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으로 활동하다
선생은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제천으로 가서 의암 유인석 선생을 찾아 사제의 예를 표하고 의진에 합류하였다. 당시 영남유림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의 정맥을 이은 유인석 선생은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에 옮긴 유학자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동년 11월 28일 서상열, 이춘영, 안승우 등으로부터 의병대장에 추대되었을 뿐 아니라 일제의 국권침탈 직후에 많은 의병들과 유생들에게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다.
무장 출신으로 유림과 간격이 있던 선생은 유인석 선생의 문하에 들면서 의병활동의 사상적 기반을 더욱 굳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시의 의진들은 아무래도 전투력이 취약하였고 유인석의 제천 의진 역시 이러한 고충을 겪고 있었으니 무장으로 실전경험까지 갖춘 선생의 참여는 유인석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유인석 의병진의 유격장이 된 선생은 1896년 3월 17일전군장 홍대석과 함께 군사 6초(哨)를 거느리고 수안보의 병참을 공격하였으며, 이후 9초(哨)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과 함께 문경 평천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동년 4월 제천 의진이 장기렴이 거느린 관군에게 패하자 유인석은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선생은 후군장(後軍將)을 맡아 유인석의 뒤를 좇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백산으로 들어간 선생은 보급이 어렵고 이탈자가 늘어나 의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자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에 은신하였다.
의병활동에 따른 문집을 정리하며 지내던 선생은 1897년 4월 요동으로 들어가 유인석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을 만나 장백, 무송, 즙안, 임강 등에서 이주민 자치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선생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백성들에게 항일의식을 불어넣고 이를 기반으로 직접 적과 부딪혀 싸우면서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권위를 되찾아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서 그 해 7월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의병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를 만들다
단양 금채동에 은신 중에 선생은 자기 수양과 학문연구를 하였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의병 전술에 관해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만들어 훗날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선생의 친필로 남아있는 속오작대도는 의병조직도, 행진법, 진격과 후퇴요령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공사로 하여금 친일대신들을 앞세워 수차에 걸쳐 광무황제를 협박하였으며, 불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으로 외교권 등 국권탈취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나라를 구하려는 백성들이 뭉쳐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1907년 군대의 해산은 당시 의병항쟁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즉, 해산된 군인들이 대부분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의병의 군사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함을 좌시할 수 없던 선생은 1907년 3월 유인석과 상의한 후, 강원도 원주, 횡성 등지에서 군사를 소모(召募)하여 재거의 하였다. 동년 6월에는 원주읍의 무기고를 열어 병장기를 거두고 군사를 모아 군세를 확충하였다. 이어 동년 7월 제천읍으로 진군,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원주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 의진, 조동교, 오경묵, 정대무 의진 등과 연합하여 제천전투에서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