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183강(三十七. 守護一切城主夜神 -- 第六現前地善知識)
(3) 別顯業用 가. 甚深義 善男子야 我以如是淨法光明으로 饒益一切衆生하야 集善根助道法時에 作十種觀察法界호니 何者가 爲十고 所謂我知法界無量이니 獲得廣大智光明故며 我知法界無邊이니 見一切佛의 所知見故며 我知法界無限이니 普入一切諸佛國土하야 恭敬供養諸如來故며 我知法界無畔이니 普於一切法界海中에 示現修行菩薩行故며 我知法界無斷이니 入於如來不斷智故며 我知法界一性이니 如來一音에 一切衆生이 無不了故며 我知法界性淨이니 了如來願하야 普度一切諸衆生故며 我知法界의 遍衆生이니 普賢妙行이 悉周遍故며 我知法界의 一莊嚴이니 普賢妙行으로 善莊嚴故며 我知法界의 不可壞니 一切智善根이 充滿法界하야 不可壞故라 善男子야 我作此十種觀察法界하야 集諸善根하야 辦助道法하며 了知諸佛廣大威德하며 深入如來難思境界호라 |
이게 뭐예요? 이름을 한 번 불러달라고요? 아따, 별 총무를 내가 다 맡는다.
오늘 참 많이 오셨네요. 며칠 전 부처님 오신 날을 우리가 축하하고 모두 등을 다는 등 여러 가지로 부처님 오신 뜻을 높이 기렸는데 그 열기가 오늘까지 계속되는가 봐요. 고맙습니다.
법회는 얼마만치 깊이 이해하고 얼마나 깊은 도리를 말하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일단 사찰이 되었든지 이런 교실이 되었든지 간에 법회가 이루어졌다 하면 여럿이 모이고 모인 사람들의 열기가 이렇게 느껴져야 합니다.
열기라는 것은 공부하고 싶어 하는 열정과 신심과 여러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고 권하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지요. 그런 열기가 있어야 하고, 숫자도 어느 정도 차야 합니다. 그런 것이 바람직하지요.
매주 금요일에 강의가 있지만은 금요일마다 다 오기가 뭣하면 내가 하는 날이라도 오세요.
일금(一金), 첫째 금요일은 청림회에서 하는 법화경 강의가 저녁 6시부터 있지요,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다 참석해도 좋아요, 이금(二金)은 여여선당에서 임제록 강의가 10시 반부터 있고, 또 삼금(三金)은 오늘 이 시간이지요. 문수원에서 화엄경 강의가 있습니다. 경전 중에서도 최고로 높은 화엄경을 벌써 몇 십 년째 계속 하고 있습니다.
무슨 경전, 어떤 교재를 가지고 하든지 간에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인데 그것을 일상생활에 필요한 교훈이 되도록 우리가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는 거기에 중요함이 있는 것이지 교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별 문제가 아니에요. 어떤 교재를 가지고 하더라도 사람이 살아가며 생활하는 데에 지혜의 눈을 뜰 수 있는 그런 좋은 생각을 할 수 있고, 마음이 열릴 수 있다면 그것이 법회의 소득입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 기도를 한다 무얼 한다고 하는 것은 뒤에 생긴 것입니다. 그럼 불교의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것이 뭡니까?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처음에 같이 수행하던 다섯 사람을 만나 설법을 했잖아요. 설법을 한 거예요. 그 설법한 말씀을 다섯 제자인 오비구가 외고 사유하고 깊이 생각하지요. 가만히 좌선하는데 그 좌선의 주제가 뭔가 하면 낮에 부처님에게서 들었던 그런 사실들, 그런 이야기들을 사유하는 거예요.
그리고 부처님이 출가 수행하여 성도하기까지의 과정과 또 그 과정을 통해서 오늘 전한 가르침이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사유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낮에는 듣고 밤에는 사유하고, 낮에는 듣고 밤에는 또 사유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탁발을 하지요. 멀리 가서 여법하게 탁발을 해오는 것도 수행이거든요. 그거 아무나 못하잖습니까. 왕족 출신으로써 거지행세를 한다는 것이 보통 수행이 아니잖아요? 차라리 훔쳤으면 훔쳤지 동냥은 못한다는 게 우리 보통사람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그 귀족출신들이 가서 동냥을 했습니다. 이건 아주 큰 수행입니다.
그 전에 내가 태국을 가보니까 태국스님들은 아침에 나가서 탁발을 해오는 겁니다. 밥을 얻어오는 겁니다. 부처님이 탁발하셨듯이 그렇게 나가서 밥을 얻어 와서 먹으면 그날 수행은 끝이라는 겁니다. 더 이상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아, 그러더라고요. 그걸 제일 중요하게 여겨요. 그런 뒤에 경전 볼 사람은 보고 안 볼 사람은 안 보고 그러는 걸 봤는데, 그 사람들의 생활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고 그리고 공부하고 나서는 그것을 사유하는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참선하는 거예요. 그것이 한 낱말이 되었든지 이야기가 되었든지 한 구절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을 가지고 참선을 하는 거지요. 그것이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생활의 원형입니다. 그 뒤에 여러 가지가 나왔지요.
서서 목탁을 치는 건 나는 한 시간도 어렵더라고요. 그 전에 기도를 하기는 많이 해봤어요. 어릴 때는 많이 했는데 옛날에는 으레이 올라가면 사분정근이라고 해서 두 시간씩 두 시간씩 하루에 네 번을 하거든요. 그것을 일주일 기도, 또는 21일 기도로 한 번씩 해보면 두 시간을 서서 한다는 게 보통 힘 드는 게 아니에요. 왜 그렇게 어려운 법을 만들어 내 놨는지 알 수가 없어요.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깨닫기 전에는 그렇게 하셨지만 깨닫고 나서 보니까 그게 아무 소용없는 짓이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가장 좋은 앉음새, 가장 편하고 가장 오래 앉을 수 있는 가부좌를 하고 사유하라고 했어요.
부처님이 가르친 것을 사유하라고 했어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인생이 무상하다고 하더냐? 그럼 그 무상하다고 한 그 가르침을 주제로 삼아 깊게 사유하라는 거예요.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고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떠 올려서 자기가 살아온 것과 맞춰도 보고, 이렇게 해서 인생이 무상하다고 하는 그 주제를 뼈 속에 깊이 사무치도록 그렇게 사유하는 거예요. 그렇게 참선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내 살림살이가 되고 내 수행이 되는 거지요. 그렇게 했습니다.
가장 원초적인 수행법은 그랬습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또 다른 민족들에게 불교가 전파되면서 좀 바뀌어 지기도 하고 또 그 사람들의 생활과 풍습에 맞는 그런 방법이 생기기도 하고 그랬어요.
결가부좌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안 맞거든요? 인도 사람들에게는 아주 잘 맞아요. 인도사람들은 다리가 길고 빼빼해서 척 올리면 아주 그냥 적당히 녹은 엿가락처럼 다리가 그렇게 되어 버려요.
가서 봤습니다. 결가부좌를 한 번 해보라고 하니까 척척 올리는데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인도사람들의 체형에 맞는 앉음새인데 그걸 가지고 우리나라 스님들이 또 하는 거예요. 그렇게 앉으면 빨리 성불할 줄 알고.
최고급 참선을 한다고 하면서 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는 안 되는 다리를 꼬아서 억지로 몸을 조복한다고 하지요. 몸 조복한다는 건 세상에 없어요. 몸을 조복한다며 억지로 결가부좌를 만드니 나중에는 전부 관절염이 생겨서 내내 치료하러 다니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지혜가 있어야지 그런 한 가지 법을 가지고 이게 옳다고 생각하면 잘못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의 주안점은 뭔가 하니 부처님이 마련하신 불교공부의 가장 원초적이고 원형이고 정상적이고 아주 전통적인 것, 그러니까 새로운 것만 좋은 것이 아니라 옛것이 좋은 거지요. ‘우리의 전통은 좋은 것이여~’ 라는 말도 있지만 그러니까 불교도 그런 것이 정통적인 불교이거든요. 제발 그렇게 알아야지 여기 저기 이상하다, 신기하다, 대단하단다 하는 소리를 듣고 와~ 몰려가면 판판이 속고 판판이 사기 당하는 거예요. 백발백중 사기에요. 말세에 소문이 이렇게 나 가지고 거길 쫓아가서 푹 빠져보면 거의가 잘못되거나 사사롭습니다. 아주 삿되거나 사기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삿된 것도 사이고 사기도 사예요, 전부 사입니다. 거의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원형적인 것, 정상적인 것, 그리고 상식적인 것, 부처님께서는 지극히 상식적으로 그러셨어요. 그 사람들[오비구]을 만나자말자 뼈 빠지게 앉아서 참선해라, 서서 그렇게 기도해라는 말씀은 안 하셨어요. 녹야원 그곳 얼마나 좋습니까, 자리도 최고 좋은 자리에 앉혀놓고 제일 편한 자세로 앉아서 당신이 깨달으신 내력을 이렇게 이야기 하고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각자 조금씩 떨어져서 한 나무에 한 사람씩 앉지요. 가까이 앉으면 이야기하게 되니까요. 각자 떨어져 앉아서 부처님이 그동안 말씀하신 것을 사유한 거예요. 인생이 무상하다고 했으면 그것을 아주 깊이 사유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지요. 모든 것이 공하다고 했으면 그 공한 이치를 또 자기 것으로 만들지요. 이렇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안 계시는 세상에서는 부처님을 대신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곧 부처님께 법문을 듣는 일이지요. 이것이 불자로써 가장 기본적이고 필요한 일이라는 그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출석을 이렇게 한 번 부르면 재수가 있대나 어쨌다나요. 아, 내가 그런 말을 들었어요. 어제 도반이 한 사람 왔는데 저기 소림사를 잘 아는 도반입니다. 그래서 비구니 스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저런 이야기를 하고, 또 그 자리에서 신도들이 카페 염화실에 들어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혜주스님이 다 듣고 나한테 온 거예요.
염화실방송을 틀어놓고 설거지 하면서 법문을 듣다가 이름 부를 시간이 되면 바르르 쫓아와서 컴퓨터 앞에 딱 앉는다고 하네요. 내 이름을 부르나 하고 딱 기다린다고 합니다. 아, 난 그런 줄을 몰랐어요.
그 스님이 듣고 와서 하는 이야기에요. “아, 그래?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법문이야 설거지 하면서 좀 놓쳐도 좋은데 이름 부른다 싶으면 얼른 쫓아온다고 해요. 이름 부르는 시간은 간격이 나고 음악이 나가고 하니까 익숙해서 얼른 알아듣는 거지요. 그래서 설거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컴퓨터 앞에 와서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도로 간다는 거예요. 대개는 그렇게 한다네요? 맞아요?
(아뇨~ 라고 대답)
아, 그럼 처음부터 가만히 거기에 앉아 있구만? 그러니까 어디 청소하거나 설거지하러 가지도 않고 처음부터 앉아 있는 사람은 더 착한 사람들이지요. ^^*
가상공간이지만 거기도 그 나름대로 법당이고 일체유심조이니까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지면 또 그렇게 되는 거지요. 아무리 근사하게 꾸며놓은 훌륭한 법당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곳을 안방처럼 생각해 버리면 안방이 되는 것이고 가상공간에서도 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한 마음을 딱 모으면 거기가 법당이 되고 그런 거지요. 그래서 아마 그런 것을 많이 느낀 것 같아요.
(염화실에) 내 이름으로 등을 달아 놓은 것이 있는데 그 아래에 웬 꼬리말이 그렇게 많이 올려져 있나 싶어서 어제는 조사를 해 보니까 물론 여러 사람이 들어와 있는데 그 중 어떤 분이 매일 들어와서 합장하는 걸로 해 놨어요. 이것을 하루에 들어와서 해 놓았는가 싶어서 보니 아니에요, 날짜가 달라요, 거기에 시간과 날짜가 다 나오는데 매일 다른 날입니다. 그러니까 가상법당의 등 달아놓은 곳에 와서 매일 합장 한 번 딱 하고는 가는 거예요. 그 다음날 또 오고, 또 오고...
가서 한 번 찾아보세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매일 와서 합장만 딱 하고는 갑니다. 거기에서도 법당이라고 하는 것을 느끼더라고요. 그런 사람에게는 또 법당이지요. 저 훌륭한 해인사나 범어사나 큰 절, 천년이 넘는 전통사찰에 가서도 그런 마음이 안 나면 안방이고, 그런 마음이 나면 그 가상공간도 법당인 것이지요. 거기에서도 내가 많이 깨달아요.
아이구, 글씨도 참 잘 쓰시네요.
관음도 보살님이 누구예요? 또 청정행 보살님? 안 오셨지요?
김남미씨는요? 예, 보살님은 불명이 없네요? 불명이 있을 텐데 적으세요.
김덕우님? 뒤에 계시네요.
그 다음에 법연각 김성연씨, 뒷쪽에 계세요? 진구 초옥동이네요? 네, 나중에 봐요~ ^^*
김은희 선정행님, 강정자 자비심님, 안 오셨어요?
김혜자 정각행님, 노성자 보명화님, 안 오셨어요?
유귀자 선재행님, 예, 보살님.
모인자 선법행님, 또 문정자 선행화님, 예~하고 대답해야지요.
박영월 보덕화님, 안 오셨어요?
김종필인가요? 김종필 반야심, 맞는 모양이네요. 아, 박종필! 축원을 내가 처음 해서 그렇습니다. 보살님이요?
내 저 보살이 누구인지 이름도 성도 몰랐는데 십년을 하루도 안 빠지고 꾸준히, 하여튼 한 번도 안 빠지고 나오신 보살이 저 보살입니다. 박종필보살입니다. 내가 얼굴은 알아요. 제일 열심히 나온 분인데 십년 만에 오늘에야 아는 거예요. 박수 한 번 쳐주세요.
그 전에 은해사에서 우리가 장학금을 줄 때 아드님 둘이 있었지요? 아빠가 백씨인가 그렇지요? 아이들 이름이 뭐예요? 둘이었는데? 백규환, 백규태, 그래요. 그것은 생각을 하는데 엄마는 내가 기억을 못해요. 저 보살님의 아들이라고 했었는데 반야심이네요, 한 번도 결석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그쯤 되면 내 방에 한 번은 올만하거든요, 십년 동안 한 번도 안 왔어요. 내가 기억을 다 합니다. 언젠가 길에서 한 번 만났는데 어디 가느냐고 하니 금강암에 등 달러 간다고 해요, 초파일 밑이지요. 기억납니까?
나는 저런 말을 못할 줄 알았어요. ^^*
까짓것 우리 오늘 십년 묵은 이야기 다 해버립시다. 아이들은 그래 지금 고등학생입니까? 아이구, 벌써 그렇구나.
하여튼 저 분도 이상한 분입니다. 내가 말을 이렇게 해서 그렇지 십년도 넘었어요. 다니신 지가 여기 문수원 역사와 똑 같으니까요,
그 전에 금강암 갈 때 한 번 만났고 가을에 한 번 왔고 본 것이 두 번이네요? 진짜 두 번을 봤어요.
몽땅 올라왔을 때 보면 뭐 하나요? 내가 다 기억 하나요? ^^*
어쨌거나 그래요, 미안합니다. 내가 일일이 기억을 다 못해서요, 박종필 반야심 보살님, 이제는 알겠네요.
박현숙 보현심님, 배순자 관음행님, 서금자 진실행님, 오셨으면 소리를 내세요.
송수현 무주심님, 손평길 혜일성님, 누가 이렇게 이름을 잘 지었나요.
성지혜 대혜월님, 안미희 대혜월님, 성지혜는 누구예요? 잘못 적었나요? 동래구 안락동과 창원은 다른데요?
오덕자씨는요? 예, 보살님도 불명 있지요? 없으면 받아서 적어야지요. 연세가 그쯤 되시면 얼른 불명을 써야지요.
오정임 전법수님, 우금순 보덕행님, 우정희 수일행님, 임금자 마니주님, 임양자 등각심님, 등각심은 누구예요?
이지영 묘신행님, 오셨어요?
이순자 법운행님, 이순자씨가 법운행이구나.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일일이 묻는 뜻을 알아야지요.
이숙정 정주향님, 이 분들은 오늘 안 왔네요?
이영자 보운화님, 임선희 보덕행님, 어디 있어요? 예.
이순미 곽운행님, 뭐 경 이야기 하는 것보다 이런 게 나는 더 재미있네요, 아 진짜예요.
이두리 원만행님, 또 장인옥 마니주님, 장재은 선법행님, 맞아요?
아, 출석 부를 만하네요.
정달순 우담화님, 아, 보살님이네요, 아따 참, 내가 차를 그렇게 많이 얻어먹고는...우담화, 이름 좋습니다. 우담바라가 필 때가 됐네요.
물잠자리 알, 그것도 이름이 우담바라이더라고요, 학명이 우담바라에요, 물잠자리의 씨, 알인데 그것이 학명이 우담바라에요. 희한하지요. 그러니까 사기 쳐도 돼요. 우담바라가 피었다고 사기 쳐도 돼요, 왜냐 하면 학명이 우담바라이거든요. 그렇더라고요. 그러니 할 말이 없지요.
정성인 원성화님, 정영숙 문수행님, 장진순 진실행님, 그 외는 모두 결석이고요?
최재희 청운화님, 안 왔어요? 최경순 대덕행님,
하소남씨, 보살님도 불명 있으면 올리고 없으면 받으세요.
허동남 지일성님, 허정숙 혜성, 글씨를 쓰다가 말았네요? 정혜성인데 정자를 못 써서 그래요, 본인 이름 아닙니까? ^^*
허주오 도운심, 누구세요? 아, 보살님.
허필종 법왕자님, 법왕자님이 요즘 안 보이대요. 황시용 원일성님, 뒤에 계시네요.
인터넷 상에서도 60명 70명 들어오는데 이름을 불러주니 참 좋은가 봐요. 나는 그렇게 생각을 못했는데 신도님들이 좋아한다고 말을 그렇게 전해왔더라고요. 이걸 이제 매일 부르나요?
오늘 처음 오신 분? 우리 염화실의 유정이란 보살님이 왔습니다.
예~ 라고 하잖아요, 전부 다 안다고요. 아주 재주 있는 분이지요.
그 다음에 바로 맞은편 집에 산다는 그 이름이 뭐에요? 이름 소개해 봐요, 평소 이름이? 정혜영씨, 바로 맞은 편 집에 산답니다.
오늘은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한 삼십분 이렇게 보냈습니다.
저희들 공부가 입법계품 313쪽 별현업용이란 곳에서부터 공부할 차례입니다. 뒤에 책 한 권만 가져다주세요. 한 책상에서 같이 보면 되니까 한 권만 있으면 되지요.
(3) 별현업용(別顯業用)
이 분은 어떤 분이냐고 하면 서른일곱 번째 수호일체성주야신이라고 하는 그런 선지식인데 53명의 선지식 중에서성을 지키는 주야신이라는 뜻이지요.
이 분에 대한 이야기가 주욱 나오면서 칭찬수법이라, 법을 받은 것에 대해서 찬탄하는 이야기가 계속 되는데 발심을 칭찬하고 그 다음에 총현 업용이 나오지요,
여기에서 업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업입니다. 수행업에 대한 작용이란 뜻입니다. 그런 것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총현이었고 오늘은 별현이니까 수행한 것에 대한 업이라는 것이 여기에서는 그런 뜻이에요.
우리가 보통 업(業)자를 부정적인 뜻으로만 자꾸 이해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부처님이 하시는 업은 불업(佛業)이라 하고, 보살이 하는 일은 보살업이라고 해요. 선업도 있고 악업도 있고 정업도 있고 사업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별현업용(別顯業用)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의 수행, 그 분의 공부 경지를 하나하나 나누어서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가. 심심의(甚深義)
선남자(善男子)야 아이여시정법광명(我以如是淨法光明)으로 요익일체중생(饒益一切衆生)하야
심심의(甚深義)는 아주 매우 깊고 깊은 뜻이지요. 작은 제목이 또 그렇네요.
선남자(善男子)야
아이여시정법광명(我以如是淨法光明)으로, 내가 이와 같은 정법 광명으로, 아주 청정한 도리의 광명으로써
요익일체중생(饒益一切衆生)하야, 일체 중생을 요익케 한다, 법으로써 일체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는 겁니다. 밥을 해주고 떡을 해주고 다른 무슨 물질적인 것으로 이익 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정법광명으로써 일체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는 거지요.
내가 늘 말씀드리지만 불교가 다른 어떤 봉사단체나 종교단체와 다른 점이 바로 그겁니다.
죄송한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불교는 진리의 가르침인 법으로써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려고 하는 것이 불교예요. 그렇다고 물질적으로 돕지 말란 뜻은 아닙니다. 물질로 돕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는 법으로써 가르침으로써, 진리의 말씀으로써 사람들을 이익하게 하는 것, 이것이 사실은 첫째 목적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여러 가지 공양 중에서 법공양이 제일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셨거든요.
우리가 책을 한 권 보시해서 거기에서 짧은 한 구절을 가지고 마음에 감동을 받고 그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습니까, 대단한 일이지요.
제가 어렸을 때 덕흥사라고 하는 이웃사찰에 가니까 내 또래 어린 동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동자가 초발심자경문을 한참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기 나름대로는 아주 감동을 받은 좋은 구절이라며 나에게 소개해 준 거에요. 그 대목이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라,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 년의 보배이고 백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 아침에 먼지가 될 수도 있다, 라는 그 소리를 듣고는 그야말로 뿅 가버린 거예요, 햐~ 어떻게 이런 공부가 있는가, 이런 말씀이 있는가,
길게 이야기 한다고 해서 꼭 감동이 있는 게 아니지요. 육조스님이 어땠지요? 금강경을 읽는 가운데서 ‘응무소주 이생기심’ 글자 여덟 자이네요. 글자 여덟 자를 딱 듣고는 마음이 확 밝아진 거예요.
나는 겨우 출가한 정도이지만 그 분도 물론 출가를 했지만 출가 이전에 마음을 밝혔어요, 깨달았다고요.
‘응무소주 이생기심’ 그 말 한 마디에 마음도 깨닫고 출가도 한 거지요. 촌철살인이라 하지요. 그야말로 그것이 촌철살인이지요. 짧은 한 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움직이고 감동을 준다고요.
우리가 법보시를 했을 때 그것을 읽는 사람이 한 마디만 듣고 감동을 해도 책 한 권의 천배 만 배의 가치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늘 법보시, 법공양을 말씀하셨지요. 법공양, 법공양이라고 하지요.
보현행원품에 보면 여러 가지 보시가 있는데 그 중의 제일은 법공양이라, 그런 말씀을 늘 하십니다.
사십구재를 지내면서 수건을 만들고 우산을 공양하고 그렇게 좀 하지 마세요. 그렇게 하려면 무비스님에게서 공부했다고 하지 말던지요. 지금 그 우산을 돌려서 어쩌자는 말이에요. 돌아가신 부모를 복되게 하려고 수건 하나를 찍어서 돌리는, 수준이 그쯤 밖에 안 되는가요, 그래. 여기 온 사람을 빈손으로 보내기는 미안해서 하는 일이지만은 아무리 작은 책자라도 좋지요, 요즘 아주 작은 오백원 짜리 책도 있어요. 법공양이라고 해서 아주 작은 책으로 오백원 짜리도 있고 천원짜리도 있지요.
천수경도 아주 얄팍해서 휴대하기 좋은 게 있고 금강경도 얄팍하여 휴대하기 좋은 것이 얼마든지 있거든요, 오백원짜리 천원짜리가 천지라고요. 얼마든지 살 수가 있지요. 그래도 그런 것을 사서 하나씩 돌리더라도 돌려야지요. 그럼 그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이라도 책 제목이라도 한 번 읽게 할 수 있잖아요. 이게 뭔가 하고 책 제목을 한 번 읽는 거예요. 제목만 한 번 읽고 던져버려도 그게 천배 만배의 효과가 있습니다.
일본의 일연종 창가학회 남묘호렌게쿄에서는 나무묘법연화경 이름만 읽지 그 사람들이 묘법연화경을 공부합니까? 안 해요, 묘법연화경 공부를 안 하고 이름만 외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법공양을 해서 그 책의 제목을 한 번 읽고 던져도 만 원짜리 우산 보시하는 것보다 열배, 스무 배 낫다니까요. 그렇게 알아야 돼요, 우리 불자들의 의식이 그렇게 자꾸 깨어가야 된다는 그런 말씀을 이 기회에 드리고 싶네요.
여기에 보니까 나는 이와 같은 청정한 법의 광명으로, 청정한 법의 빛으로, 라고 했습니다. 법이 빛입니다. 빛을 따로 전기불처럼 비추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열어 주는 그런 좋은 말씀이 빛이 되는 거예요.
나는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 이라는 그 구절 하나가 내 맘을 환하게 밝힌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날부터 몸살이 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몸살이 몸살이 아니라 계속 그 생각이 나는 겁니다. 나는 부처님과 선근 인연이 깊었던지 전생부터 중노릇을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여튼 그 말을 듣고부터는 한 시도 그 생각이 떠날 날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도저히 못 참고 절로 쫓아갔지요. 그렇게 되더라고요. 한 구절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지 초발심자경문 전체를 다 배웠다고 해서 그렇게 발심이 되는 건 아닙니다.
법보시 법공양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그 뜻입니다.
정법광명(我以如是淨法光明)으로 요익일체중생(饒益一切衆生)이라, 불교는 이익이란 말보다 요익이란 말을 잘 써요, 일체중생을 요익케 해서
집선근조도법시(集善根助道法時)에 작십종관찰법계(作十種觀察法界)호니
집선근조도법시(集善根助道法時)에, 선근조도법을 모을 때에 라는 말입니다. 선근조도법이 무슨 말이냐고 하면 좋은 일을 하는데 있어 직접적인 것보다 도움이 되는 것, 그것을 조도법이라고 합니다. 조도법이란 말이 불교에서는 자주 나와요.
내가 바로 보시하는 것보다는 “아, 이 법보시 하는 것은 좋은 거야” 라고 이야기 해 주는 것, 이것이 조도법입니다. 그 사람이 법보시를 하도록 내가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지요. 도울 조(助)자 아닙니까. 돕는 도(道)라는 말입니다. 조도법이라는 것은 도(道)를 돕는 것이 아니라 돕는 일입니다. 도를 돕는다고도 해석을 합니다. 그렇게 도와주는 것이 참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전부 모을 때에
작십종관찰법계(作十種觀察法界)호니, 열 가지로 진리의 세계를 이 사람은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소위아지법계무량(所謂我知法界無量)이니 획득광대지광명고(獲得廣大智光明故)며
하자(何者)가 위십(爲十)고, 무엇이 열 가지인가,
소위아지법계무량(所謂我知法界無量)이니, 나는 법계가 무량한 줄을 안다,
불교는 세계라는 말을 잘 안 쓰고 법계라고 씁니다. 법계라는 말은 세계라는 말과 뜻이 비슷하면서도 훨씬 광범위합니다. 얼른 이해가 안 되면 법계를 세계해라고 이렇게 이해를 해도 좋습니다. 온 우주 전체를 법계라고 하니까요, 법계를 온 우주라고 그렇게 보는 게 좋겠네요.
온 우주가 한량이 없는 것을 나는 안다,
어떻게 아느냐?
획득광대지광명고(獲得廣大智光明故)며, 획득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얻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광대한 지광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넓고 큰 지혜광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광대한 지혜광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혜가 제일 우선이에요. 마음이 밝아졌다, 깨달았다, 마음에 빛이 들어왔다, 세상을 밝힌다, 등불을 밝힌다, 하는 것은 철두철미하게 지혜의 등불입니다. 우리 마음의 지혜를 말하는 겁니다.
사람이 지혜만 있으면 사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사는데 문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잘 살 수가 있는 거지요. 힘들게 어리석게 고생 안 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 한 생각 딱 막히는 바람에 그렇지요. 아주 작은 한 생각이 딱 막혀놓으니까 자기는 노력은 수없이 들이는 대도 다른 방향 다른 길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은 끊임없이 지혜를 말씀하셨어요.
아지법계무변(我知法界無邊)이니 견일체불(見一切佛)의 소지견고(所知見故)며
아지법계무변(我知法界無邊)이니, 나는 이 우주가 무변한 것을 안다, 무변은 가가 없다는 말이지요. 법계가 가이 없는 줄을 내가 아는데
견일체불(見一切佛)의 소지견고(所知見故)며, 일체 부처님의 알고 보는 바, 모든 부처님이 알고 보는 것을 내가 다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보는 데까지 내가 본다는 거지요. 부처님이 아는 데까지 내가 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법계가 무변한 줄을 내가 안다는 거지요.
법계는 무변해요, 또 법계는 무량하지요, 한량이 없습니다. 이 우주는 한량없고 가가 없습니다.
아지법계무한(我知法界無限)이니 보입일체제불국토(普入一切諸佛國土)하야 공경공양제여래고(恭敬供養諸如來故)며
아지법계무한(我知法界無限)이니, 법계는 무한한 것을 내가 알며,
여기 보면 무량이나 무변이나 무한이나 뜻은 비슷비슷하지요.
나는 우주가 무한한 줄을 안다. 왜냐?
보입일체제불국토(普入一切諸佛國土)하야, 널리 일체 여래의 일체 불국토에 들어가서
공경공양제여래고(恭敬供養諸如來故)며, 모든 여래를 공경하고 공양했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을 그렇게 공경 공양했기 때문에 이 우주가 무한한 줄을 내가 안다.
우주가 무한한 것을 아는 이유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경전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지법계무반(我知法界無畔)이니 보어일체법계해중(普於一切法界海中)에 시현수행보살행고(示現修行菩薩行故)며
아지법계무반(我知法界無畔)이니, 또 나는 법계가 무반한 줄을 알며,
여기에서도 무변이나 무반이나 비슷하지요. 둔덕반(畔)인데 예를 들어서 밭이 있으면 밭의 경계선이 있잖아요. 다음 밭하고의 경계선, 그런 것을 반(畔)이라고 해요. 그것이 없다는 거예요, 온 우주는 그런 것이 없다, 어디까지라고 하는 게 없다는 거지요.
우리가 인공위성을 타고 못 가서 못가지 그것이 끝이 있나요. 또 막아놓은 데가 있나요? 둔덕이 없잖아요, 막아놓은 데가 없습니다. 그것을 안다, 왜 그러냐?
보어일체법계해중(普於一切法界海中)에, 널리 일체 법계해 가운데에, 온 우주 가운데에서
시현수행보살행고(示現修行菩薩行故)며, 보살 수행을 시현해 보이고, 또 자기도 수행한다. 보살행을 수행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한 곳에서가 아니라 일체 법계해 중에서이지요. 뭐 바다해(海)는 넓다는 뜻이니까요. 일체 법계해에서 보살행을 수행하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가는 곳마다 곳곳에서 보살행을 다한다는 이 말이지요.
아지법계무단(我知法界無斷)이니 입어여래부단지고(入於如來不斷智故)며 아여법계일성(我知法界一性)이니 여래일음(如來一音)에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무불료고(無不了故)며
아지법계무단(我知法界無斷)이니, 나는 법계가 끝나는 날이 없다는 것을 알며, 무단은 그런 뜻입니다.
입어여래부단지고(入於如來不斷智故)며, 여래의 끊어지지 않는 지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여법계일성(我知法界一性)이니, 나는 법계가 하나의 성품임을 알며,
온 우주가 저렇게 다종다양하고, 지구만 하더라도 별별 모습이 다 있고 별별 사람이 다 있고 별별 물건과 동물 · 식물 · 광물이 있지만 그래도 성품은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안다. 왜냐?
여래일음(如來一音)에 일체중생(一切衆生)이, 여래의 한 음성에 일체 중생이
무불료고(無不了故)며, 요달하지 아니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 요달한다,
음성 한 가지로써 미국사람은 미국말로 알아듣고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알아듣고 독일사람은 독일말로 알아듣고 중국사람은 중국말로 알아듣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걸림이 없다는 거지요.
아지법계성정(我知法界性淨)이니 요여래원(了如來願)하야 보도일체제중생고(普度一切諸衆生故)며 아지법계(我知法界)의 변중생(遍衆生)이니 보현묘행(普賢妙行)이 실주변고(悉周遍故)며
아지법계성정(我知法界性淨)이니, 나는 법계가 그 바탕이 청정한 줄을 안다, 여기에서 청정은 텅 비었다, 공하다는 뜻입니다. 이 우주가 텅 비어서 공한 줄을 안다,
요여래원(了如來願)하야, 여래의 소원을 성취해서, 요달해서
보도일체제중생고(普度一切諸衆生故)며, 널리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연고이며,
사람들을 제도하는 그것 때문에 법계의 성품이 텅 비어 공한 줄을 안다. 그 다음에
아지법계(我知法界)의 변중생(遍衆生)이니, 나는 법계의 두루두루한 중생들을 아니,
보현묘행(普賢妙行)이, 보현보살의 아름다운 행이,
여기에서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보현보살행이라고 하지 않고 보현의 아름다운 행이
실주변고(悉周遍故)며, 다 두루두루 펼쳐져 있는 연고이다.
아지법계(我知法界)의 일장엄(一莊嚴)이니 보현묘행(普賢妙行)으로 선장엄고(善莊嚴故)며 아지법계(我知法界)의 불가괴(不可壞)니 일체지선근(一切智善根)이 충만법계(充滿法界)하야 불가괴고(不可壞故)라
아지법계(我知法界)의 일장엄(一莊嚴)이니, 나는 법계의 하나의 장엄을 앎이니,
보현묘행(普賢妙行)으로 선장엄고(善莊嚴故)며, (보살행의 대표를 보현행이라고 하니까)보현의 묘행으로 잘 장엄했기 때문이다.
또 나는 무얼 아는가 하면
아지법계(我知法界)의 불가괴(不可壞)니, 법계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왜 그런가?
(이 부분부터 녹음 끊김)
일체지선근(一切智善根)이 충만법계(充滿法界)하야
불가괴고(不可壞故)라
선남자(善男子)야 아작차십종관찰법계(我作此十種觀察法界)하야 집제선근(集諸善根)하야 판조도법(辦助道法)하며 요지제불광대위덕(了知諸佛廣大威德)하며 심입여래난사경계(深入如來難思境界)호라
선남자(善男子)야
아작차십종관찰법계(我作此十種觀察法界)하야, 나는 이 열 가지로 법계를 관찰하는 것을 지어서
집제선근(集諸善根)하야, 여러 가지 선근을 모아서
판조도법(辦助道法)하며, 돕는 일을 판단한다, 마련한다는 뜻입니다. 돕는 일을 마련하며,
요지제불광대위덕(了知諸佛廣大威德)하며, 모든 깨달으신 분들의 넓고 큰 위덕을 깨달아 알며, 요지하며
심입여래난사경계(深入如來難思境界)호라, 또 여래의 생각하기 어려운, 생각으로 어디까지 한정을 할 수 없는 그런 경계에 까지 깊이 들어가노라,
자기의 공부를 이렇게 낱낱이 풀어서 소개를 하는데 첫 구절은 우리가 얼른 이해하기 쉽고 또 해야 할 일인데 나머지는 이 분의 공부의 경지가 되어놔서 그렇게 쉽게 이해될 만한 그런 경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 우리들의 한마음의 세계를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또 생각하면 그렇게 멀리 있는 것만이 아니에요.
첫댓글 정법광명(我以如是淨法光明)으로 요익일체중생(饒益一切衆生)이라...물질적인 것으로 이익 되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정법광명으로써 일체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여러가지 보시중에 제일은 법공양이라.) 고맙습니다._()()()_
普賢妙行!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
지혜를 밝혀주는 법공양이 으뜸이라..
연보리님, 수고하셨습니다. _()()()_
연보리님,고맙습니다_()()()_
普賢妙行이 悉周遍故라...보현보살의 아름다운 행이 다 두루두루 펼쳐져 있는 연고라...연보리 님! 수고하셨습니다.._()()()_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淨法光明으로 일체 중생을 요익케 한다
법계는 무량,무변,무한,무반,무단,一性이다
나무 입법계품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