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까페에 회원 가입할 때 사용하신 닉네임인 eden에 따라서 eden님이라고만 불렀었는데, 이번 질문을 받으면서 비로소 님이 교회에서 봉사하여 섬김의 일을 하고 있는 장로의 직분을 맡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에 장로님으로 호칭하겠습니다.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로'를 들어서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질문하셨습니다.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은 장로님께서 소개해 주신 감리교 헌법에는
제3편 조직과 행정 제5절 장로
(제19조) 장로의 직무
1) 장로는 담임자를 도와 예배, 성례, 기타 행정을 보좌한다.
2) 담임자를 도와서 교회 임원들의 활동을 지도한다.
3) - 8)항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도와, '도와서'란 표현은 목사와 장로의 관계가 협력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로 목사의 지침을 따라서 목사가 하는 일을 도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분명 그렇게 여겨집니다. 그것은 그 뒤에 따라 오고 있는 '∼을 보좌한다', '∼을 지도한다'라고 장로가 하는 직무의 역할을 말하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 헌법에서는 장로직의 기원을 "율법 시대에 교회를 관리하는 장로가 있음과 같이 복음 시대에도 목사와 협력하여 교회를 치리하는 자를 세웠으니 곧 치리 장로이다"(정치, 제9장 치리장로 제1조)라고 '목사와 협력하는 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고, 장로의 권한에서도 "강도와 교훈은 그의 전무 책임은 아니나, 각 치리회에서는 목사와 같은 권한으로 각항 사무를 처리한다"(제2조)라고 하여서 '목사와 같은 권한'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로는 "목사와 협동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장한다"(제4조)라고 하여서 목사와 장로의 관계를 수직적 관계로서가 아닌 협력적 관계로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장로직이 목사직과는 그 기능에서 구별되는 독립적 직분이나 상호 협력적 관계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집사직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집사직을 "목사와 장로직과 구별되는 직분이니"(정치, 제10장 집사 제1조) "집사의 직무는 목사 장로와 합력(合力)하여"(제3조)라고 집사가 목사와 장로와 갖는 관계에서의 역할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장로(또는 집사)가 목사와 갖는 관계를 이렇게 상호 협력적 관계로서의 '돕는 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장로교 헌법에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봉사하여 섬김의 위치에 있는 관계가 갖는 개념과 그에 대한 이해를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리교이든 장로교이든 여타의 교단이든 목사와 장로와 또한 집사를 각각 돕는 자라고 말하는 것은 '돕는 자'를 말씀해 주고 있는 창세기 2장 18절의 '돕는 배필'에 근거하고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말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돕는 배필'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인지 이것이 지닌 뜻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생육하고 번성하고 온 땅에 충만하는 생명력을 가져 나가고 그들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게 하기 위하여서 남자인 사람에게 그를 돕는 배필인 여자인 사람을 주셔서 그 둘이 한몸을 이루어 살아가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즉 남자의 돕는 배필인 여자를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자의 창조는 먼저 그와 한몸(하나된 몸)이 될 남자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남자와 여자를 불평등하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응(相應)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남자의 배필(짝)로 지으실 때, 남자보다 열등하거나 덜 필요한 존재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기신 '다스리는 일'을 함께 협력하여 수행해 나갈 수 있는 동등하고 필요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돕는 배필'이라는 말의 본 뜻은, 단순히 조력자(助力者), 조수자(助手者)를 뜻하는 것으로서의 내조자나 보조자가 아니라, '그[남자]와 상응하는 돕는 자'입니다. 성경 원어에서 '돕는'은 「돕는 자」를, 그리고 '배필'은 「그와 상응하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의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은 여자는 남자와 상응하는 동등한 신분과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남자와 대등한 관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돕는'이라는 말에는 신분이나 수준 또는 가치의 낮음을 시사하는 개념이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돕는 자란 도울 자의 곁에서 이것저것 거드는 조수(助手)의 역할을 하는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를 '돕는 자'이라고 표현할 수 있듯이(참조; 시 10:14, 30:10, 33:20, 54:4), 능히 도울 '능력을 가진 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에 아담은 자신의 짝을 만나자 마자, 과연 자신과 상응하는 존재임을 파악하고 매우 흡족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을 짓겠다고 말씀하신 후 곧바로 여자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을 지어서 아담에게로 나아오게 하시기 전에 먼저 각종 들짐승과 새를 지으셔서 아담에게로 이끌어 나셨습니다. 그것은 돕는 배필을 짓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있어서 그것부터 처리하시려 했거나 여자를 지을 계획을 잠시 잊거나 또는 보류해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왜 그와 같이 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먼저 들짐승과 새들을 통해서 '돕는 배필'에 대한 합당한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창 2:19-20). 이는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온갖 들짐승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갖가지 날짐승을 빚으시고 사람에게 데려다 주시고는 어떻게 이름을 짓나 두고 보셨다. 그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갖가지 짐승에게 이름 붙이는 대로 그 짐승의 이름이 되었다. 사람은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짝이 없었다"(현대어 성경)는 것입니다. 아담은 각종 들짐승과 새들의 이름을 짓는 것에서 짝을 이루고 있는 그 모두에게서 또한 자신에게도 돕는 배필이 있어야 하는 필요성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동물의 본성적인 특성을 보게 되고 또한 자신에게 합당한 돕는 배필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담에게는 돕는 배필이 있어야 합니다만 없었기에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돕는 배필인 여자를 지으셔서 그와 함께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깊이 잠들자 그의 갈비뼈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뽑아 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런 후에 그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로 나아오게 하신 여자를 보고서 비로소 매우 만족해 합니다. 그것은 '자기와 상응하는 돕는 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동물에게서도 자기와 상응하는 자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동물들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피조물인 까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담은 이제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인 여자에게서 돕는 배필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이제야, 또는 이번에야말로)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23절)고 말한 것은 존재 목적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 자신과 동등한, 곧 상응한 자를 본 데 대한 표현입니다. 그러기에 남자는 여자를 자신과 '한몸'(하나된 몸)으로 규정합니다.
사람, 곧 남자와 여자의 존재가 이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혼인함에 있어서 자신들을 향하여 품고 계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생각하고 염두에 두고서 한몸을 이룸으로써 남자와 여자의 능력을 발휘하고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님 나라로서의 성격인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의 형상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나가야 합니다. 사람인 남자와 여자, 이 한몸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서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와 같이 말입니다. 남자에게 여자를 돕는 배필로 주신 원리는, 교회에서도 동일한 원리로 작용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봉사하여 섬김의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보내셔서 그와 하나된 몸을 이루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렇게 머리와 몸이 하나된 몸을 이룬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말이죠. 우리는, 곧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각 지체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몸이라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몸이며,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각 지체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각 지체된 우리이기에 그 지체간의 관계는 서로 상응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상응하는 자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가령 눈이 코보다 높지 못하며, 코가 입보다 높지 못하며, 손이 발보다 높지 못합니다. 오히려 어떤 관계인가 하면 오른 쪽 눈과 왼쪽 눈의 관계이며 오른 쪽 콧구멍과 왼쪽 콧구멍의 관계이며 오른쪽 어금니와 왼쪽 어금니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는 눈과 코와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며, 또한 코와 입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며, 손과 발의 관계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의 각 지체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각 지체는 성령 안에서 출생하여 한분의 믿음을 받은 한 지체입니다. 여기에 지체란 이들의 머리가 되신 한 분 곧, 그리스도의 지시와 명령을 받는 자란 뜻입니다. 머리가 되신 분 말고 지체에서 다른 누군가가 지시하고 명령하는 자로 등장하지를 않습니다. 지체간에는 그런 관계에 있지를 않습니다. 각 지체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서만 지시와 명령을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 지시와 명령은 언제나 진리를 따라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여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은 자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자는 온몸이 서로 어울려 각 지체는 각기 다른 지체를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온몸이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목사로 장로로 집사로 교회 직분을 맡기시는 것은 각 지체가 그 봉사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각각의 직분에 전무(專務)하게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능력으로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봉사의 일을 하는 자는 '주께서 자기 몸을 위하듯이' 그리고 '주께 하듯이' 하여야 합니다. 지체를 섬기는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은 온몸이 함께 어울려 서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신의 몸인 아내를 돌보아 살피고, 아내는 그리스도를 존중히 여기며 따르는 것처럼 남편에게 순종하고 진심으로 받들어 깊이 존경하는 원리는 교회 직분자 간에 봉사의 원리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사와 장로와 집사의 교회 직분자 간에서는 계급적 인식이나 차등적 신분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장로님께서는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로'를 들어서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질문하셨는데 이제 이에 대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에 대해서는 제가 이런 저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 내용에서 '도와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협력적 관계에서가 아닌 수직적 관계란 의도성을 다분히 띠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장로의 직무의 성격이기 때문에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가르치든 간에 규정하고 있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헌법에서 장로의 직무를 규정하고 있는데 장로는 자신이 맡은 직분을 성경에서 교회 직분이 갖는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고서 해나가야 하는 자세를 취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장로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교가 아무리 헌법에서 장로의 직무를 다른 직분들과의 관계에서 바르게 규정해 놓고 있을지라도 이를 과연 그렇게 해나가고 있는가 하는데 있어서는 사실 전혀 별개인 것처럼 다르게 해나가고 있는 실정이 현 장로교의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장로교에서 교회 직분자들과의 관계를 가져나가는 것을 보면 교회 헌법에서 정치에 규정하고 있는 장로의 직무에 설명하고 있는 관계에서가 아니라 목사는 군주로 군림하고 있고 장로와 집사는 목사의 지시와 명령을 받들어 가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장로와 집사간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인 형편입니다. 그러니 장로교 헌법에서 정치에 목사의 직무와 더불어 장로의 직무와 집사의 직무를 아무리 제대로 규정하여서 다룬다 할지라도 이것의 효력의 문제는 법과 규정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가는 우리의 믿음 문제입니다.
장로교, 감리교의 헌법을 다룰 것이 아닙니다. 장로교, 감리교가 설사 교회의 직분을 바르게, 또는 그릇되게 이해하고서 규정해 놓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어떻게 규정해 놓고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장로교의 헌법을 따르는 장로교로서, 그리고 감리교의 헌법을 따르는 감리교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각 개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서 말하고 또한 행하고자 하여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개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서 바른 정치 이해에 의해서 교회의 직분을 가르치고 직분자를 세운다고 할지라도 정작 직분자들이 각각 자신들이 맡은 직분을 올바르게 봉사하여 섬김의 일을 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한 그들의 문제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장로와 집사가 자신들이 맡은 교회의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하든 수행하지 않든지 간에 목사는 교회의 직분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는 사명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가 하면 교회가 교회 회의를 통해서 헌법을 어떤 이해 속에서 만들었든지 간에 그래서 오늘날의 목사가 장로와 집사를 어떤 것으로 말하며 가르치든지 간에 목사와 장로와 집사는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로서 이 직분이 가지는 직무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성경의 이해에 따른 바른 관점에서 자신들이 맡은 봉사의 일을 해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수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에서 직분자란 결국은 각각 모두가 제 할 일을 다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이 답글을 쓰면서 더욱더 갖게 됩니다. 결국은 이것 뿐이기에 말입니다.
부디, 장로님께서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장로가 갖는 봉사의 직무를 다하실 수 있기를 주께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