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 우리집에는 높이 약 소40cm 가량의 하얀 도자기로 조성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 그 관세음보살상은 어머니가 모셔놓은 것이었다. 그외에도 금색의 부처님상이 모셔져 있었으며, 뒤 벽면에는 관운장의 족자가 걸려 있었다. 즉 어머니는 당시에 관운장의 신명을 받은, 꽤 이름있는 무속인이었다. 이런 상황은 고교졸업 전까지 계속되었고 나의 성격형성 과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나 그때부터 관세음보살님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 하얀 도자기의 관세음보살상이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 알 길이 없으나 가끔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관세음보살님을 떠올리며 그리워 해보곤 한다.
우리나라 불자들은 대체로 관음신앙을 주로 하는것 같다. 때문에 <천수경>이 가장 많이 독송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보통 무슨 일이 있으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하듯이 우리에게는 관음신앙이 체질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저런 연유로 나도 자연스럽게 관음신앙에 젖어들게 되었다.
1974년 음력 정월 초하루, 아내와 함께 새벽 3시에 절을 향해 집을 나섰는데 눈이 쌓여 있었다. 찾아가는 절은 초행이라 길도 잘 모르고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에 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절을 향해 어림짐작으로 길을 잡았다. 신발에 새끼줄을 감고 눈덮힌 산길을 미끄러지고 엎어지면서 겨우 당도하였다. 아내는 어려서부터 친정 어머니를 따라 절에 오래 다녔기 때문에 절의 예절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초심자였으므로 아내를 따라 열심히 예불과 기도를 드렸다. 우리 부부는 처음 만날 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만났으므로 내 기도는 오직 먹고 사는데 곤란하지 않고 아내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게해 달라는 것이었다.
1978년 가을, 급성기관지염이 걸리더니 그것이 나을만 하니까 급성간염에 걸렸다. 병원에서는 무리하지 말고 우선 4주를 기본적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에 나는 수입이 변변치 않아서 병원에 다니지 않고 자가치료를 하기로 하고 조카가 매일 집으로 와서 주사를 놓아 주었다. 그러면서 직장에 다녔다. 그러나 근무중에 굉장히 피로를 느껴서 틈만 나면 소파에 누워 있었다. 건강이 무너지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짐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보다못한 아내가 동네인근 절에 기도를 가자고 하였다. 매일 2시간씩 3일간 아내와 함께 정성껏 기도를 하였다. 아주 간절히 다른 생각은 일체 끊고 병이 나아지기를 염원하였다. 기도중에는 피로한 것도 모르고 열심히 하였다. 3일 기도를 마치고는 주사맞기를 중단했다. 병이 나은듯한 느낌이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니 간기능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사에게 솔직히 기도 얘기를 해주었더니 매우 놀라워 하면서 완쾌를 기뻐해 주었다.
친척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 몇 년 성당에 다니더니 나를 만나면 천주교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곤 한다. 나도 천주교에 대해선 어는 정도 알고 있는 터였다. 어쨌거나 얼마후 나는 그 친척의 말 때문은 아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마음의 동요가 생겼다, 천주교로 종교를 바꾸어 볼까 하는. 그래서 아내에게 그냥 지나가는 말로 우리도 천주교로 개종하면 어떨까 했더니 아내는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내말을 묵살해 버렸다. 나도 그냥 잊고 며칠 후 절에 가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계단을 내려오다 발목을 삐게 되었다. 아내는 천주교 개종 운운 해서 그런거라며 나를 나무랐다. 나는 가슴이 섬뜩하여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거리며 겨우 산을 내려왔다. 그일을 겪은 후 나는 더욱 더 신심을 굳히겠다고 마음속으로 몇번이고 다짐을 하였다.
그후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노점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니 여름에는 더위에 지치고 겨울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거리질서 단속 때문에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당장 뾰족한 수가 없으니 하루 하루를 바쁘고 무의미하게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짜증은 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막연하게나마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꿈꾸고 있었다. 그 꿈의 정확한 실체는 없었다. 그저 현재와 같은 노점상의 상황에서 벗어나 좀 떳떳한 직업을 가져야 겠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열심히 일하고 틈틈히 망해암에 가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그리고 언제인지 모를 힘찬 비상의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런 노점상 생활을 한지 3년이 지났다. 그런데 그 기원이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졌다. 내가 청와대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시쳇말로 조상의 묘를 잘 써야 들어갈 수 있다는 그 청와대에 출근하게 된 것이었다. 나를 아는 주위의 사람들이 놀라고 부러워하는 가운데 우리는 열심히 절에 다니며 기도하였더니 이런 날도 있구나 하는 감동을 누룰 길이 없었다. 우리는 감격의 눈물을 적시며 부처님의 공덕이라고, 관세음보살님의 보살핌이라고 하면서 더욱 더 깊은 불심의 세계로 들어갔다.
몇년 후 의정부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한 집에서 조금 올라가면 동네의 끝이고 산이 시작되는데 그 곳에 절 ‘자은사’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자은사에 다니면서 열심히 모든 일에 동참해 봉사하였다. 우리는 그러면서도 음력 정월 초하루, 사월 초파일, 칠월 칠석에는 꼭 안양 망해암에 먼저 새벽으로 다녀와서 동네의 절에 갔다. 몇 년 후 절이 중창불사를 하게 되었다. 아내는 공사기간 내내 절에 가서 스님들과 공사인부들의 공양 뒷바라지를 하였다. 나는 나대로 직장에 다니면서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중창불사는 아무 탈없이 끝나게 되었다. 준공법회 때 그 동안의 봉사에 대한 배려로 나는 감사패를 받게 되었다. 그 감사패는 바로 부처님께서 내려 주시는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면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몇 년 후 웬만한 절에서는 시행하기 어렵다는 만등불사를 하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이 만등불사의 성취를 위하여 노심초사 전력투구하며 불사에 동참하였다. 그 결과 만개의 등은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6천여 개의 등불이 온 도량에 밝혀져 일대 장관을 이루며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다. 이 만등불사를 마치고 나니 다른 어떤 행사도 치를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경기 포천 금주산 중턱에 금룡사가 있다. 그 금룡사에는 북을 향하여 우뚝 서 계시는 백의관세음보살님이 계신다. 밤에는 법당과 관세음보살님에 전기 조명을 비추어 멀리서도 그 나투신 모습을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처음 그쪽 길을 낮에 가다가 뵙고 그 웅장함에 놀랐는데 밤에 지나다가 뵌 관세음보살님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불자가 아니더라도 그 모습에는 가슴 뭉클한 환희심을 느낄 것이다. 나는 그 앞을 자주 지나다니는 편이다. 그리고 그 웅장하고 자애로운 관세음보살님을 뵈올때는 운전중에 한 손을 가슴앞에 대고 예불을 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은 벅찬 환희심으로 메어져 오곤 한다. 따라서 나는 그 앞길을 지나가기를 좋아한다. 특히 밤에는 더욱 그러하다.
수년전 토요일 오후 친척과 함께 이동 방면으로 외식을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저녁 식사후 돌아올 때는 캄캄한 밤이 되었다. 도중에 갑자기 아내가 토할 것 같다고 하였다. 급히 차를 세워 토하게 하였는데 입가심할 물이 없었다. 칠흑같은 밤에 멀리 등불 하나만 깜박이는데 어떻게 물을 구하나 걱정을 하는데 어찌하다 밑을 보니 병이 하나 보였다. 혹시나 해서 집어 보니 뚜껑도 따지 않은 음료수병이었다. 그 음료수 덕분에 아내는 입가심을 하고 복통을 가라앉힐 수가 있었다.
그 지점이 바로 금룡사 근처였다. 나는 속으로 관세음보살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였다. 같이 갔던 친척은 기독교인이었는데 관세음보살님의 보살핌이라는 우리의 말에 기적같은 일이라며 공감을 해 주었다.
불교에 귀의한 후 나름대로 공부를 하려 하였으나 생활여건이 공부에 심취하기엔 미흡했다. 그러던 중 인연이 닿아 조계사 불교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계기가 생겨 졸업후 조계종 포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름만 포교사이지 공무원인 관계로 여러가지 여건이 맞지 않아 포교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 10월 5일 직장에 불교신행회가 창립되었다. ‘청와대불교신행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는데 이는 종교계나 언론계에 상당한 관심을 일으켰다. 나는 앞장서서 회원 확보에 열을 올리고 온갖 심부름을 다 하면서 청와대불교신행회의 번창을 기원하였다. 1년 여가 지나면서 약간 그 활동이 저조하다가 1998년 9월 16일 ‘청와대불자회’로 명칭을 바꾸어 재 발돋움하는 법회를 가졌다. 이 때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총무간사로 임명되어 예전과 같이 청불회를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나 자신이 1999년 3월 명예퇴직함에 따라 더이상 청불회에 봉사를 할 수 없게된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동안 조계종 포교원에서는 포교사단을 결성하여 나는 경찰포교팀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지만 나는 굳이 기복신앙이 아니라고 애써 변명하고 싶지 않다. 물론 궁극적으로야 깨달음을 이뤄야 하겠지만, 우선 복을 빌고 복을 받고 그 가피를 느끼며 수행을 하다보면 종래에는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부처님의 가피를 크고 작게 여러번 받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 관세음보살님은 더욱 더 가까이 계신다.
그리고 간절히 염원하면 그 원을 들어 주시고 어려울 때마다 그 자비로운 손길로 고난을 넘어가게 힘을 주고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이 확실하다.
나에게는 내 나름대로의 포부와 원이 있다.
그 첫째는 타종교가 불교보다 우월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혀내는 일이다. 아니 불교가 모든 종교의 근본이라는 것을 입증해 내는 일이다. 어쩌면 이 일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힘이 자라는 데까지 노력할 것이다. 둘째는 각 종단이나 각 사찰에서 공통적으로 두루 쓰일 수 있는, 통일된 불경책을 편찬해 내고 싶다. 그리하여 그 한권만으로 어느 때, 어느 절에 가서라도 바로 틀림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싶다.
그리고 생활여건이 허락될 때, 관세음보살님을 모실 수 있는 도량을 건립하여 수행정진하려 한다. 나는 이미 그 도량의 명칭도 지어놓고 있다. ‘화불정사(化佛精舍)’. 관음보살 42수주 진언에 화불수진언이 있는데 이는 나는 곳마다 부처님 곁에 있고자 하는 원이 담긴 진언이다. 바로 이 진언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리하여 수행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병고와 인생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하고 함께 깨달음을 이루고 싶다. 그리고 밤마다 기도하련다.
첫댓글 마음먹는대로 이루어지는 신통지묘력,바로 부처님의법입니다,찬탄합니다....()()()
소박하고 진실이 담긴 신행고백이 정말 가슴에 와 닿습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뜻하신 바 포교에 대한 포부를 이루어 내시길 빕니다. 반드시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나무관세음 보살!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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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날정도로 마음에와서 닷네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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