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을 보호하듯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는 토림이 마치 수만의 기병이 열병을 하며
왕궁을 호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협곡 밑으로 수트레이 강이 뱀 꼬리 같은 선을 그리며 흐른다.
무너져 내린 수많은 흙벽사이로 미로 같은 길이 거미줄처럼 나있고
경사면 성곽사이로도 궁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사이길 들이 연결돼 있다.
왕궁 밑 오른 쪽 계곡의 일부지역은 유일하게 초록색의 나무와
풀이 자라고 물이 흐른다.
구게 왕국은 9세기 토번왕조가 붕괴되면서 사분오열될 때 티벳 서부지역에서
세력을 떨친 지방국가였다.
토번의 마지막 왕 랑다마(郎達瑪)가 암살당한 뒤 벌어진 내란상태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손자 지더니마(吉德尼瑪)왕자가 서쪽 변방인 아리(阿里)지역 포랑 근처로
도피해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
지더니마는 후에 아리 지역을 세명의 왕자에게 나눠줬는데, 이들 나라가 라다크 왕국과
푸란 왕국, 그리고 구게 왕국이다.
셋째 왕자인 더짜오(德朝)가 세운 나라가 구게왕국이다.
구게 왕국는 700여 년 간 16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한 때는 서쪽으로 캐쉬미르 일대와
지금의 파키스탄 일부까지도 지배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은 1997년 히말라야 넘어 4백km 떨어진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이탈리아 학자가 구게 왕국의 역사와 계보가 적힌 문서를
발굴하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모든 게 미스터리 투성이였던 사라진 구게왕국의 신비한 베일이 일부 벗겨지면서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자동차로도 들고 나기가 쉽지 않은 궁벽한 오지이지만 옛날 이 지역은 실크로드와
차마고도가 교차하며 연결되는 주요한 무역, 교통의 요지였다는 사실이
돈황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확인되고 있다.
왕국주변에서 많이 나는 사금과 암염(바위소금)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번영을 누린 것으로 사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당시 구게 왕국에 중국, 티벳, 인도, 파키스탄과 이슬람상인 들이 몰려와
사금, 차, 소금, 보석, 낙타, 말 등 다양한 상품으로 국제교역을 했다.
서부 티벳의 맹주였던 구게 왕국이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진 것은 하나의 미스터리다.
천재지변 설, 이슬람 등 외부세력의 침공 설 등 여러 전설 같은 얘기들이
민간에서 설왕설래 되고 있다.
가장 지배적인 견해는 계속된 산림벌채와 갑작스런 기후변화로 국토가 황폐화, 식량생산이
어려워지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1630년 인근 국가인 라다크의 침공으로 왕국의 수도인
차파란(현 구게 왕국 유적지)이 무너지면서 전멸을 당해
전설 속의 왕국이 됐다는 것이다.
구게 유적지는 70년대 중국 고고학계에서 대대적인 발굴 작업으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발굴 즉시 중국 국가1급 문물로 지정되 관리될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큰 값지고 귀중한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화살이 10만개이상 나오는 등 창, 칼, 갑옷 등의 무기들이 대거 출토됐다.
이들 전쟁무기 유물이 구게 왕국 멸망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수트레이강 기슭에서는 대규모 사금광 유적이 발굴되고 동굴에서 생산이 안 되는
살구 씨와 포도 씨가 발견된다.
몇몇 문헌에 구게 왕국을 금이 넘쳐나는 황금의 나라로 표현한 것 처럼
사금광이 구게 왕국을 지탱해주는 경제적 주춧돌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불교벽화에서 유라시아 문양과 양식이 발견돼 당시 외부세계와의 활발한
교역과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구게 왕국 주변 자다현에는 아직도 미 발굴 유적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2년 양치기 목동이 비를 피하려 동굴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화려한 석굴벽화를 발견,
통가 석굴 군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또 통가석굴서 2km떨어진 곳에서도 벌집처럼 들어선 피양 석굴 군이 발견됐다.
이들 석굴군은 구게 왕국의 주변도시로 석굴수가 1천1백50개이고 이중 20개의
석굴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유적지를 돌아보는 동안 한족과 티벳인 관광객 2~3개 팀 외에는 없어
한갓지고 여유롭게 관광을 잘했다.
역사, 문화, 지리, 자연경관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관광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 교통인프라 등 여러 제약요건으로 관광지 개발이
본격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중국은 구게 유적지를 중점문화제 보호지역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유적지 밑의 강가에 있는 자부랑은 20여호 남짓한 오지마을로 초록색 나무가
주위에 제법 있다.
풀이 자랄 수 없는 진흙황무지라 그런지 야크 등 가축이 눈에 띠지 않는다.
집집마다 야크 똥 대신 나뭇가지, 등걸 등을 담장 주위에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있다.
겨울 추위에 대비한 비축용 연료다.
자다로 돌아와 국수로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차고 시원한 통조림 과일화채로
입맛을 돋운다.
티벳에서는 찬 음식을 먹어볼 기회가 거의 없다.
모든 음식은 일단은 기름에 볶거나 찌거나 끓여 따뜻하게 먹는다.
수유 차뿐 아니라 마시는 물도 뜨거운 찻물이어서 얼음이 동동 뜬
과일화채는 특식 중의 별미다.
티벳인 들은 물이 부족해 잘 씻지를 않아 지저분해 보인다.
집 주변이나 식당 주방도 널린 쓰레기 등으로 불결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건조한 날씨로 습도가 낮아 음식이 부패하거나 곰팡이가 스는 일이
거의 없어 몸에 탈이 나거나 전염병이 도는 일이 별로 없다.
지루할 정도로 오후시간이 널널해 여유와 느림의 묘미를 만끽해본다.
티벳 속담에 “차는 천천히 끓여야 맛이 좋아지고
말은 천천히 해야 뜻이 분명해 진다”라는 말이 있다.
티벳인 들의 천성적인 느림과 여유를 엿볼 수 있는 격언이다.
티벳을 여행하다 보면 더디게 가는 시간 때문에 헷갈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북한과 다리 하나를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중국의 단동이나 7~8천km 떨어진
티벳 서부 끝의 구게 왕국이나 시간대가 같다.
그 넓은 중국 땅덩어리가 동일시간대로 움직이다 보니 생체리듬에 혼란이 온다.
아리지역은 오후10가 넘어야 해가진다.
저녁 7~8시면 한낮이다.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보통 밤 12시다.
모든 게 느리고 여유가 있다 보니 마음도 서두름이 없어진다.
높은 고도 때문에 오는 숨 가쁨이나 고소증세도 느긋함으로 다스린다.
카메라를 메고 어슬렁거리며 자다외곽지역을 한 바퀴 도는데 두 시간이 채 안 걸린다.
마을만 벗어나면 황폐한 진흙 벌판이고 바람에 흙먼지가 하늘을 가린다.
마을 뒤 고목나무 뿌리등걸 처럼 골이 수없이 패인 제법 높은 흙산에
벌집 같은 토굴이 간간히 뚫려있고 산 정상에 타루쵸가 휘날린다.
꼭대기 까지 사람이 올라가고 토굴에 사람이 살았었나 보다.
구석기 시대 같은 토림의 세계에서 노닐다 저녁을 먹기 위해 호텔로비로 들어서니
이제 막 도착한 한국여행팀이 우리 팀과 섞여 왁자하다.
마치 한국의 호텔로비에 와있는 느낌이다.
면면을 보니 완전히 노년들의 전성시대다.
이번 여행팀에서 환갑연배는 새까만 막내둥이로 명함도 못 내민다.
80세가 넘은 사진작가가 노익장을 과시하는가 하면 70을 훌쩍 넘긴 여성트래커 들이
4~5천m고지의 티벳고원을 꼿꼿한 자세로 누빈다.
우리 팀도 대부분이 60~70대이고 50후반이 3명이다.
등산이나 오지여행에 있어 내 노라 하는 대한민국 고수들은 다 모인 것 같다.
히말라야의 왠만한 트레킹 코스나 킬리만자로 등정은 기본이다.
인도, 라다크, 실크로드, 중남미, 미국의 존 뮤어트레일, 뉴질랜드의 밀 포트 사운드 트레킹 등
전 세계 유명 오지나 트레킹 코스를 거의 섭렵한 오지전문 프로들도 꽤 된다.
직업이 오지여행가라 할 정도의 매니아들도 많다.
편하고 고급스럽게 다니는 패키지 여행은 재미가 없단다.
고생을 찾아다니는 오지여행은 마약과 같아 한번 인이 박히면 잘 멈춰지지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개고생으로 두 번 다시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도 2개월만 지나면
벌써 엉덩이를 들썩이게 된다.
오지여행은 강한 정신력과 체력이 뒷받침되는 건강과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시간이라는
3박자가 맞아야 가능하다.
최소 2~3주 이상 소요되는 장기여행인데다 적지 않은 비용이 들고 여행인프라가 열악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여행은 아니다.
젊은이나 중장년 보다 노인층이 많은 것은 시간적인 제약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오지여행 매니아는 대개 등산을 오래해 건강하고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현역에서
물러난 정년퇴직자들이 대부분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대학교수에서부터 변호사, 회계사, 언론인, 기업인, 공인중개사, 의사, 약사,
가정주부 등 직업도 다양하다.
모든 분야에서 자기 위치를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건강하고 보람 있게
살아가는 멋을 즐길 줄 아는 진정한 삶의 프로 들이다.
내일은 티벳인 운전기사나 가이드도 초행길이라는 버려진 땅, 아리지구의
오지 속으로 들어간다.
개인여행자는 혹여 신장공로를 넘었을 수도 있지만 오지여행상품으로는
이번 우리 팀이 한국에서 최초로 여로를 개척하는 것이다.
약간의 불안감과 기대감, 설레임이 모험심이라는 이름으로 솔솔 피어오른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참 좋네요.
마치 다른 행성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황량한 땅에 왕국을 이뤘다니~~대단하네요.
사진만큼이나 곳곳의 역사와 인문까지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려주시네요.
시리즈로 올려주셔서 흥미롭게 보고있습니다..감사합니다.^^
숙연해 집니다. _()_
지족자부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