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가득한 반월성엔 유채꽃이 한창이다. 유채꽃 만큼이나 환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반월성 주위를 가득 메우는데, 반월성 사잇길로 내려와 계림으로 들어서면 2000년이나 지난 지금도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지금 우는 이 닭은 그때의 하얀 닭도 아니고 황금 상자도 없지만 버드나무 연두빛이 가득한 이 숲을 청량하게 물들인다.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은 사진 찍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다. 2000년 전에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관심이 없다. 선생님들조차도 그들의 환한 에너지에 압도되어 지도는 포기하고 지쳐서 의자에 앉아 쉬고 있다. 아이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오더니 돌다리 난간에 기대어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쉰다. 그 때 이곳에서 맹랑한 기지로 왕의 사위가 되었던 탈해의 얼굴도 저렇게 에너지가 넘치고 환했을까?
어느 봄날, 멀리 동북쪽에서 작은 배에 떠내려온 탈해는 다파라국의 왕자였다. 알로 태어난 탓에 아버지 함달파왕의 버림을 받고 궤짝에 넣어진 채 파도에 그 운명을 맞긴 것이다. 다행히 바닷가에 살던 아진의선의 도움을 받아 자라던 탈해는 토함산을 넘어서 서라벌 땅으로 왔다. 서라벌 땅에서 가장 살기가 좋은 곳을 찾던 탈해는 나즈막한 언덕 위의 넓은 땅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곳엔 이미 서라벌에서 왕의 큰 신임을 받고 있는 호공이 살고 있었다. 호공은 허리춤에 표주박 하나만 달랑 꿰어차고 동쪽 섬나라에서 건너 온 사람이었다. 탈해는 자신의 선조가 대장장이였다고 주장하고 그곳에 미리 묻어둔 숯돌과 숯더미를 찾아내어 증거를 삼았다. 그리하여 탈해는 그곳을 차지하고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는데, 이 소문이 왕의 귀에 들어가서 그는 지혜로운 자라는 칭호를 받고 남해왕의 맏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그 뒤, 탈해는 왕이 되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황금 궤짝에 담겨진 어린 아기 알지를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숲에서 발견했다. 역사는 반월성 아랫 숲에서 그 아기를 발견한 이도 호공이라고 하지만, 혁거세의 충신이었던 호공이 무슨 수로 그 때까지 살아있었을 것인가? 아마도 탈해의 맹랑함에 감탄하여 자신의 집에 살도록 배려 한 호공의 손자뻘 쯤 되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은 운명의 아기를 받아들인 탈해는 그를 양자로 삼아 왕자가 되게 하였다.
이런 일들이 이처럼 연두빛이 온 천지에 가득한 봄날에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반월성 아래엔 그들과 그들 후손의 잠자리로 가득 메워져 있다. 그들 후손의 잠자리인 봉긋한 봉우리에도 새 풀이 돋아나 지금 다시 살아오르는 듯하다. 봉우리는 마치 자그마한 산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산이 아니다. 또 그들은 그 속에 산과 마찬가지로 나무와 돌과 황금을 품고 있지만 그것들은 생겨난 그대로의 것은 아니다. 멀리 강가에서 주어온 돌이 가득 쌍여 있고, 그 아래엔 나무로 만든 큰 곽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곽 속에는 탈해와 알지의 후손들이 쓰던 술잔과 황금 그릇과 그리고 찬란한 황금관과 귀걸이, 팔찌, 허리띠 등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이다.
이 황금으로 된 물건들 때문에 한 때 이들의 잠자리는 파괴되고, 물건들은 호공이 건너온 바로 그 바다를 다시 건너 왜라고 불리던 땅으로 사라져 숨어 들어갔다. 반월성에서 북쪽을 향해 뻗어 나가던 이들의 잠자리는 지금은 노동동에서 멈추어 섰다. 사실은 훨씬 더 많은 고분의 봉우리가 있었겠지만 2000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 봉우리는 무너지고 깎여지고, 허물어져 갔다.
대릉원을 빠져나가 길을 건너 노동동으로 들어서면 80년 전, 바다를 건너온 이들이 저질러 놓은 일들을 보게 된다. 금관이 나왔던 금관총은 곽을 들어낸 채로 그대로 두어 봉우리 한 쪽만 언덕처럼 남아있다. 스웨덴의 왕자, 구스타프가 발굴했던 봉황장식이 달린 금관이 나온 서봉총은 무덤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광개토대왕의 명문이 나온 호우총은 동네 골목과 맞부딪쳐 비석이 없으면 그곳이 무덤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아직도 높은 봉우리가 그대로 남아있는 무덤들은 많이 있다. 또 봉우리가 깎여진 지하에도 많은 무덤들이 잠겨있을 것이다.
밝고 환한 봄날 오후, 나는 가장 높은 봉우리인 쌍 무덤 가운데에 난 작은 길을 따라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 꼭대기에 올라서니 멀리 서라벌 벌판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바로 눈높이에서 아슴히 보이는 언덕은 반월성이었다. 언덕 아래 나즈막히 숲이 둘러서 있고, 그 숲 아래엔 유채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리고 연두빛과 갈색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둥근 알들이 내 앞으로 소담스럽게 깔려 있었다.
나는 문득 2000년 전 그곳에 있었을 왕의 집을 상상해 보았다. 가장 나즈막한 벌판엔 노오란 유채화가 깔리고, 유채화 머리 위엔 연두빛 버드나무, 버드나무가 받드는 언덕 위에는 장엄한 붉은 빛이 어우러진 황금궁전이 공중의 누각처럼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