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 / 1950년 제작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1915년에 쓴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195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흑백영화이다.
한 부부가 산길을 지나간다. 여자는 말을 타고 남자는 말을 끌고 있다. 이 때 도적이 나타나 여자를 범한다. 그리고
남자는 죽는다. 라쇼몽 효과라는 말이 바로 이 영화에서 기원했다고 하니, 누가 범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자는 죽었으니, 무당이 대신 발언한다. 도적이 나타나 자신을 묶고 아내를 범했다. 도적은 그것으로 모자라 아내
한테 프로포즈를 하는데, 아내가 완전 좋아 콜~ 이라고 했다. 남자는 아내가 자신의 명예를 더렵혔다고 생각하여
자살한 것이다.
도적은 다르게 말하는데, 처음에는 여자를 범할 생각이 없었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 여자 냄새를 맡았다. 그럼에도
여자를 범할 생각이 없었는데 남자를 묶은 뒤 남자를 변호하는 여자를 보고 느닷없이 질투심이 생겼다. 그럼에도
범할 생각이 없었는데 단도를 들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여자의 격렬함에 반해 그만 범했다. 그리고 여자도 꽤 좋아
했다.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하니, 여자가 결투에서 이긴 사람을 따르겠다, 하여 아주 멋지게 결투를 했다. 남자도
잘했지만 자신이 워낙 출중하여 남자의 가슴에 장검을 꽂았다. 즉, 내가 살해했다.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도적은 자신을 범한 뒤 달아났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을 아주 기분 나쁘게 쳐다보았다. 내가
보기에도 되게 기분 나빴는데, 자막에서는 분노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분노라기 보다는 뭐랄까 되게 빈정거리는 비
열한 눈빛이라고 해야할까.. 너란 여자 내가 그럴 줄 알았지 하는 듯한..
여자는 말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남편을 단도로 살해한 후였다고.
그런데 여기 도적(도적은 수배중이었나 보았다..)을 고발한 사내가 있다. 이 사내는 남자, 여자, 도적의 말이 모두
틀리다며, 사람은 정말 무서운 존재라고 계속 중얼거리는데..
사내의 말은 이렇다. 도적과 남자는 멋지게 싸우지 않았다. 정말 찌질하게 싸웠다. 그것도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결투한 것이 아니라 서로 여자를 버리려다가 여자의 말, 남자는 남자다워야 진짜 남자지 같은 말에 걸려 들어 싸운
것인데 암튼 남자는 단도에 찔려 죽은 것이 아니라 도적의 장검에 찔려 죽었다.
그리하여 비를 피하기 위해 라쇼몽으로 뛰어 들어와 이미 라쇼몽에서 비를 긋고 있던 사내와 스님에게 이야기를 듣
던, 라쇼몽에 살던 도깨비들이 인간이 무서워서 도망간 줄 잘 알고 있는 남자가 버려진 아기의 포대기를 훔치려는
걸 말리는 사내에게 한 마디 한다.
- 착한 척 하지마. 너도 거짓말하고 있잖아. 여자의 단도는 꽤 값나가는 거였겠지? 그 단도를 훔친 게 당신아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원작에서 아기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하간, 같은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증언
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서라도 인물들은 꽤 심각해 보이는데, 이들을 위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명예
이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감독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형상을 '명예'에서
찾은 것이다. 인물들이 계속해서 인간이 무섭다고 하는 이유도 '명예'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이 거짓말을 할까, 싶은데 사람이니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인간의 형상을 만든 것이 인간이니 그 형상을
버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남편은 아내한테 살해당하거나 도적에게 살해당하는 것보다 할복했다고 하는 편이 명예롭고,
아내는 명예를 지키기위해 자결하지 못했으니, 명예를 비웃는 남편을 죽이는 것으로 명예를 지키고,
도적은 싸우지 않은 것보다 싸우는 쪽이 명예롭고, 찌질하게 싸운 것보다 멋지게 대결한 것이 명예롭다.
여자의 단도를 훔친 사내는, 살해현장을 숨어서 구경했고, 거기다가 단도까지 훔쳤다. 이 대단히 명예롭지 못한 행동
을 감출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진술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영화를 보고 나니, 인물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서술한 이 모든 위증들이 하나의 거대한 줄거리
를 이룬다는 것이다. 사건의 발생에는 어마어마한 잠재적 차원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잠재적 차원이 표면으로 드러
난 느낌이랄까.
한 부부가 산길을 지나가는데 도적이 마침 그 어귀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도적이 숲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마침 한 부부가 그 옆을 지나갔다.
이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라쇼몽에서는 인물의 수만큼 다채로운 줄거리를 펼쳐놓는다.
흑백영화라는 점, 흑과 백의 대조, 그리고 정지한 듯한 화면과 아주 빠르게 움직이는 화면, 인물들의 극과 극을
오가는 과장된 연기 등은 영화를 보는 또다른 재미이다.
(참, 이 영화를 추천한 사람이 잘못된 정보를 흘리는 바람에 나는 영화에 하나의 서사를 더 덧붙이게 됐는데..
그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단도는 스님이 가지고 있었지, 아마."
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