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 : 1 - 17
제가 어려서 물놀이를 하다가 몇 번 물에 빠져 위험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수영을 나름대로 배웠습니다. 지금은 물에 빠져 죽지 않을 정도로 수영을 합니다. 요즘 물놀이를 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같이 죽었다는 말도 심심찮게 듣게 됩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 그리면 더 깊은 데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옛날에 물귀신이 끌어 당겨 죽었다고 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요령은 물에 빠진 사람이 어느 정도 물을 먹고 실신했을 때 구해야 한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자신을 구해주려고 하는 사람까지도 붙들고 놓지 않으니까 구하려는 사람까지도 죽는 것입니다. 아예 수영에 자신이 없으면 가만히 있으면 물살에 밀려 얕은 곳으로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뜻하지 않은 위기를 당할 때 당황하게 됩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당황하며 허둥댑니다. 그러나 옛말에 ‘호랑이 한데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처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10절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본 시편은 히스기야가 유다 왕이 되어 통치 할 때 앗수를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고 위협하므로 예루살렘성이 함락될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루살렘이 구원된 사건을 배경으로 쓴 시입니다.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열왕기하 18,19장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유다 왕이 되었을 때, 앗수르 왕 산헤립은 ‘이웃 여러 나라들을 쳐서 이겼으며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까지도 내 손에 들어왔거늘 이제 예루살렘을 내가 치려고 하는데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고 말하며 히스기 왕을 위협하는 것입니다(왕하18:36).
이러한 말을 들어도 백성들은 잠잠하고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히스기야 왕이 잠잠하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위협하는 말을 하면, 백성들이 무서워 떨며 낙담을 하고 울고불고 할 줄 알았는데 눈도 꿈쩍하지 않고 조용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이 말을 듣고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너는(히스기야 왕) 앗수르 왕이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왕하 19:6,7). 이사야가 전해 주는 말씀을 듣고 히스기야 왕을 비롯한 백성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과 백성들이 위기 앞에 잠잠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 여기에 ‘환난 중에’란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어느 신이 나의 손에서 건지겠느냐’고 하며 조롱하고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산헤립은 이미 이웃 나라들을 쳐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과 사마리아까지도 쳐서 자기 손안에 들었습니다. 살기등등한 산헤립이 예루살렘 성을 치려고 에워싸고 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 중에도 백성들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다가도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사고로 인해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희망도 없는 절망가운데로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스스로 그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그러나 나아지기 보다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해 보려고 하다 보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수가 없도록 만듭니다.
2절 말씀에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말씀은 자연의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진이나 산사태, 해일, 홍수 등으로 위기상황에 처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넘쳐 덮어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놀라운 신앙입니다.
이렇게 위기를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왜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성중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중에 계시기 때문에 앗수르 군데가 에워싸고 있어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새벽에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어떤 어려움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말씀은 새벽이 어둠을 물리치고 밝은 아침을 고게 하는 것처럼 고통이 지나면 새날이 오듯이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고 위협할지라도 예루살렘 성중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성중에 계신다는 것과 새벽에 도우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7절 말씀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말씀이 11절에도 있습니다.“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아멘! 성도는 누굽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나는 누굽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누굽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누굽니까?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성도인 나와 여러분에게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어려움과 위기가 들어 닥쳐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니까 어려움 앞에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심없이 믿습니까? 믿는다면 어떤 어려움이나 위기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잠잠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중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성을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위협하고 저주하는 앗수르 왕과 그의 군대를 하룻밤 사이에 진멸시키실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열왕기하 19:35절에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8,9절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뭇 나라들에게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보라 그가(하나님이) ...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라고 승리의 노래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입니다. 성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백성들은 조금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도에게는 그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대적과 싸워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도가 어려움에 빠져들었을 때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도와주시고 어려움에서 이기도록 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도와주셨다는 사실을 만민이 알도록 하십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도와 주셨다는 것을 알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게 손해를 끼친 그 사람도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셨다는 것을 알도록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10). 극한 상황을 당했을 때의 표현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것 같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당황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하나님으로부터 도와주시는 축복을 받도록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다는 것을 나만 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도와주셨다는 것을 알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는 이 말씀이 출애굽기 14:13절에서도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데로 따라 갔는데 홍해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뒤에는 바로의 군대와 마차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양옆으로는 절벽이라 더 이상 도망 할 수 없는 ‘독안에 든 쥐’와 같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진퇴양난’이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에게 소리칩니다. ‘애굽에 장지가 없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하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하며 원망할 때 모세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출14:13)고 말했습니다.
현실은 진퇴양난의 위기입니다. 이럴 때 가만히 서 있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절벽이라도 기어오르든지 아니면 바다에 뛰어 들든지, 아니면 애굽 군대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빌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방법이라도 찾고 노력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떨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 하나님은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성을 둘러싸고 산헤립이 조롱하며 위협을 하는데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가 길을 막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죽이려고 달려오는 데 가만히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부도가 나고 망하게 되었는데,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 앞에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참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만히 서 있지 않고 이리가고 저리가고 동동동 거리고 울고불고 야단법석을 떤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축구 경기를 할 때 선수들이 흥분되어 실수를 하는 것을 보고 감독이 흥분하지 말고 진정하라고 싸인을 합니다. 그러면 선수들이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상적인 프레이를 하면 지던 경기도 이기게 되는 것을 봅니다. 흥분되 상태에서 공을 차면 공이 마음먹은 대로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선수를 차서 다치게 합니다. 경기가 거칠어지며 정상적인 경기가 되지 못합니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서서’란 말은 구정물을 가만히 두면 찌꺼기는 가라앉고 맑은 물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분노를 삭이라는 말입니다. 불신과 원망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흥분을 조용히 삭인다는 것은 심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할 수 있습니다. 왜 성도는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보여지게 됩니다. 들리지 않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지게 됩니다. 구정물이 가라앉으니까 맑은 물이 되듯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이 경영하는 사업체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힘이 되십니다.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도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흥분되지 말고 가만히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