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 레이먼드 카버]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하루 종일 이대로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잠시 그 충동과 싸웠다.
그러다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항복했다. 비 내리는 아침에
나 자신을 온전히 맡기기로.
나는 이 삶을 또다시 살게 될까?
용서할 수 없는 똑같은 실수들을 반복하게 될까?
그렇다, 확률은 반반이다. 그렇다.
월트 휘트먼은 비를 '대지의 시'라고 했다. 세상을 순수하게 적시는 자연의 시. 이 글을 쓰는 지금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다. 약간은 차가운 봄비다. 이런 날은 감기 핑계라도 대고 이불 속에서 뒹굴고 싶어진다.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것은 최고의 사치다. 이 시 속의 비도 왠지 봄비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봄비 내리는 날에는 그저 마음에 순종하고 싶어진다.
레이먼드 카버 (1938~1988)의 시는 비 오는 날에 어울린다. 카버는 비가 많이 내리는 미국 오리건주에서 가난한 제재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에 세 살 어린 소녀와 결혼해 스무 살 무렵에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제재소 일꾼, 집배원, 주유소 직원, 화장실 청소부 등 온갖 일을 하며 대학에서 창작 과정을 들었다.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비웃었다. 30대에는 힘든 생활고와 아내와의 불화로 알코올중독에 빠졌다. 그때까지 3권의 시집을 냈으나 주목받지 못했다.
생계비를 버느라 글 쓸 시간이 없던 카버는 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차고에서 글을 썼다. 당장 글을 팔아 원고료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완성할 수 있는 단편소설을 주로 썼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가 흔히 만나는 웨이트리스, 버스 운전사, 정비공들이었다. 그렇게 매일 글을 쓴 결과 어느덧 단편소설의 대가가 되었다. 41세에 출간한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 Will You Please Be Quiet, Please?』가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르고, 이어 발표한 단편집 『대성당 Cathedral 퓰리처 상 후보에 오르면서 작가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영화 <숏 컷 Short Cuts>은 그의 단편소설들을 조합해 만든 것이다.
한번은 그가 작가 지망생에게 직업상의 비밀을 말해 주었다. “우선 살아남아야 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낸 다음, 매일 열심히 써라."이 시 〈비>는 오랫동안 계속된 알코올중독에서 마침내 벗어나고, 관계가 나빴던 아내와의 이혼으로 정신이 안정된 무렵에 쓴 것이다. 이 시기의 시에는 인생의 혼란에서 벗어난 평온함, 회한, 상실감, 삶에 대한 애정, 그리고 지우기 어려운 죽음의 예감이 담겨 있다. 얼마 후 폐암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그 실수들을 저지를 확률이 반반이겠지만, 카버는 너무나 멋진 작품들을 썼다. 그로 인해 1980년대 미국 문학은 단편소설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더 살았으면 노벨 문학상을 탔을 확률이 '절반 이상'이라고 평자들은 말한다. 그렇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반반이지만, 인생의 실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류시화 《시로 납치하다》 중에서
맹태영 옮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