해에도 도달하지 못했지만 예수를 벗어나 다른 인물들의 연구를 통해 근본적인 주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포괄적인 탐색을 다양한 방식으로 지속해야 할 것이다.
3. 오후 5시 쯤 숙소에서 나와 호텔 옆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었다. 다음 오늘의 메인 행사인 연극 관람을 위해 국립극장으로 이동했다. <동대문 역사공원 역>에서 국립극장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임을 다시 실감한다. 여름의 태양이 온 몸을 땀에 절게 하였다. 이번 연극 <햄릿>은 연극계의 대표적인 원로, 중견 배우들의 출연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공연이다.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전무송, 권성덕, 유인촌, 박정자, 손숙, 정동환, 윤석화, 김성녀, 손봉숙 등이 배역의 크기와 관계없이 열연을 펼친 무대라는 것이다. 도심 휴가를 준비하다 우연하게 떠오른 생각이 당일 예매를 시도했고 맨 뒤쪽 자리가 남아있어 예약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보게 되었다.
4. 연극은 약 3시간의 긴 공연이었다. 세익스피어의 원작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햄릿>은 기본적으로 세익스피어의 핵심적인 대사와 아이디어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햄릿>은 부왕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한 삼촌과 자신의 어머니가 재혼한 가운데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과 만나 죽음의 실체를 알게 된 후 겪게 되는 분노와 고뇌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복수의 과정이 그려지는 작품이다. 그동안 희곡을 통해 이 작품이 햄릿이 겪게 되는 진실과 고통 그리고 복수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인식하였지만, 이번 공연을 통해서는 햄릿과 삼촌 ‘클로디오스’의 대립적인 갈등과 대결이 초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 그것은 어쩌면 클로디오스를 맡은 유인촌의 강렬한 연기에 힘입은 듯싶다. 과거 햄릿의 대명사라 할 정도로 오랫동안 햄릿역으로 열연했던 유인촌은 70이 넘어 햄릿의 대립자로 등장한 것이다. 사건의 모든 원인이자, 비극을 이끌어가는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클로디오스는 전형적인 권력과 욕망의 상징이다. 형을 죽이고, 형수를 아내로 삼고, 의심을 하는 햄릿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략을 꾸미는 클로디오스는 햄릿의 복수 행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인물인 것이다. 이번 작품은 유인촌의 매력적인 연기를 통해 클로디오스의 중요성과 의미를 적절하게 부각시켜 줌으로써 <햄릿>의 중심 구도가 햄릿과 클로디오스의 강렬한 충돌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6. 반면 햄릿을 맡은 강필석은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정확한 발성과 무리하지 않은 연기, 그리고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간 햄릿의 고뇌와 분노는 햄릿의 역할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그럼에도 배우가 지녀야할 치명적인 것, 즉 특별한 개성이 눈에 띄지 않은 것이 아쉬었다. 연극배우의 가장 기본인 발성이 좋은 것은 칭찬하고 싶다. 그럼에도 새로운 배우에게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좀 더 고통스러워하고 좀 더 스스로 무너지는 햄릿의 슬픔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쉬었다. ‘매력적인 슬픔’, 이 얼마나 형용모순적인 언어인가? 그럼에도 햄릿에게서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다. 모든 것이 끝나고 모두가 죽었을 때, 진한 허무와 고통이 휘몰아칠 때도 그 모든 것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힘이 필요하다. 햄릿은 그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
7. <햄릿>은 죽은 자가 무대에서 일어나 무대 뒤쪽으로 가 각자의 위치에 서 있는 것으로 끝이 난다. 복수의 끝은 결국 허무의 확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인간들은 복수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행복할 수 없다면, 타인도 행복해서는 안 된다. 정의가 실현되지 못할지라도, 불의가 지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복수를 정당화시키는 핵심적인 생각일 것이다. 악의 근원이 절대적인 권력과 관계있을 때, 비극은 필연적이다. 수많은 파괴와 죽음으로도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폐허만을 남길 뿐이다. 비극의 공허 속에서 어떤 해결책도 전달하지 못하는 무대 위의 침묵은 인간의 어리석음만을 경고한다. 지금도 끊임없이 지속되는 파괴와 공격 그리고 그것의 결과인 죽음과 폐허를.
첫댓글 - 진한 허무와 고통이 휘몰아칠 때도 그 모든 것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