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벽돌 건축기술에 ‘감탄’ 잃어버린 우리 역사에 ‘한탄’
벽돌에서 배운 나라사랑
“가로 30㎝ 세로 15㎝ 크기의 벽돌
중국에선 사용하지 않는 곳이 없어
만들고 운반하기 쉽고 쌓기도 편해”
벽돌로 보수 중인 ‘봉황성’을 보며
“‘왕검성’ ‘평양’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우리의 옛땅 요동에 있던
것”
기사사진과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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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로 담을 쌓는 청나라
기술자(1793년 영국 화가 그림). 필자 제공 |
놀라운 벽돌 건축
1780년 7월 29일 점심때 연암
박지원은 끼니를 거르고 봉황성 마을 구경에 나섰다. 변방답지 않게 번화한 길 양쪽에 즐비한 상가의 창들은 아름답게 조각됐고, 문에는 비단이
드리워졌으며, 기둥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난간은 붉게 칠해졌고, 푸른 현판에는 금색 글자들이 멋지게 쓰여 있다. 상점은 진기한 물건들로
채워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 중에서 연암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은 벽돌이었다.
“중국 건축은 벽돌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로 30㎝, 세로 15㎝ 크기의 벽돌은 두 개를 가지런히 놓으면 정사각형 모양이 된다. 두께는 6㎝다. 벽돌은 하나의 틀에서
찍어내는데, 귀가 떨어져 나간 것, 모서리가 뭉뚝해진 것, 모양이 뒤틀린 것은 절대로 사용되지 않는다. 공들여 지은 집을 망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벽돌이 건축에 얼마나 이로운지 우리는 모른다. 중국에서는 담장은 물론 방 안팎에 벽돌을 사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 넓은
뜰에는 마치 바둑판을 그려놓듯이 반듯하게 벽돌을 깔아놓는다. 집은 벽에 의지하며, 위는 가볍고 아래는 든든하게 벽돌로 쌓는다. 기둥은 벽돌
담장에 깊이 박혀서 비바람을 피하도록 만들어진다.
벽돌집은 불에 타거나 도둑이 뚫고 들어올 걱정이 없다. 참새·쥐·뱀·고양이에 의한
피해도 없다. 한가운데 문을 닫으면 집 전체가 성벽에 둘러싸인 보루가 되어 집 안 물건들은 궤짝 속에 넣은 것처럼 안전하다. 중국인은 집 짓는
데 우리같이 많은 흙과 나무를 쓰지 않으며, 대장장이나 미장이의 도움도 필요 없다. 벽돌만 구워내면 집은 거의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기사사진과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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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계관방지도. 맨 아래 봉황성책문,
봉황산, 봉황성 등이 표기돼 있다. 보물 제1542호. 서울대학교 소장 |
“봉황성은 요동의 평양”
중국 건축물들을 살펴보는 동안, 연암은 마침 폐허가 돼버렸던 옛 봉황성
터가 벽돌로 새롭게 보수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벽돌의 쓰임새보다는 봉황성에 얽힌 우리 역사가 번뜩이고
있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고구려에서 큰 새를 안시(安市)라고 불렀고, 조선에서도 봉황을 ‘안시’라고 부르기 때문에 봉황성을
안시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소개했다. 나아가 옛날부터 우리나라에는 고구려의 양만춘 장군이 안시성을 공격해 오는 당나라 태종의 눈을
쏘아 맞혀서 퇴각하도록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면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알을
잃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고증할 수는 없으나, 봉황성이 안시성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분명히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당서(唐書)’를
보면, 안시성은 평양에서 200㎞쯤 (서쪽으로) 떨어져 있으며, 봉황성은 ‘왕검성’이라고도 부른다고 적혀 있다.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도 부른다고 쓰여 있다.”
연암은 두 기록을 통해서 봉황성은 요동에 있었던 평양이며, 안시성은 평양에서 200㎞의
거리에 있던 성이었다고 나름대로 추정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조선인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경종을 울렸다.
“우리가
기껏 안다는 것은 지금의 평양뿐이다. 만일 누가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말하면 깜짝 놀란다. 더욱이 평양이 요동에도 있었다고 하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고 야단법석을 떤다. 이는 우리 조상이 싸워보지도 않고 영토를 스스로 축소한 데서 비롯된다. 즉,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의 옛 땅에 설치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으로 끌어넣은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만이 아니라 여진도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자료를 참고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있었고, 절반은 여진에 있었다. 이후 고구려가 한사군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으면서
우리 영토는 한반도를 벗어나 광대한 지역에 뻗쳤다.
7세기 후반 신라가 삼국통일은 이루었으나, 그 영토와 나라의 힘은 고구려의
강대함에 훨씬 못 미쳤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후세의 옹졸한 자들은 평양이라는 옛 이름을 연모한 나머지 중국 역사책의
내용을 들이대며 여기가 패수요, 저기가 평양이요 하면서 당치도 않은 수작을 한다.”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되새겨본 연암은 봉황성
터 보수공사로 눈을 돌렸다. 성의 주위는 불과 1.2㎞에 불과하지만, 벽돌을 수십 겹으로 쌓아서 모습이 웅장하게 변하는 중이다. 기중기를 이용해
편리하게 벽돌과 흙을 나르는 것을 흥미롭게 관찰한 연암은 온종일 보고 배우고 싶지만 갈 길이 바빠서 공사 현장을 떠나는 자신을 한탄할 정도로
애국자였다.
벽돌예찬론 강연
봉황성 터를 시찰한 뒤 연암은 아침 식사를 했던
집으로 되돌아와서 점심을 먹은 다음, 작별을 아쉬워하는 젊은 집주인에게 청심환 한 개를 선물했다. 조선의 청심환은 중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선물
중 하나였다. 연암은 어의 변계함과 사절단 대표의 수행 무관이자 진사(進士)인 정각과 함께 송참이라는 고을을 향해서 출발했다.
불볕더위에 말 타고 가면서 연암은 정각에게 ‘벽돌예찬론’ 강연을 시작했다.
“우리처럼 돌로 성을 쌓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오. 벽돌은 몇만 개라도 같은 모양으로 만들 수 있고, 운반하기 쉬우며, 쌓는 데에도 편리합니다. 반면에 돌은 산에서 떼어내 수레로
운반하는 데 무척 힘이 듭니다. 더구나 돌을 깎고 다듬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쌓을 때도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뿐인가요?
언덕을 깎고 돌을 입혀야 하는데, 몸이라고 할 수 있는 흙에 옷이라고 할 수 있는 돌을 입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제로 해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더구나 돌은 울퉁불퉁하므로 작은 조약돌로 돌 사이를 진흙으로 메워놓으니 장마 때면 예사로 무너집니다.”
이렇게 끝없는
강연이 이어지는 동안, 정 진사는 말 위에서 고개를 앞으로 떨군 채 졸고 있은 지 오래다. 연암이 부채로 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어른의 말씀 중에
졸고 있다고 꾸짖자, 번쩍 깬 정 진사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꾸한다.
“말씀 모두 잘 들었소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자는 것만 못하지요.”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