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출신 조선통신사 '이예 선생' 동상 건립
서울 국립외교원서 제막식…市, 동상 제작비 일부 지원
<25일 서울 서초구 국립외교원에서 충숙공 이예 선생 동상을 제막한 뒤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울산 출신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통신사인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1373~1445) 선생의 동상이 서울 국립외교원 앞뜰에 세워졌다.
(사)충숙공 이예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이병해)는 25일 오후 국립외교원 강당 앞뜰에서 선생의 동상 건립 제막식을 가졌다.
동상은 가로 65㎝, 세로 65㎝, 높이 195㎝ 규모의 청동주물 입상으로 제작됐다. 동상은 화강석으로 된 60㎝ 높이의 받침대 위에 세워졌다. 디자인은 강희덕 고려대 조형학부 명예교수가 맡았다. 동상 제작비 1억1000만 원 가운데 8000만 원은 울산시가 지원했다.
이예 선생은 태종·세종 대에 43년간 대일외교에 진력했다. 모두 40여 회 일본에 파견돼 양국의 외교 현안을 해결했다. 왜구 등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667명을 귀환시키기도 한 노련한 전문 외교관이었다. 또 한·일 최초의 외교협약인 계해약조의 체결과 오늘날 입국사증(비자)에 해당하는 문인제도의 정약을 주도했다.
선생은 71세까지 외교 현장을 지켰으며, 벼슬은 종2품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외교부는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된 외교 업적을 기려 2010년 선생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했다.
국제신문 방종근 기자 jgbang@kookje.co.kr
[도청도설] 통신사의 길
조선 초 문인(文引)제도란 게 있었다. 일본인을 상대로 한 일종의 입국사증(비자)이다.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이 발행권한을 쥐어주었다. 조선으로 들어오는 왜인들을 대마도주가 직접 관리하게 해 당시 골칫거리였던 왜구 문제를 풀려는 외교술이었다. 세종 25년(1443년) 잦은 왜구 노략질을 막기 위해 일본과 맺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통해서다. 부산포, 내이포(진해), 염포(울산) 등 삼포 개항 조치와 함께 나온 것으로 왜구 활동 억제에 톡톡히 한몫을 해냈다. 이 약조를 이끌어낸 이는 울산 출신 이예(李藝) 선생이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왜구에게 모친을 빼앗긴 그는 43년간 40여 차례나 일본을 왕래할 정도로 조선 초기 대일 외교 개척자였다. 기관(記官·행정기록담당)이란 아전신분의 그가 정식 벼슬길에 오른 계기도 왜구가 제공했다. 1397년 왜구에 잡혀간 울산군수를 구해오면서 조정의 눈에 든 것. 태종이 그를 1400년 회례사(回禮使) 윤명의 일본 수행원으로 임명해 날개를 달아줬다. 세종실록지에 따르면 1401년 50명을 시작으로 1416년까지 15차례 걸쳐 왜구에 잡혀간 667명의 조선인을 그가 데려왔다고 한다. 오직 말로써 상대를 설복시킨 결과라니 그의 협상력이 탁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서희의 담판 외교술에 견줄 만하다.
지금으로 치면 일본통이었던 그에 대한 관심은 일본에서 뜨겁다. 대마도 사카의 원통사(圓通寺) 입구에는 '통신사 이예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1408년에 대마도주가 세운 이 절은 양국 관계에 끼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2010년엔 서일본신문 기자가 그의 일본 행적을 좇아 '현해탄을 넘은 조선외교관, 이예'란 책을 냈다. 2011년 나온 '최초 조선통신사, 이예'(가나즈니 노리유키) 역사소설은 이듬해 오페라로 만들어져 무대에 오를 만큼 반향이 컸다.
국립외교원이 어제 충숙공 이예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는 소식이다. '믿음의 사신'인 통신사의 길을 최초로 연 분이다. 선생은 현해탄을 오가며 양국 문화교류에도 큰 기여를 했다. 불경과 각종 서적 등을 일본에 전하고 물을 이용한 자전식 물레방아 등을 이 땅에 선보인 인물이기도 하다. 선린외교의 힘을 입증해보인 산증인이다. 국립외교원엔 이제 서희 동상와 이예 동상이 나란히 서 있다. 국가를 지키는 데 든든한 군사력 못지 않게 외교력도 중요하다. 지구촌을 누빌 유능한 '제2의 이예'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국제신문 남차우 수석논설위원 nam@kookje.co.kr 2015-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