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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여행기(12/26 -12/30)
12월 26일(월)
아침 6시 반에 일어났다. 안사람은 5시가 되기 전에 일어난 듯하다. 나는 식사를 마치고 안사람의 준비가 다 되기를 기다렸다. 결국 7시 30분에 출발했다. 그간 며칠을 집을 비우게 되니까 안사람은 아이 도시락도 싸줘야 되고 밑반찬도 해 주어야 하고 등등 신경 쓸 구석이 많을 것이다.
아무튼 7시 30분 되어서야 출발하게 되었다. 아침 출근시간이어서 사당역 까치고개 부분이 막혔다. 아니나 다를까 장 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교장의 주소를 묻고 가까이 가서 전화 드리겠다고 했다. 임경유 선생에게도 교장선생님을 태우면 전화 드리겠다고 전했다. 장교장을 모시고 8시 30분이 되어서야 임경유 선생님 댁에 도착했다. 짐을 옮겨 싣고 우리집 네비를 바꿔 끼웠다. 안사람은 화장실도 갈 겸 가지고 온 식혜도 전할 겸 임경유 선생님 댁을 잠시 들렀다가 출발했다. 선릉역에서 구본황, 류균상 선생님이 합류했다.
총무 구본황 선생님이 조수석에 앉았다. 교장, 안사람이 가운데 좌석, 나와 류 선생님은 뒷자리에 앉았다. 시종 그렇게 앉았다. 회비는 약속대로 20만원씩 냈다. 나는 안사람과 합해 40만원을 전달했다. 답사지는 구 선생님이 잘 조사해 왔다. 나중에 보니 아버지의 고적기를 참조하여 우리가 찾아가야 할 행선지가 16절지에 꼼꼼히 적혀 있었다.
먼저 베티재로 갔다. 여기는 중요한 전첩지였다. 전첩기념탑이 서있었다. 이 고개에서 권율 장군을 비롯한 의병장들이 적과 맞서 싸워 적의 주력부대가 전주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게 만든 곳이었다. 이 고개가 화암사를 찾아가는 길목이기도 했지만 역사적 의미를 찾아 여기를 먼저 택한 것이었다. 전첩기념탑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대둔산이 보인다. 능선이 가팔라 천혜의 산성처럼 둘러싸여 있다. 전세가 불리한 우리에게 유리한 고지였을 것 같았다.
나는 가까운 곳에 칠백의총이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임경유 선생님이 칠백의총은 오다가 보았지만 지나쳤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칠백의총이 가까우면 가보자고 했다. 그래서 차를 돌려 칠백의총으로 갔다. 칠백의총은 성역화되어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월요일이라 휴관이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다.
우리는 다음 목적지 화암사(花巖寺)로 가기 시작했다. 큰길에는 눈이 없었다. 그렇지만 화암사로 들어가는 지방도로에는 눈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런 뜻에서 임 선생님께 체인을 준비하자고 한 것인데. 화암사 가까이 왔을 때 헛바퀴가 돌아 다 내려서 잠시 차를 밀기도 했다. 앞으로 화암사까지 남은 거리를 물어보니 구 선생님이 2킬로라고 답했다. 차는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내렸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길을 나섰다. 교장 선생님은 가지 않고 차에 남아있겠다고 하셨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나섰는데 2킬로는 아니었다. 산 거리로 500미터 정도 되지 않나 생각했다. 아버지가 고적기에 쓴 대로 철제 계단이 보인다. 철제 계단 아래에는 폭포가 흐르는 절벽이다. 겨울이라 그렇지 수량이 많으면 이 풍경도 절경이겠다. 그런데 철제 계단이 흉물스럽게 폭포의 절경을 감상할 수 없게 가리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아쉬움보다는 ‘이런 위치에 어떻게 절터를 잡았을까. 옛날에는 대찰이었을 터인데.’ 하는 의문이 더 들었다.
화암사는 아담한 절이었다. 우화루와 적묵당도 보았지만 우리의 관심은 극락전이었다. 극락전은 이번에 ‘보물 제633호’에서 ‘국보 제306호’로 승격되었다. 그런 안내는 매직펜으로 써 있을 정도로 가난한 절이었다. 구 선생님이 ‘하앙식 건물’의 뜻과 역사적 의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이런 건물은 중국이나 일본에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건물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찰이다. 이 극락전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 건축 양식이 일본으로 넘어간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하앙식 건축물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한 국보 승격이라는 것이다. 새삼 우리가 우리문화재를 소중히 해야 하는 이유와 가치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참배하고 내려왔다. 절에 있는 비구니 승이 아이젠을 신고 사찰로 들어왔다고 나무랐다. 우리는 사과하고 서둘러 벗었다. 우리는 그녀와 절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극락전 안에 다시 들어가 ‘동종’도 보고 나와서 언덕에 있는 ‘화암사중창비’를 보고 내려왔다. 화암사에서 내려오면서 철제 계단 수를 세어보니 대략 145개의 계단이었다.
화암사에 들어오면서 중국집을 봐 두었지만 찾지 못했다. 송광사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기사 식당을 발견했다. 백반 5,000원인데 시장을 겸하여 맛있게 먹었다.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자 식당 아줌마가 우리에게 누릉지와 편강을 주었다. 편강은 두고두고 소중한 간식이 되었다.
송광사에 들어섰다. 평소에 관광객이 많이 오는 사찰이지만 겨울철이어서 그런지 많지 않다. 전에 동서 내외와 온 기억은 나지만 이 절에 처음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십자각은 출입금지가 되어 있었다. 나 혼자만 계단 위에 올라가 둘러보고 내려왔다. 대웅전 법당 안에 들어가 보니 거대한 불상이 압도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착각했나 보다. ‘소조 불상’인데 고적기에는 ‘목조 불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언제 승격했는지 지방유형문화재에서 보물로 승격되었다. 그래서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274호)’으로 바로잡았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위봉사(威鳳寺)를 향했다. 위봉사를 가는 길에 고개를 넘는데 위봉산성이 보였다. 우리는 지나쳤다. 고개 아래에 있는 위봉사에 들어갔다. 위봉사는 그윽하고 조용한 비구니 절이었다. 사천왕문의 사천왕상에 한글 이름을 크게 써 놓은 것이 특이했다. 보광명전에 들어갔다. 아미타삼존불상을 모셔 놓고 있다. 천장은 우물 정자 모양의 닫집이 있었다. 운룡과 구슬 모양의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현관 입구에 한자로 쓰인 ‘酋崒山威鳳寺’는 읽기가 어려웠다. 구 선생님이 스님께 물어서 ‘추줄산’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홀인원 모텔에 숙박했다. 교장이 3만원으로 깎았다. 우리는 콩나물 국밥을 먹고 투숙했다. 가보지 못한 곳은 회안대군묘, 이정란 장군 신도비, 대원사의 용각부도였다. 회안대군묘는 네비에 나오지 않고, 대원사 가기에는 거리가 멀고, 이정란 장군 신도비는 관심사가 되지 못하여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많은 거리를 다녔고 보았다. 우리는 앞으로 가게 될 코스에 대한 논의를 했다. 문화재 위치를 생각해서 화순군에서 장흥군, 강진군으로 해서 승주군으로 올라오자는 데 합의를 했다. 거리 관계로 운주사는 빼기로 했다.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다.
12월 27일(화)
아침 4시 30분에 깼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기는 처음이다. 6시 30분에 식당에서 선지 해장국을 먹었다. 그리고 8시에 출발했다. 우선 화순군의 최경회 장군 유적지를 가기로 했다. 네비에 ‘고사정(高士亭)’이 나오지 않아 그 부근에 가서 노인에게 물어서 찾아갔다. 안내 표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가서 보니 입구에 ‘의병청지’라고 쓴 돌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킨 곳이었다. ‘고사정(高士亭)’의 고사(高士)는 최경장의 아들 최홍우를 가리키는 말이고 정자는 홍우의 아들이 세운 강당이었다. 우리는 의병장 최경장의 후손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에게 유품인 언월도를 보여 달라고 했으나 다른 곳에 보관해 두어서 보여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교지는 보여 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별당에서 그분의 교지와 서간첩, 그리고 칼집을 볼 수 있었다. 그분이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글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문서에 좀이 슬어 많이 태워버려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이 5퍼센트도 안 된다고 고백했다. 우리에게는 실화로, 전쟁으로, 무지로, 그리고 보관을 제대로 하지 못해 멸실된 문화재가 얼마나 많은가.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충의사’로 갔다. 아버지가 충의사가 초라하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화순군에서 성역화했다. 2003년에 조성했다고 한다. 최경회 장군이 문인이지만 활을 잘 쏘았다고 하는데 말을 타고 활 쏘는 상이 세워져 있고 논개 부인의 영당도 조성해 놓았다. 영당은 문이 잠겨 들어가 참배할 수 없었다. 나오면서 충의사 위쪽에도 사당이 있는 것이 보였다. 안사람이 그 건물에 대해 의문을 가졌는데 아버지 자료를 보니 해주 최 씨 사당이었다. 충의사 규모에 눌려 작아보였다. 아마도 이 건물을 지을 때 최 씨 문중에서 반발했을 성싶다.
다음 행선지로 ‘쌍봉사’를 갔다. 쌍봉사는 임경유 선생님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사찰이었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속의 절이었다. 퇴락한 절은 아니었다. 깨끗하게 정화된 절이었다. 대웅전은 실화로 불타 버려 새로 지은 건축이었다. 팔상전과 같은 탑형 건물로 제대로 보존되었다면 국보가 될 건물이었다. 진천의 보탑사와 같은 구조이지만 대웅전은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없는 점이 달랐다.
우리는 탑에서 나와 왼편으로 올라갔다. ‘철감선사탑과 탑비’를 보았다. ‘철감선사탑’은 ‘국보 제57호’다. 화려하고 정교하기 그지없는 탑이었다. 옥개석 서까래 끝부분에도 연꽃무늬를 새겨 놓는 등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상륜부가 멸실되고 탑 일부분이 쪼개지고 면석에 그림이 뚜렷하지 않은 점이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국보다운 위용을 보여주었다.
‘철감선사탑비’는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고 탑신이 없는 점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귀부의 한쪽 다리가 들려 있어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은 창의적이었다. 이런 모습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생동감이 돋보였다. 탑신만 제대로 갖춰 있어도 국보감인데 안타까웠다.
다음 목적지 ‘사인정(舍人亭)’으로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 된장찌개로 점심 식사를 했다. 그리고 ‘사인정’에 도착했다. 장흥군의 인물 김필의 영당인 ‘설암각’이 있고 왼편 언덕에 새로 조성한 ‘영정각’이 있었다. 우리는 ‘영정각’에서 잠긴 문을 열고 영정을 보고 나왔다. 그리고 ‘사인정’으로 갔다. ‘사인정’은 김필이 만년에 퇴휴소로 지은 정자다. 앞의 경관이 좋고 시원한 장소여서 조용히 풍류를 즐기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사인정’ 왼편의 네 개의 돌에는 ‘제일강산’이라는 한자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 글에는 그 글을 김구 선생이 썼다고 했다. 그 근거로 김구 선생이 장흥과 인연이 있었고 ‘사인정’에서 쉬어갔다는 점이었다. 안내판 내용은 김구 선생이 썼다는 것은 구전된 내용이라고 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김구 선생이 썼다는 것은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필적 감정을 한다든지 해서. 친필로 확인되면 그만큼 김구 선생을 돌아보는 가치도 커지니까.
그리고 다음 목적지 ‘의마총’으로 갔다. 그런데 장소가 쉽게 찾아지지 않고 가는 길도 어려워서 포기했다. 그리고 ‘보림사’로 향했다. 먼저 보림사의 ‘삼층석탑과 석등’을 보았다. 국보 제44호다. 대웅전 안에서도 탑과 석등을 바라보았다. 석탑은 서로 다르면서도 닮아 균형을 이루었다. 거의 모든 부분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점이 다행이다. 이것도 국보지만 대적광전에 모셔있는 ‘철제비로자나불’도 국보다. 철로 만들었지만 법의가 어찌나 부드러운지 철로 만든 것이 아니라 목제에 색깔을 입힌 듯했다. 나는 법당에서 나와서 지장전 그림을 살펴보았다. 보통 ‘지장전’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여기는 악행을 저지른 자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장면을 상세하게 그려놓았다. 끔찍했다. 나는 오른쪽 언덕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과 ‘보조선사창성탑비’로 올라갔다. 아버지 글에는 ‘창선탑’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오기인 듯하다. 집에 와서 고쳤다.
나는 이게 동부도탑인 줄 알고 서부도탑을 류 선생님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다. 현관에 서있는 구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두 탑 모두 절 밖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안내도를 보니 그리 그려져 있었다. 무식의 소치였다. 우리는 차를 타고 ‘동부도탑’을 찾아 나섰다. 사찰에서 400미터 떨어진 지점이어서 곧 찾았다. 아래쪽에도 수많은 부도가 열 지어 있었으나 ‘동부도탑’이 역시 가장 높은 자리에 가장 멋있는 모습으로 서있었다. 그 탑의 문화재적 예술적 가치도 물론 중요하겠다. 그렇지만 조각 기술이 점점 퇴보한 것인지 그만한 고승이 나오지 않은 탓인지 시대가 흘러갈수록 점점 조각 기술이 떨어지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이번에는 ‘서부도탑’을 찾아 나섰다. 찾기가 쉽지 않다. 다시 돌아와서 안내판 지도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그러나 바로 찾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오는 길에 주민에게 물어보니 제 위치를 가르쳐 준다. 바로 가까운 언덕에 있었다. 두 개의 탑이 있었다. 둘 다 고려시대 작품이다. ‘동부도탑’보다는 가치가 떨어져 보였다.
이제 어두워졌다. 숙소를 잡으러 장흥군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장흥군의 모텔은 단합했는지 비싸게만 부르고 숙박 장소로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강진군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잘 한 선택이었다. 강진군에서 모텔을 잡고 식사하러 식당에 갔다. 김치찌개를 시켜 먹고 쉬었다.
12월 28일(수)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임 선생님은 일찍 일어나서 식사 준비를 했다. 6시 15분에 식사를 했다. 설거지는 구 선생님이 했다. 그 뒤로도 임 선생님이 식사 준비를, 구 선생님이 설거지를 맡아서 했다.
8시에 출발했다. ‘무위사(無爲寺)’에 갔다. 고적기에 무위사가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했다. 아직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우선 담장이라도 제대로 치면 한결 나아보일 터인데 아직 재력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 옛날의 대웅보전도 빈 터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극락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극락전의 탱화를 감상했다. 국보 제13호다. 흙판에 새긴 탱화였다. 좌우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화려하다. 그러나 아래 벽화는 요새 그린 듯 새 그림이다.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 벽화를 뜯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또 거기에는 ‘아미타여래삼존도(국보 제313호)’가 있다. 그렇지만 성보박물관이 동절기에는 휴관이어서 탱화를 감상하지 못했다.
극락전 왼쪽에 ‘선각대사편광탑비’가 서있었다. 국보 제507호다. 임경유 선생님이 비문 안내문에서 선각대사 법명이 ‘형미’임을 확인하고 형미는 ‘왕건’ 드라마에서 궁예에게 당신은 미륵이 아니라고 해서 철퇴로 얻어맞아 죽은 대사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 드라마를 본 기억이 난다. 선각대사는 고승이긴 했지만 비운의 스님이었다. 후세에 왕건 이후의 임금들이 대사를 추증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무위사에서 걸어서 ‘월남사지’로 갔지만, 우리는 차로 갔다. 먼저 ‘삼층석탑’으로 갔다. 아까 무위사에서도 그랬지만 선생님이 인솔하는 학생들이 여기도 뒤좇아 왔다. 고적기에는 ‘모전5층탑’으로 되어 있지만 착오이신 듯하다. ‘삼층석탑’이었다. 장엄했다. 보물 제298호다. 석탑 뒤편에 월남사라는 낡은 건물이 있었다. 물론 복원한 것은 아니다. 명칭만 ‘월남사’다. 그런데 석탑비가 안 보인다. 그래서 인솔한 선생님에게 장소를 아시는지 물었으나 그도 몰랐다. 가까운 데 있을 것 같아 찾아보았다. 안사람이 탑 왼쪽 100미터 떨어진 지점인 저쪽에 석탑비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리로 찾아갔다. 비가 비각 속에 들어 있었다. ‘진각국사비’였다. 보물 제313호다. 이수는 없고 탑신도 반쪽이 떨어져 나간 듯 귀부의 홈과 맞지 않는다. 잠시 후 아이들도 여기 찾아왔다.
우리는 이번에는 ‘백련사’로 향했다. 처음 계획은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임 선생님은 ‘다산초당’ 쪽에서 차를 대기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다산초당’을 가는 것은 포기했다. 우리는 백련사에서 구룡포의 전망을 보고 법당에 들어가서 참배했다. 그리고 나와서 창건기념비를 보았다. 여기는 초의선사가 주석한 절로 ‘다신론’과 ‘동다송’을 쓴 절이다. 또한 정약용과 김정희가 모여 정담을 나누던 곳이다. 그 기념으로 나는 찻집에서 차 한 잔 마시자고 제안했다. 교장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시어 임 선생님을 붙들었다. 교장 선생님이 차 값을 내시겠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만경다설(萬景茶說)’이라는 찻집에 들어섰다. 우리는 떡차를 주문했다. 나는 떡차가 다과도 같이 하는 차인 줄 알았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차를 떡시루에 쪄서 보관했기에 ‘떡차’라고 불리는 차였다. 한자로는 ‘병다(餠茶)’였다. 여러 번 우리는 돌아가면서 차를 따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에 일담 스님이라는 스님이 합석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젊고 학구열 있는 스님이었다. 스님은 해남 대흥사의 마애불을 추천했다. 담화를 나눈 후 우리는 찻집에서 나왔다. 스님은 법당에서 대웅전의 민화 및 조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스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장 교장은 감사의 뜻으로 기와불사를 했다. 이제 시간이 지체되어 다산초당을 가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떠나려는데 스님이 점심 공양을 하라고 했다고 한다. 우리는 때맞춰 절밥을 먹는 행운을 누렸다. 과반을 했다. 안사람이 5,000원을 달라고 한다. 아줌마에게 사례비로 주려고 한 것이다.
이번에는 승주의 ‘송광사’로 향했다. 거리가 멀어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송광사’는 여러 번 왔지만 이번에 임경유 선생님은 여기에 올 이유가 있었다. 형님이 송광사 주지에게 선물을 전하라는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그것을 구실로 해서 우리 모두를 무료입장하게 했다. 들어가는 입구에 불교역사문화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2014년에 개방한다고 한다. 우리는 우화교를 지나 성보박물관에 들렀다. 거기서 고종제서(국보 제43호)와 금동요령(보물 제176호), 고봉국사주자원불, 금강저, 능견난사, 자정국사 사리함을 찬찬히 보았다. 목조삼본불감(국보 제42호)은 실물은 보지 못하고 안내원이 보여준 책의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대웅전에 들렀다. 대웅전에 전에 불이 나서 새롭게 지은 건물이다. 웅장하게 잘 지었다. 그러나 역사성은 없는 건물이다. 사찰은 커서 맞배지붕, 팔작지붕, 우진각 지붕, 사모지붕 등 다양한 형태의 지붕이 다 보였다. ‘국사전’은 출입금지여서 먼발치에서 건물만 바라보았다. 임 선생님과 장 교장은 선물을 전달하러 스님을 만나러 갔다. 다녀온 뒤 이야기를 들으니 주지 스님은 지금 출타 중이라 없고 제2인자인 스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찾아온 손님에게 방에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고 차 대접도 하지 않고 국사전도 보여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냥 무심하게 선물만 건네주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송광사가 불친절하다고 다시 오지 않겠다고 우리에게 여러 번 말했다.
우리는 이제 순천으로 향했다. 가급적 내일 가게 될 ‘순천만자연생태공원’에 가까운 위치에 모텔을 잡았다. 조금 이른 시간이어서 임 선생님은 모텔에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였으나 우리는 식당에서 소개한 식당으로 갔다. 생선구이정식을 시켰는데 음식이 풍성해서 만족스러웠다. 임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음악 이야기를 풍성하게 늘어놓았다.
모텔에 돌아와서 교장은 고스톱을 하자고 하였으나 다들 그리 뜻이 없었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방에서 내일 행선지 논의를 했다. 코스를 생태공원, 선암사, 연곡사로 해서 전주에서 숙박하기로 뜻을 정했다.
12월 29일(목)
6시 30분에 일어났다. 날로 몸이 쳐지는 기분이다. 첫날의 된장찌개와 달리 오늘은 김치찌개다. 식사를 마치고 7시 30분에 출발했다. 8시에 자연생태공원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있으나 아직 입장료는 받지 않고 있다. 들어갈 때 보니 매표소 직원이 매표소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여태까지 입장료를 낸 적이 없다. 그야말로 짠물여행을 하고 있다.
우리는 갈대숲을 지나 용산전망대 쪽으로 걸어갔다. 먼저 다리가 나오고 배들이 보인다. 안사람은 배에 관심을 보였으나 배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계속 걸어갔다. 가는 도중 휴식처도 있고 배를 이용하여 휴식처로 만들어 놓은 곳도 있었다. 임 선생님이 방심하다가 서리가 깔린 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다. 건너편은 하회마을 강변 너머 절벽 같은 인상을 주었다. 구 선생님은 저기에 정자를 세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용산 전망대까지는 700미터 거리. 교장 선생님은 우리에게 갔다 오라고 했다. 안사람과 교장 선생님은 돌아가고 우리는 전망대로 향했다. 가면서 보니까 갔다 오는데 40분 걸린다고 한다. 생각보다 먼 거리다.
우리는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도중 갈림길이 나온다. ‘명상의 길’과 ‘다리 아픈 길’이었다. 우리는 당연히 다리 아픈 길을 택했다. 계속된 계단 길로 다리가 아프다기보다는 호흡이 가쁜 길이었다. 모처럼 산에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아직 다리가 풀리지 않은 상태로 올라가는 등산길이어서 숨이 가빴다. 이 산길 올라가면서 숨이 가쁘면 어떻게 그 먼 설악산 마등령은 올라갈 수 있었는지 다 정신력 문제가 아닌가 내 자신을 다시 생각했다. 등성이에서 보니 빨간 옷의 교장선생님과 파란 옷의 안사람이 돌아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부터는 평지길이다. 수월했다. 보조전망대를 거쳐 용산전망대로 갔다. ‘용산전망대’는 몇 층 건물인데 우리는 꼭대기 층에서만 머물렀다. 바다와 갯벌과 갈대숲이 그림같이 펼쳐졌다. 한참 완상하다가 돌아왔다. 내려와 다시 갈대숲을 걸으면서 되돌아보니 우리가 건너고 내려다보았던 구름다리며 전망대가 보였다. 아까는 안 보였었는데. 입구에 생태체험관에도 들렀으나 안사람에게 전화하니 지금 막 차에 탔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둘러보지 않고 나왔다. 나오는 길에 시장해서 빵 6개와 과자 2개를 샀다. 비쌌다. 돈은 내가 지불했다.
이번에는 왜성대로 갔다. 이름은 ‘순천왜성’이었다. 왜장 고니시유키나가[소서행장]가 세운 산성이다. 본진 3첩의 견고한 석성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역으로 세운 성이겠지만 일본인들의 깔끔한 성격을 담은 성이어서 다르게 보였다. 묵직한 돌을 위에 올려놓은 형태이고 비스듬한 성벽의 모습도 쓰러지지 않도록 견고하게 쌓았다. 바닷물을 끌어 들여 해자의 모습도 조성해 놓았다. 우리는 언덕 위에 올라갔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지였다. 앞으로 바다가 시원하게 보였다. 이번 여행 중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곳이었다. 왜성대는 아버지 글 아니었으면 몰랐을 장소였다. 시에서는 이곳을 관광지로 적극 알릴 필요가 있다. 일본 관광객이야 필수 코스이겠지만 우리에게도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다. 적극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제일 높은 곳에 ‘천수대(天守臺)’의 건물지가 있었다. 우리는 그 위로 올라갔다. 건물은 없어졌다. 여기서 적군 동향도 관찰하고 지휘하는 곳이기도 하고 때로는 제사도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건물이 사라졌다. 아마도 우리나라 군인들과 전쟁 중 불타버렸거나 아니면 그 후에 일본인이 세운 건물이어서 때려 부수거나 했을 것이다. 내려오면서 안사람이 각진 나무토막을 가지고 가라고 나에게 주었다. 이는 아마도 캠프파이어용으로 놓아 둔 목재인 것 같다. 안사람은 이 나무토막을 차받침대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가지고 내려와서 임 선생님에게 전해 주었다.
이번에는 ‘옥천서원’으로 갔다. 먼저 ‘임청대(臨淸臺)’에 도착했다. 그러나 ‘임청대’는 없었다. 대신 ‘임청정(臨淸亭)’이라는 정자가 시멘트제로 만들어져 천변에 세워져 있었다. 다소 실망이다. 천변은 잘 정비는 되어 있으나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고 시멘트만 잔뜩 발라 놓은 모습이었다. 옥천서원 옆에 ’임청대(臨淸臺)‘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퇴계의 글씨라고 한다. 실제 ’임청대(臨淸臺)‘는 동쪽 30미터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건너편 천변 쪽에 서있었다는 것이다. ’옥천서원‘은 문이 잠겨 있었다. 김굉필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현판에 ’경현문(景賢門)‘이라는 판액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 ’현(賢)‘ 자의 또 ’우(又)‘ 자 부분이 충성 ’충(忠)‘ 자로 쓰여 있는 것이 특이했다. 우리는 담장 옆에서 건물 안을 들여다보고 나와야 했다.
이번에는 ‘선암사(仙巖寺)’를 간다. 가는 도중에 기사식당에 들렀다. 임경유 선생님이 식당 주인을 거듭 칭찬하자 주인은 신이 난 듯 했다. 서비스를 잘했다. 우리는 식사를 푸짐하게 하고 ‘선암사’로 갔다. ‘선암사’는 문화부장관을 지냈던 유홍준이 적극 추천한 곳이기도 해서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내가 ‘선암사’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린 것은 주지 스님을 ‘적묵당’에서 선거한다는 안내문이었다. 민주화 바람이 사찰에도 불었는지 요새는 주지 스님도 선거로 뽑는가 의아했다. 선암사 입구까지는 한참 걸어가야 했다. 앞에 조계산이 우뚝 서있다. 여름철에 왔으면 한번 올라가 보고 싶은 산이었다. ‘승선교(昇仙橋)’ 앞에 왔다. 정교하게 쌓은 아치형 다리다. ‘강신루(降神樓)’를 지나 이제부터 사찰로 들어간다. 달걀모양의 연못에 중도를 둔 ‘삼인당’을 지나서 ‘대웅전(보물 제1311호)’에 들어가 참배했다. 다포계 지붕으로 내부는 우물식 천장이었다. 그 뒤편에 조사전, 팔상전, 불조전이 나란히 서있다. 선암사는 천혜의 위치에 나무 조경이 잘 되어있고 건물이 단정하게 배치된 사찰이었다. 전체적으로 자연과 조화가 잘 되어 있는 사찰이었다. 이어서 ‘원통전’으로 갔다. ‘원통전’에는 ‘대복전(大福田)’이라고 쓴 순조의 친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뒤편의 ‘응진당’으로 갔다. 바로 옆 ‘달마전’의 주방이 문이 잠겨 있었다. 교장의 요청에 의해 우리는 주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주방은 차 달이는 곳이었다. ‘조왕대신위’라는 글이 걸려있었다. 사찰에서 민속신앙으로 부엌신인 조왕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부엌을 지나서 ‘수각’을 볼 수 있었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을 여러 곳의 수조를 지나 물이 흐르게 하는 곳이었다. 아름다웠다. 우리는 내려와서 ‘무량수각(無量壽閣)’으로 갔다. 추사의 글씨라고 구 선생님이 알려 주었다. 교장은 경관을 감상하기 좋은 위치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곳은 소나무와 사찰 그리고 그 뒤편의 진산이 잘 어울리는 명소였다. 우리는 거기서 사진도 찍고 한참 머물다가 내려왔다. ‘성보박물관’은 무슨 이유에선지 휴관이어서 보지 못했다.
이어서 우리는 구례의 ‘연곡사’에 갔다. 입장료는 내지 않았다. 우리 모두 노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입장하라고 했다. 시간이 없어 대웅전에서 참배하지는 않았다. 바로 비로 올라가서 동부도, 북부도, 서부도 순서대로 보았다. ‘동부도탑’은 국보 제53호다. 정교하기가 쌍봉사탑 못지않다. 서까래 끝부분이 연꽃을 새긴 모습은 없지만 상륜부가 완벽하고 탑신부의 그림도 세밀하게 훼손됨이 없이 완벽하다. 나는 상륜부의 ‘가룽빙가(머리는 사람이고 몸통은 새인 상상의 새)’ 조각을 안내판에서 본 대로 설명해 주었다. 교장은 처음 들은 말이었는지 그 이름을 여러 번 되뇌었다. ‘동부도비(보물 제153호)’를 보았다. 역시 비신이 없어 보물로 그친 것인데 귀부의 등 부분을 새 날개를 조각해 놓은 것이 특징이었다. 전에 와 보았어도 그 점은 생각 못했는데 역시 여러 번 그리고 꼼꼼히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 다음 북부도로 향했다. ‘북부도탑’도 국보 제54호다. 좀 ‘동부도탑’에 비해 떨어져 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탑 전체가 상륜부까지 완벽하고 조각도 섬세하다. 또 좀 뚱뚱한 여인의 모습의 탑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어서 ‘서부도탑’으로 갔다. 보물 제154호다. ‘소요대사탑’이다. 안사람이 탑 뒷면에 ‘소요대사(逍遙大師)’라고 명기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효종 원년(1650년)에 건립된 탑이었다. 아버지는 그 기록을 못 보셨는지 고려시대 탑이라고 했다. 집에 와서 고쳤다. 이어서 ‘현각선사탑비’를 보았다. 귀부 위에 이수만 얹혀 있다. 이수가 화려했다. 용 여섯 마리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절에서 내려왔다.
이제 전주로 간다. 날이 어두워졌다. 좀 늦었으면 연곡사비도 보지 못하고 갔을 것이다. 이제 화엄사는 포기해야 하고 전주로 직행한다. 지리산을 관통해서 구례로 가고 거기서 고속도로를 타고 전주로 가면 된다. 지리산 관통 터널은 무척 길었다. 6킬로라고 했다. 작년의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최근에 만든 터널이다. 이름을 물어보니 ‘천마터널’이라고 한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터널이 아닌가 싶다.
7시 30분에 전주에 도착했다. 홀인원 모텔에 투숙했다. 며칠 사이에 주인이 바뀌어 5천원을 더 주어야 했다. 이번에는 선지해장국을 시켜 먹었다. 임 선생님이 어머니에 대한 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라 지루했다.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서 나오자고 했다. 교장과 안사람은 끝까지 남아서 이야기를 들어준 것 같다. 모텔에 들어와서 면도도 하고 손톱, 발톱도 깎았다. 11시 넘어서야 임 선생님이 이야기를 마치고 들어왔다.
12월 30일(금)
6시 30분에 기상했다. 밤에 춥게 잔 탓인지 그간 여행에 몸이 지친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옷을 두껍게 입었다. 오후에는 열도 났다. 오늘은 화장실만 세 번 들락거렸다. 열을 푸는 데 좀 효과가 있는 듯하다. 점심때는 안사람이 준 약도 먹었다. 좀 나아졌다. 오늘 아침도 임 선생님이 준비하고 구 선생님이 설거지했다.
우리는 8시 반에 출발하여 9시 정각에 ‘전주박물관’에 도착했다. 거기서 ‘익산왕궁리 사리장엄구(국보 제123호)’를 보았다. 임 선생님이 한지박물관에 대해 물어본 결과 그 재단은 독일 재단에 팔렸고 거기에 소장된 국보 위치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종이박물관 가는 것을 포기하고 부여 박물관으로 가기로 했다.
먼저 ‘능산리 고분군’에 들렀다. 매표원이 자리에 없어서 그냥 입장했다. 임 선생님이 기념관에 들르지 말고 바로 고분군에 가자고 했다. 내가 기념관도 좋다고 들르자고 했다. 나는 전에 안사람과 같이 왔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같이 온 것은 아니었다. 무령왕릉에 같이 온 것을 여기에 같이 온 것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들어 온 것이 좋았다. 안사람의 요청에 의해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들었다. 오사카 교민인데 부여 사람 남편을 만나 살고 있었다. 발음만 문제일 뿐 달변이었다. 한국 사람이 다 된 모습이었다. 임 선생님이 물어 본 결과 국적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통일교 신자였다. 우리는 소개한 대로 나와서 모형 굴도 보고 언덕배기에 있는 의자왕 및 왕자의 단소를 보았다. 그리고 고분군을 지나서 내려왔다. 이제 이곳 이름은 ‘백제왕릉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번에는 정림사지 박물관으로 갔다. 전에는 정림사지 탑만 있었는데 이제는 박물관도 만들어 놓고 입장료도 받고 있었다. 나는 박물관에서 불교문화에 대한 공부를 좀 하고 나왔다. 그리고 정림사지 탑으로 갔다. 전에는 위치만 파악하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꼼꼼히 보았다. 그리고 요청에 의해 안사람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 상당히 시장하다. 하지만 우리는 부여박물관으로 향했다.
부여박물관에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를 전시하고 있었다. 사실 이게 박물관의 전부라고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작품이다. 연꽃과 산봉우리로 상징되는 백제인의 이상세계를 완벽하게 구현한 당대 최고 걸작품이었다. 이는 바로 아까 본 ‘백제왕릉원’의 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 제288호)’과 높이 21.1센티의 자그마한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293호)’도 감상했다. 그리고 판매점 앞으로 나왔다. 판매점에 백제금동대향로의 모조품이 있었다. 임 선생님이 알아 본 결과 그 모조품도 값이 무려 240만원이나 한다고 했다.
우리는 점심때가 지나 무척 시장했다. 그러나 구 선생님이 가자던 식당을 찾지 못해 우리는 공주로 갔다. 시장해서 하는 수 없이 간식으로 요기했다. 3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부여 박물관에 도착했지만 주변에 식당이 없다. 나는 공산성 부근의 식당에 가자고 했다. 옛날 안사람과 공주에 왔을 때 공산성 부근의 ‘고마나루’란 식당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임 선생님은 추어탕을 먹자고 했지만 식당에 들어가서 보니 7,000원 하는 돌솥밥이 있었다. 그것을 먹자고 했다. 직원들은 점심때가 지나 자기들끼리 식사하는 시간이었다. 돌솥비빔밥은 아니었다. 돌솥밥이었다. 여자들에게는 괜찮은 식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자들에게는 그리 좋은 식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 관계상 ‘공산성’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아까 왔었던 공주박물관에 갔다. 무령왕실에 갔다. 사실 공주 박물관은 그 실이 전부라고 할 정도다. 나는 배도 아프고 전에 와보기도 해서 건성으로 보았지만 다들 진지하게 본다. 여기에 출토된 유물들은 국보가 많다. 관장식(왕, 국보 제154호), 귀걸이(왕, 국보 제156호), 석수(국보 제162호), 귀걸이(왕비, 국보 제157호), 관장식(왕비, 국보 제155호), 글자 있는 용장식은팔찌(왕비, 국보 제160호), 청동거울(왕, 국보 제161호),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247호), 계유명천불비상(국보 제108호) 등이 있다. 그 외에 받침 있는 은잔 등 무늬가 화려한 작품을 감상했다. 나는 이 중 몇 개만 자세히 보았다. 다른 실은 들르지 않고 박물관에서 나왔다.
임 선생님은 무령왕릉으로 걸어가자고 했다. 나는 전에 무령왕릉에 버스를 타고 갔다고 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이내 도착했다. 그런데 공사 중으로 내년 4월에 개관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로 가기로 했다. 휴게소에서 들르고 다시 출발하는데 임 선생님 따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위치를 알려드리고 임 선생님께 연락드리겠다고 했다. 나는 저녁 식사는 서울서 하자고 했다. 그런데 임 선생님은 서울은 주차 공간이 마땅치가 않다고 죽전에서 식사하자고 했다. 안사람은 부여 식당에서 먹은 것이 탈이 난 것 같다고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자율식당에 가서 간단히 먹을 음식만 주문했다. 나는 따님에게 전화해서 임 선생님께 드렸다. 따님이 지금 임 선생님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식사 후 우리는 남은 돈을 계산했다. 구 선생님이 38만원 남았다고 계산한다. 그간 짠물여행을 해서 돈이 예상보다 많이 남은 것이다. 배분에 대해서 논의했다. 논의 결과 각각 4만원씩 배분하고 남은 돈은 주유비, 세차비 해서 임 선생님께 드리자고 의견을 모았다. 임 선생님은 너무 많다고 교장과 나에게 돈을 돌려주었다. 교장은 받지 않았다. 나만 2만원 받았다. 결과적으로 내가 처음에 주장했던 5만원씩 받은 셈이 되었다. 교장은 임 선생님을 생각해서 호두과자를 사 주었다. 그리고 교장은 나에게 또 만날 것을 요구했다. 아버지 고적기 인쇄물도 달라고 했으나 틀린 부분이 있으니 좀 고쳐서 만날 때 드리겠다고 했다. 우리는 드디어 서울에 도착했다. 강남에서 교장선생님 내려 드리고, 강남역에서 구 선생님, 류 선생님과 작별했다. 그리고 임경유 선생님 댁에서 임 선생님과 작별했다.
돌아오는 길에 안사람은 호삼과 전화했다. 호삼이가 가방이 필요하다고 한 모양이다. 집에 들르기 전에 안사람은 약국에 들러 약을 샀다. 그리고 나를 집에 내려주고 호삼을 태우고 이마트로 갔다. 호삼의 여행 가방을 사 주러 간 것이다. 내가 집에 들어와 보니 호일은 자고 있다. 짐 정리하고 샤워했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안사람과 호삼이가 돌아왔다. 숨 가쁜 4박5일의 여정이었다. 이제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나는 밤늦도록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들었다.
첫댓글 남도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상세하게 잘 정리하셔서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정 게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