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의 정의
학생들에게 그림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들의 대답을 가장 많이 나온 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린이가, 혹은 어린이와 함께 즐기는 책 (어린이가 처음 만나는 책, 어린이와 대화할 수 있는 도구 등등)
2. 그림으로 이야기 하는 책
3. 글과 그림이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예술
4.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이 다양한 내용과 형식의 책
학생들의 정의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그림책을 어린이라는 대상에 맞춰 정의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림책을 주로 기능과 사용가치에 두고 정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책의 정의에서 대상만큼 중요한 것이 그림책의 형식이다.
어린이에 대한 선언적 발언이나 진부한 논의에 묶이지 않기 위해서, 또 이제 새로운 표현 예술로까지 평가되는 그림책에 대해 더 절적한 평가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나는 그림책의 특수한 미학적 힘에 대해 고찰해 보고 싶다.
그림책 비평에서 중요한 두가지, 즉 대상과 형식을 고루 짚어 이야기하자면 많은 다른 학문적 연구-심리학, 사회학, 예술학, 교육학 등등-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아왔거나 이슈가 되는 그림책을 살펴보는 것이다.
여러 가지 그림책을 보다보면 그림책의 가능성은 아주 다양하고 다층적이어서 그림책의 보편적 문법을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나는 우선 그림책을 즐기고 그림책의 매력에 빠지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의 매력을 모른다면 우리가 어떻게 세심하게 그들을 평가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첫 시간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과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좋은 그림책은 한 때 내 안에 분명히 있었을 뿐 아니라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마음 안에 잠재해 있는 욕구와 희망을 건드린다.
다다 히로시의 <사과가 쿵>도 내게는 그런 그림책이다.
커다란 커어다란 사과가...
쿵!
나는 호시탐탐 횡재를 꿈꾼다. 하늘에서 돈 보따리라도, 아니면 술독이라도 뚝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뚝도 아니고 쿵! 이다. 사각사각 아삭아삭 달콤한 음식이다. 먹고 먹고 또 먹고, 너 나 없이 배부르게 나눠 먹어도 충분한 양의 음식이다. 등장인물 모두 실컷 먹고 불룩한 배를 안고 차례로 옆에 앉는다. 등치가 큰 동물들까지 모두 와서 먹는다. 먹을 것이 충분하니 갈등을 만들 이유가 없다.
나 역시 큰 욕심 때문에 횡재를 꿈꿨던 건 아니지만 노동하지 않고 살아보려는 게으른 발상을 내심 부끄러워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혹은 우리가 바라는 횡재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저 잘 먹고 너 나 없이 행복하다면 무슨 욕심이 있으랴!
의성어를 읽으면서 차오르는 포만감과 만족감을 즐기면 그 뿐이다.
모두들 배부르게
잘 먹었습니다.
아!
비가 내리네
하지만 걱정 없어요.
갑자기 비가 내리자 동물들은 먹다 남은 사과에 들어가 비를 피한다. 정말 무슨 걱정이 있으랴.
갑자기 하늘에서 왜 떨어졌는지 어디서 왔는지 그런 사과가 존재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따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욕심도 걱정도 없는 책 속의 세계에 잠깐이나마 빠져있다 나오면 나까지 욕심이 없어져서는 듣고 있던 아이와 끝없이 말놀이를 즐긴다.
‘커다란 커어다란 포도가 쿵’ ‘커다란 커어다란 술독이 쿵’ ‘커다란 커어다란 인형이 쿵’ ‘커다란 커어다란 코끼리가 쿵’ ‘커다란 커어다란 아이가 쿵’ ‘커다란 커어다란 침대가 쿵’ ‘커다란 커어다란 엉덩이가 쿵’......
점점 말이 안되는 쪽으로 가지만 아이와 나는 깔깔거리며 더욱 흥겨워진다.
내가 이 책을 첫 번째로 선택한 이유는 내용이 단순하다는 것과 그림이 어눌하다는 것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그림책을 평가할 때 진지하지 않은 내용과 어눌한 그림에 인색하다. 공을 들인 훌륭한 그림을 그림책에서 만나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적어도 우리를 지루하게 만들지 않을 때만 공들인 그림도 빛을 발한다.
다음은 일상적인 소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잘 자요, 달님>(클레먼트 허드 그림/마거릿 와이즈 브라운 글)과 인간 본성과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단순하고 재미있는 토미 웅게러의 <제랄다와 거인>을 보자. (이 내용은 꿀밤나무 10호에 내가 쓴 ‘그림책 연출론-단순성과 그 속의 다의성’과 겹치므로 따로 정리하지 읺았다. 꿀밤나무 10호나 돌베게어린이 싸이트의 어린이책 이야기 7번을 참조하기 바란다.)
내가 예를 든 앞의 책들은 요즘 나오는 실험적인(어른을 분명한 독자로 포함하고 있는) 그림책이 아니다. 분명히 아이들에게 향해 있는 책이다. 그렇지만 어른인 내게도 충분한 즐거움과 감동을 준다. 내 마음 속에도 아이와 비슷한 희망과 절망과 불안이 들어있다. 어떻게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 궁리하고, 식욕과 질투와 공격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 것 저 것 모르는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고, 지금 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도 하고, 사랑 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이러한 욕구들을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명쾌하게 해소시키거나 반성시키는 것이 그림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림책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압축성과 다양성 때문일 것이다. 아직 이해력도 집중력도 부족한 어린이에게 가능하면 짧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을 다듬어 오는 동안 글과 그림 사이의 독특한 긴장관계를 만들었을 것이다. 글과 그림의 무한정한 조합과 문학과 미술의 역사적 토대를 활용함으로써 그림책은 다양하고 새로운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숙제: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책 10권 목록으로 정리하기.(우리나라 그림책 필히 포함)
2.그림책에서의 그림
그림책에서 그림의 역할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림이 과연 소통 가능한 언어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림에 대한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애매모호한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있는데 반해, 쉽게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물론 그림을 제대로 읽는 다는 것은 다른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만큼 어느 정도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알고 있는 많은 시각적 심볼들처럼 그림은 객관적이고 명쾌하게 소통될 수 있고 적어도 일러스트레이션은 그 가능성을 탐구해야 한다.
(참고 서적 :미술과 시지각 / 루돌프 아른하임, WRITING WITH PICTURE/ Uri Shulevitz)
흰 종이에 그려진 아래 그림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치웠다.
그림을 치우고 원이 정중앙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모두가 정중앙에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 판단이 지식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본다는 것은 이렇게 단숨에 보아버리는 것이다. 원이 중앙에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 말고도 원이 사각형과 관련하여 틀 쪽으로 달아나거나 중앙으로 끌리는 느낌을 받는다. 그림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데도 보는 사람은 움직임을 느낀다. 이러한 심리적인 힘 역시 위치를 인지하는 것처럼 지력이나 공상에 의해 이차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본다는 것은 직접적이며 그것 자체가 하나의 통찰이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보고 직접적으로 느끼는 시각적 판단이나 심리적인 힘은 그림을 구성하고 주제를 드러내는데 대단히 많이 활용되고 있다. 대가들과 현재의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그 활용 예는 많다. 몇 가지 원칙들과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수평적 형태는 안정적이고 고요하며 수직적 형태는 수평보다 생동감이 있고 중력을 느끼게 하며 사선의 형태는 운동과 긴장을 제공한다. 어떤 아이가 화가 나서 문을 꽝 닫고 집을 나갔다고 하자. (소피가 화나면 정말 화나면/ 몰리뱅) 집을 나갈 때의 숲의 나무와 마음의 평정을 찾고 돌아오는 길의 숲의 나무는 같지 않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의 나무는 사선으로 기울고 나뭇잎은 바람에 요동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올 때의 나무는 곧게 서있고 움직임이 없다.
2. 밝거나 하얀 배경은 어두운 배경보다 더 안전한 느낌을 주는데 낮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빨간 모자>가 늑대를 만나는 숲을 그린다면 어떤 분위기가 어울릴까? 적어도 환하고 직선적인 나무로 들어찬 숲은 아닐 것이다.
3. 화면의 중심보다 위쪽은 행복과 성공과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위쪽에 놓여진 형태는 더 정신적인 느낌을 준다. 화면 아래에 놓여진 형태는 더 심각하고 무겁고 슬프고 강제받는 느낌을 준다. 그림의 위쪽에 있는 것은 더 무겁게 느껴진다.
4. 그루핑의 법칙 : 다른 부분들 보다 서로가 좀 더 가까이 있는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으로 눈이 좀더 단순하게 보려는 작용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다. 크기의 유사성, 형의 유사성, 밝기와 색의 유사성 등등이 있는데 비슷한 색은 비슷한 형태보다 더 유사성이 강하다.
엘 그레코의 <사원으로부터의 추방>을 보자
그림을 보는 사람은 중앙의 그리스도의 모습에 주의가 쏠린다. 화면의 중앙이 가장 눈에 띄기 때문이고 적색과 명도 대비와 구도에 의해서도 중앙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게 되어있다. 보는 사람의 시선은 왼쪽 아래에서 두 번째 빨간 옷에로 스쳐가게 되는데 이것은 붉은 색상의 유사성 때문이다. 이 시선의 움직임은 그리스도가 후려치는 동작과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손짓의 흐름은 그의 시선의 방향과 중간의 두 인물의 들어올린 팔에 의해 더 강조된다. 그래서 눈은 실제로 그림의 중심 주제를 구현하는 행위를 이루고 있다. (위 그림을 흑백으로 전환하여 보면 후려치는 힘이 현저히 약해 보인다.)
5. 눈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림을 읽어간다. 오른쪽을 향한 시지각이 더 강하고 그래서 오른쪽을 향하여 움직이는 물체는 더 눈에 띄어 보인다.
그림책에서 대부분의 주인공은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해 간다. 책에서 글을 읽고 책장을 넘기는 방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책의 경우 글과 책장의 방향이 오른쪽에서 왼편으로 가며 그림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힌다.)
시지각 학자인 루돌프 아른하임의 책들을 보면 앞에 예시된 것 이외에 아주 자세한 시지각의 원리들을 알 수 있다. 그는 '위대한 미술품에서는 그 아주 깊은 의미가 그림의 구성의 특징에 의해서 강하게 직접적으로 눈에 전달되어 진다'고 말하고 있으며 로마의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를 그 예로 들고 있다.
"하나님은 흙으로 만든 아담의 몸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지 않고 아담을 향해 팔을 뻗쳐서 마치 살아 있는 불꽃이 손가락에서 손가락으로, 창조주에게서 피조물에게로 전달되듯 표현되어있다. 두 팔로 이루어진 가교는 두개의 격리된 세계를 시각적으로 이어 주고 있다. 하나님을 에워싸고 있는 자족적이고 완전한 형태의 둥근 망토와 윤곽이 뒤쪽으로 기울어짐으로써 피동성을 표현하고 있는 완전치 못하고 평범한 흙덩이의 세계를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만들어내는 우묵한 곡면에도 피동성이 있다. 아담은 지상에 누워 있는데, 접근하고 있는 창조주의 매력적인 힘에 의해 부분적으로 일으켜 세워질 수 있게 되어있다. 일어나 걸으려는 바램과 잠재력이 왼쪽 다리와 발에 나타나있으며 이 왼쪽 다리는 하나님의 에너지 충만한 팔과는 달리 스스로 자유로이 유지할 수 없는 아담의 팔을 지탱해 주는 받침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받아들이는 에너지로 활성화되고 있는 수동적인 대상과 접촉시켜 주는 적극적인 힘이 있다. 아담의 창조는 스토리의 역동성을 구성의 구조적 골격에 의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스토리의 본질은 관찰자의 눈에 맨 먼저 충격을 가하는 이 작품의 지배적인 지각 패턴에 의해 나타난다. 그리고 이 패턴이 단순히 신경계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부응하는 상당한 힘이 관찰자 안에서 작용하게 되어 스토리의 의미를 특징화해 주고 감동적 참여를 유발한다."
이렇게 형상과 색채 등이 미술 작품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해주는 통역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미술 작품의 형태 패턴이 자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림이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의 어린이나 원시인들에게 통용되는 것을 생각해 보더라도 언어 보다 더 직접적인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책에서 그림의 스타일에 집착한다든가 특별한 이유 없이 주인공과 배경을 뒤섞어 혼란스럽게 화면을 구성한다든가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보다 명료하게 의미를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다면 훨씬 자유롭게 소재와 주제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책은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책장을 넘기면서 펼쳐지는 연속적으로 나열된 화면을 갖는다. 그래서 가독성과 더불어 일관성이 중요하다. 내용적 일관성을 제외하고 우선은 그림표현의 일관성부터 살펴보자.
그림 표현의 일관성이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곧은 펜 선을 사용하여 이야기에 주요한 물체를 묘사하다가 갑자기 구불구불하거나 흔들리는 선으로 바꾼다면 내용적으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자연에 대한 묘사도 삼차원의 원근법으로 그리다가 갑자기 평면적인 민화풍으로 그려서는 안된다. 현실과 환상이 섞여있는 이야기에서 환상의 공간을 그릴 때 외곽의 테두리를 사용했다면 현실 공간을 그릴 때 기분에 따라 외곽 테두리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즉 독자들에게 앞 장면에서 약속한 시각적 코드를 작가가 자기 멋대로 변경해서는 안된다.
또한 화면의 일관성은 독자가 보고 싶어 하고 믿어주는 것에 많은 부분 의존한다. 박은영의 <빨간 단추>를 보면 처음에 등장한 빨간 단추를 다음 장면에서 찾을 수 없다. 독자가 참여할 여지를 배려하지 않고 작가 혼자서 상상 놀이를 하는 것은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만 1세를 위한 사물 그림책을 만들면서 우리 악기를 나열하는 것도(둥둥 북을 쳐요/다섯수레) 그런 측면에서 보면 과욕이다. 우리나라에 사는 동물들이 등장해서 신나게 장구나 징을 두드리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도 보는 아이가 신나는 것은 아니다.
이억배의 <손 큰 할머니의 만두 만들기>에도 시각적으로 일치되지 않는 부분들이 가끔 눈에 띈다. 할머니가 들고 온 솥의 크기가 바로 다음 장에서 크게 달라지거나 커다랗게 만든 만두의 크기도 뒤에는 훨씬 더 커지는 등 앞에 등장한 것과 뒤의 것이 동일한 것인지 의심이 든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런 사소한 결함으로 그림을 평가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가독성이나 일관성을 기계적으로 생각하고 제작 과정에 적용하려 한다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왜 손가락이 4개냐고 따지거나 아이 얼굴이 귀엽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은 화가의 자유로움을 방해하는 심적 부담으로만 작용한다.
또한 일관성이 있다고 해도 재미없다면 소용없는 노릇이다. 류재수의 <노란 우산>의 경우 CD음반을 듣지 않고 그림책만 넘겨보면 가독성이나 일관성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별 재미는 없다. 시선이 노란 우산을 쫒아가는 것 이외에 독자가 끼어들어 주고받을 수 있는 사연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존 버닝햄은 주인공의 형태조차 일관성 없이 그리지만 그림이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든다. (꿀밤나무6호 혹은 돌베개어린이 싸이트 어린이책 이야기 5번 "그림책 연출 방식2-작가를 중심으로" 중 두 번째 단락 "존 버닝햄의 선명함과 애매함" 참고)
한스 피셔의 <브레멘 음악대>의 경우도 집의 크기나 동물의 배열 방식이 문제가 되기는커녕 유쾌하고 편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보면 논리적 일관성보다는 주제를 드러내는 작가의 방식이 결과적으로는 중요하다. 이것을 우리는 작가만의 개성적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개성적인 스타일이라든가 새로운 상상력은 갑자기 솟아나거나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새로운 개념이 낡은 것들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술의 역사나 미학 이론에서부터 영상이나 연극이나 만화에서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넓게 관심을 확장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작가가 소통하고 싶은 것이 정말 무엇인지 그것을 그림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갖는다면 보는 사람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앞서 인용한 루돌프 아른하임은 이렇게 말한다. "독창성은 일부러 찾거나 의식해서 나타나는 산물이 아니라 다만 충실하고 정직하고자 애쓰는 천부적인 미술가들의 산물이다."
숙제-존 버닝햄의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지각대장 존>, <우리 할아버지> 중 하나를 선택해서 그림책이 아니라 글로만 된 책을 낸다고 생각하고 글을 써본다. 이런 글쓰기는 그림책에서 그림과 글이 어떻게 관련되며 역할을 분담하는지 알게 해줄 것이다.
3.글과 그림의 긴장 관계
그림책에서 글은 보조적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흔히 그림이 중심이 되는 책이 그림책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림이 중심이 되느냐 글이 중심이 되느냐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혹 그림만으로 된 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그림책은 그림과 글이 결합하여 독특한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라고 보아야한다.
그렇다면 글과 그림을 동시에 사용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효과를 주는지 다시 생각해보자. 글도 무언가를 의미하고 그림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이 둘을 같이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책이 출현하고부터 텍스트와 이미지와의 관계는 흔한 것이 되었지만, 구조적인 관점에서 이 관계가 연구된 사례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삽화'의 의미있는 구조란 무엇인가? 이미지가 정보 중복의 현상에 의해 텍스트의 정보와 겹쳐지는가 혹은 텍스트가 이미지에 새로운 정보를 덧붙이는가?" (이미지와 글쓰기/ 롤랑 바르트)
나는 그림책에서 편의적으로 글 그림의 관계를 나누어 본적이 있다.
"편의상 글과 그림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춰 그림책을 유형화해 보았습니다.
우선 글만으로 이야기가 완성되거나 그림만으로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고 글과 그림을 동시에 보아야 완성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글과 그림이 겹치지 않는 경우입니다. 글과 그림이 서로를 보완하고 확장시켜 주므로 풍부한 느낌이 생깁니다. 두 번째로 그림만으로도 이야기가 전달되는 책들도 좋은 그림책입니다. 글자 없는 그림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쫓아가며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읽어 주는 가운데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상상력을 키워 갑니다.
또 글과 그림이 묘사를 중복하는 책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서로의 울림이 다르면서 조화가 된다면 좋은 그림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림이 풍부한 느낌을 갖지 못하고 글이 설명하는 것을 평이하게 쫓아가거나 지나치게 산만하다면 그림책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책은 그림이 아이의 느낌이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고 제한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림이 없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만 3~4세 유아를 위한 그림책에서의 그림/ 문승연/ 돌베개어린이 사이트 어린이책 이야기 3번)
이런 글들을 요약하면 글과 그림의 관계는 중복 또는 지정이나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글과 그림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일정 부분 정보가 중복되지 않는 책은 지극히 드물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중복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글과 그림이 묘사를 중복하는 책도 있습니다.' 이런 말은 의미가 없다.
나는 칠판에 다음 그림을 제시하고 학생들에게 제목을 붙여보라고 했다.
학생들이 붙인 제목 : 해돋이, 동해에서, 새 날, 감동의 물결, 희망, 산과 태양, 지는 해 ...
'동해에서'라는 제목으로 이 그림을 다시 보자. 또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이 그림을 다시 보자. 제목은 특정지역을 떠올리거나 자신의 감정을 실어 그림을 보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해돋이'는 어떤가.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에 다른 연상을 하도록 요구하는 폭이 적기는 하지만 그림이 곧 제목과 일치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만약 '해돋이'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소재를 사용한다고 해도 똑같은 그림은 없을 것이다.
다음은 회화에서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림은 왜 제목이 필요할까? 무제라고 제목을 붙이는 경우는 또 무엇일까? 나는 샤갈의 그림을 제시하고 그림 제목 맞추기 게임이 아니므로 실제 그림 제목을 맞추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제목을 짓도록 부탁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림을 어떻게 이해하려고 하는지, 그림에 글이 붙어있을 때 어떻게 느끼는지를 보기 위한 것이다.
학생들이 붙인 제목 : 결혼의 환상, 시간의 기억, 붉은 침대 위의 여인, 여인의 사랑, 사랑에 대한 몽상 (실제 제목 : 나의 아내에게)
위의 그림에는 많은 내용이 담겨있고 그래서 학생들은 대체로 연상되는 것이 많은 제목을 붙였다. 그런데 제목이 '결혼의 환상'일 때와 '붉은 침대 위의 여인'일 때의 그림 읽기는 많이 달라진다. 무엇이 달라지는가? 여기서 달라지는 것은 보는 사람이 상상해야 할부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만약 배경 없이 붉은 침대위에 여자 그림만 따로 떼어놓고 '붉은 침대위에 하얀 베개에 기대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이라고 이름 붙이거나 보다 자세한 묘사로 표현한다고 해도 이것이 정보의 중복뿐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이렇게 글과 그림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를 완전히 중복 또는 일치시킬 수 없으며 그 둘은 선택적으로 서로에게 관계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관계를 깨닫고 활용하는 것이 그림책의 시작이다. 그림책에서 글이, 그림이 할 수 없는 소리나 시간 등의 요소를 추가해 주는 정도의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우리가 그림책을 만들어온 과정을 보면 대체로 글이 순서적으로 먼저 있고 글에 맞추거나 글을 해석하여 그림책을 만들어 왔다. 이런 과정에서 마주치는 한계를 그림이 중요한 이야기의 서술을 해야 한다든가 그림으로 읽혀져야만 그림책이라는 말을 강조함으로써 개선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정확한 지적은 아니다. 순서적으로 어느 것이 먼저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며, 글 그림의 양적인 분량으로 그림책과 동화책을 나누는 것도 초보적인 논리다. 글과 그림이 서로를 지정하고 확장하는 긴장관계가 그림책의 핵심적인 문법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동화 작가나 화가가 그림책을 할 수는 있지만 그림책 작가가 따로 필요하다. 글과 그림의 긴장관계를 통해 자기 나름의 문법을 가진 사람이 그림책 작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글과 그림은 서로 보완하고 결합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성질의 표현이 된다. 이때 그림과 글은 무한정한 조합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서로 지원하거나 방해하고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수 있으며 전체적인 서술에 있어서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주역과 조역을 분담하는 등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팻 허친스의 <로지의 산책>은 글과 그림을 의도적으로 엇나가게 해서 경쾌한 즐거움을 준다.
존 버닝햄의<검피 아저씨의 뱃놀이>와 <알도>의 첫 장면은 둘 다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 아저씨가 바로 검피 아저씨야' '난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 작가는 왜 이렇게 다르게 소개를 시작했을까? 당연히 책 전체의 흐름과 줄거리를 위해 의도된 선택일 것이다.
그러니까 글과 그림이 서로를 지정하고 확장하면서 서로 보완하고 결합하는 방식은 결국 맥락에 의해서다. 맥락 속에서 글 그림의 방식을 결정하고 그것을 통해 이야기가 전달되는 것이 그림책이다. 그래서 그림책은 어떤 장르보다도 플롯이 중요하다. 글과 그림의 긴장관계는 플롯을 통해서만 확정되고 드러난다.
숙제 : <샬롯의 거미줄>, <어린이 문학의 즐거움 1>중 제4장 문학 텍스트 읽기 전략
위의 두가지 텍스트는 플롯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을 제공해 준다.
*위 글은 한겨레 문화교실 '그림책 비평'과정에서 문승연씨가 한 강의를 문승연씨가 정리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dolkid.com/ 돌베개 어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