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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어떤 이야기(story)와 사랑에 빠지나?"
영화와 공연, 방송 비즈니스의 승패는 바로 여기서 판가름난다. 그런 점에서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는 주목해볼 만한 이야기이다. 직원이 55명에 불과한 영국 영화사 워킹타이틀(Working Title Film)이 2000년에 영화로 만들고 2005년 뮤지컬로 제작한 '빌리 엘리어트'는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2005년 영국 빅토리아 팰리스 극장에서 초연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지난 5년간 영국·호주(2007년)·미국(2008년)에서 3200여 회가 공연돼 총 450만명이 관람했고 올해 8월에는 비(非)영어권 최초로 한국 무대에도 오른다. 2011년부터는 일본·독일·네덜란드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다. 미국 브로드웨이 최고의 상인 토니상 10개 부문을 휩쓸었고 영국 연극협회가 주는 올리비에상도 4개 부문을 수상했다. 타임지(誌)는 "최근 10년간 가장 성공한 뮤지컬"로 평가했다.
워킹타이틀은 이 뮤지컬의 지난 5년간 입장 수입으로 4억50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1800만달러가 투자된 뉴욕 공연의 경우 경제위기 속에서도 14개월 만에 투자비를 모두 회수해 그때부터는 고스란히 이익을 남기고 있다. '캣츠'나 '오페라의 유령'처럼 일단 작품성을 인정받으면 20년 이상 장기 공연되는 뮤지컬의 특성을 감안할 때 '빌리 엘리어트'는 장기·고수익 상품인 셈이다.
워킹타이틀 공동 대표를 맡으며 '빌리 엘리어트' 프로젝트를 총 지휘한 에릭 펠너(Eric Fellner·51) 사장을 만나 배우고 싶었던 것은 야구로 치면 선구안(選球眼)이었다. 세계 시장에서 통할 이야기를 골라내는 법 말이다.
지난 1일 런던 베이커가(街) 근처에 있는 워킹타이틀 본사에서 펠너 사장을 만났다. 인터뷰 장소인 4층 회의실 창밖으로는 '셜록 홈스'와 '메리 포핀스'의 무대가 된 런던의 붉은 벽돌 주택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청바지 차림의 펠너 사장이 "'빌리 엘리어트'가 이만큼 성공할 줄 몰랐다"고 했을 때 의례적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낮은 톤의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본 엘튼 존(가수)이 뮤지컬로 만들자고 했을 때 저는 '터무니없다(ridiculous)'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빌리 엘리어트'를 영화로 만들 때도 상업적 성공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의외였다. 펠너 사장은 1992년 워킹타이틀의 공동 대표를 맡으며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 세계적인 성공작을 만든 인물이다. 그가 제작을 지휘한 영화는 6차례나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세계 최고의 이야기 전문가인 그가 좋은 이야기를 몰라봤던 것일까?
펠너 사장은 "경영자도 눈앞의 비즈니스가 아니라 마음(heart)이 이끄는 대로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며 "빌리 엘리어트가 바로 그랬다"고 말했다.
그가 처음 빌리 엘리어트의 줄거리를 접했을 때 떠오른 생각은 '시장에서 안 팔리겠다'였다. 그러나 그는 평소 작가 리 홀(Hall)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글 전체를 읽어봤다. 그리고 울어버렸다. 그는 "수많은 시나리오를 읽지만 그렇게 강렬한 감정적 반응을 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중이 이야기를 사랑할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1980년대 영국 북부의 탄광 마을, 마거릿 대처(Thatcher) 정부의 광산 축소 방침에 맞서 파업을 벌이는 광부들과 발레 댄서가 되고 싶은 11살 소년의 이야기는 일반적이지도 않고 영국색(色)이 강한 소재였다.
말하자면 펠너 사장은 확률이 낮은 도박을 벌였고, 뜻밖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는 이 일로 관객의 반응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원래 이야기를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제작 비용을 최대한 줄이는 것뿐이었지요."
■때론 마음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영화는 성공을 거뒀지만, 뮤지컬은 또 다른 시험대였다. 어떤 이야기가 영화로 성공했다고 해도 뮤지컬로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뮤지컬은 영화와 달리 고정비용이 큰 상품인데다 워킹타이틀은 그때까지 뮤지컬을 만든 경험이 없었다.
"처음 뮤지컬 제안을 받고 2개월 동안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죠. 빌리 엘리어트 이야기를 읽었던 그 순간으로요. 빌리 엘리어트는 단순히 1980년대 영국 북부의 작은 탄광 마을에서 자란 소년이 발레 댄서가 돼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꿈에 도전하는 일은 어렵지만 의미가 있다'는 보편적 스토리가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관객이 서울에 있든, 런던이나 뉴욕, 혹은 외딴 섬 한가운데에 있든 다르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적지는 모르지만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이 그와 회사의 철학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의 여행이 늘 즉흥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에겐 흥행 뮤지컬을 만드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최고의 전문가와 함께 일하라는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를 뮤지컬로 만들자고 했을 때 펠너 사장은 직원들과 회의하는 대신 그 스토리를 가장 잘 아는 외부 전문가들을 만났다. 우선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감독이었던 스티븐 달드리(Daldry)와 상의했다. 이어 원작자인 리 홀을 만났고, 음악을 맡길 엘튼 존과도 만나 의견을 구했다. 마지막으로 엘튼 존의 작업실에서 그가 만든 음악을 시연하며 전문가들의 반응을 들었다. 펠너 사장은 "엘튼 존의 작업실에서야 비로소 멋진 공연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둘째, 리스크(risk·위험) 관리다. 비용을 줄이고 위험을 분산하라는 말은 펠너 사장이 인터뷰 동안 여러 차례 강조한 원칙이다. "영화나 공연 같은 문화 산업에서는 일단 한 차례 성공하고 나면 비용을 물쓰듯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도 제작 비용을 과도하게 쓴 적이 있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른 적도 있습니다. 모험을 할 때는 창의성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최대한 비용을 아껴야 합니다."
영국에서 성공을 거둔 워킹타이틀이 첫 해외 공연지로 뮤지컬 최대 시장인 미국 브로드웨이 대신 호주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같은 영어라도 차이가 있고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미국 진출에 대해서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이 공연이 미국인들의 감성에 맞을까'라는 고민이죠. 그래서 우선 영국과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연결점이 많은 호주에서 공연한 뒤 점차 미국으로 확대하는 전략을 폈습니다."
세 번째는 '콘텐츠는 갈고 닦아야 빛난다'였다. 워킹타이틀은 일반적인 뮤지컬의 2~3배 가까운 시간을 리허설에 투입한다. 한국 공연의 경우도 3년의 준비 과정, 4개월의 리허설 기간을 요구했다. '빌리 스쿨'이라는 합숙 교육 기관을 만들어 주인공인 빌리 역할을 맡을 3~4명의 배우에게 발레, 탭댄스, 현대무용을 집중 교육했다. 장기간 투자해 스타를 키우는 스타 시스템은 그전 뮤지컬에서는 없었던 실험이었다.
■"두려움이 창의성을 죽인다"
세계적인 무용가 트와일라 타프(Tharp)는 책 〈창조적 습관〉에서 "창조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연습이며 습관"이라고 했다. 영화사처럼 창의성이 핵심인 기업이라면 창의성을 키우는 나름의 시스템이 있기 마련이다.
겉으로 보기에 워킹타이틀은 그저 자유로움을 강조하는 회사처럼 보였다. 사장부터 직원까지 티셔츠를 입고 일하고, 건물 4층에 마련된 카페테리아에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고급 커피머신이 갖춰져 있다. 웬만한 회의는 그곳에서 이뤄진다고 했다. 하지만 펠너 사장은 이런 분위기가 "기만적인 자유로움(deceptively casual)"이라고 했다.
"저는 저 자신을 포함해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늘 좋은 이야기, 좋은 영화를 생각하도록 요구합니다. 직원 7~8명은 뉴욕과 런던을 비롯해 전 세계 출판사와 수시로 접촉하며 아직 출판되지 않은 새로운 스토리를 얻기 위해 다른 영화사와 경쟁합니다. 심지어 우리 회사 소속 변호사, 회계사들도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죠."
그는 매주 두세 차례 '창의성 회의(creativity meeting)'를 한다. 간부들이 모여 어떤 것을 영화로 만들지, 지금 찍고 있는 영화가 잘 되고 있는지를 논의하는 자리다. 이 시간을 제외하면 그는 늘 4층짜리 회사 곳곳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만나는 직원들에게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고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위킹타이틀은 1999년 할리우드 제작사인 유니버설스튜디오에 인수됐다. 그러나 창의성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할리우드 문화를 강하게 비판했다.
"경제위기 이후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브랜드 엔터테인먼트(Brand Entertainment)'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브랜드가 확실한 수퍼 영웅이 등장하고 영화 제목만 보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는 영화들입니다. 예를 들어 '스파이더맨',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들이죠.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해 보자'고 말하면 모두 '그건 너무 위험해'라고 말하는 분위기입니다. 그런 공포나 두려움이 창의성을 죽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영화와 공연 산업이 세계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부탁했다.
"사실 우리는 운이 좋았습니다. 영어를 쓰는 미국,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시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지리적, 언어적 장벽은 생각보다 매우 높고 돌파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십시오. 영화의 30%가 힌두어 대사지만 이 영화는 미국이나 인도, 한국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습니다. '와호장룡' 같은 영화도 언어 장벽을 넘어선 경우이고, 쿠엔틴 타란티노(Tarantino)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도 영어 작품이지만 프랑스, 독일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진짜 이야기는 통하기 마련입니다."
◆영화사 '워킹타이틀'은?
빌리 엘리어트,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데드 맨 워킹, 러브액추얼리, 그린존…
모두 영국의 영화사 워킹타이틀(Working Title)이 만든 영화들이다.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는 한해 20편 내외의 영화를 만든다. 하지만 워킹타이틀이 만드는 영화는 한해에 고작 4~5편. 그러면서도 할리우드 영화와 경쟁해 세계 시장에서 종종 대박을 터뜨리는 거의 유일한 비(非) 할리우드 영화사이다.
드라마를 제작해 방송국에 납품하던 제작자 출신의 팀 베번(Tim Bevan)이 1983년 설립했다. 워킹타이틀은 가제(假題)라는 의미. 팀 베번이 가제란이 비워져 있던 시나리오를 읽다가 회사 이름으로 정했다.
1992년 폴리그램(Polygram)의 투자를 받으면서 에릭 펠너와 팀 베번의 2인 대표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1999년엔 유니버설스튜디오에 약 6억달러에 매각됐다. 유니버설의 대주주가 시그램(Seagram·캐나다), 비벤디(Vivendi·프랑스), GE(미국)로 차례로 바뀌는 동안에도 워킹타이틀은 총 9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해 4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유니버설에 인수될 당시 제작비 3500만달러 이하의 작품에 대해서는 '작품 제작에 일절 관여하지 마라'는 조건을 내건 것으로 유명하다. 2005년 빌리 엘리어트로 뮤지컬에 진출했고, 현재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을 뮤지컬화할 계획이다. 최근 '워킹타이틀 TV'를 세워 TV 드라마 시장에도 진출하는 등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