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린 시절 넉넉하지 않아 배를 많이 곯았다고 했다. 주린 배를 채우려고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리면 산으로 칡을 캐러 다녔고, 논두렁의 국숫발같이 생긴 하얀 메꽃뿌리며, 이른 봄 올라오는 봄나물이며, 우렁이, 다슬기, 미꾸라지, 여름날 비 온 뒤 쑥쑥 올라오는 숲의 요정인 버섯 등 산야를 돌아다니며 먹을거리와 군것질거리를 얻었다고 했다.
중학교 친구였던 그를 80년대 초반 대학에서 다시 만났고, 그렇게 그와의 자취생활이 시작되었다. 학교는 산을 끼고 있었으며, 동네에는 아직도 농사짓는 분들이 제법 있는 동네였다. 산을 끼고 작은 개천도 있었고, 작은 웅덩이도 있었다. 그는 산야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나물과 버섯, 가재, 우렁이 같은 것들로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가끔은 동네 분에게 호박이나 무 같은 것들을 얻어와 반찬을 만들어 내어놓기도 했다. 남자들의 자취생활이라는 것이 하루 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 친구 덕분에 밥이 아니라 수제비라도 세끼는 챙겨 먹을 수 있었다. 자취방에는 친구들이 몰려들었고, 둘이서 한 달 먹을 만큼의 쌀은 일주일도 안되 동나는 것이 다반사였다.
80년대 초반, 시대적으로 민주주의가 군부독재에 의해 짓밟히던 시기일 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사회 전면으로 등장하는 시대였다. 대학마다 언더서클을 위시한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그룹들이 생겨났고, 자취방은 그들의 토론장이 되었다. 젊은 대학생들이 밤을 새워 토론하는 자리에 먹을 것은 필수였기에 우리네 곳간은 늘 비어 있었다. 그 시절은 왜 그렇게 다들 가난했는지 배도 많이 고팠고, 시린 마음을 달래줄 술도 많이 고팠다. 그것을 묵묵히 공수하던 친구가 그였다. 집에 다녀오는 날이면 장에 나가 닭을 사와 백숙도 만들고, 닭볶음도 만들어 오랜만에 별미를 만들어 나눴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기도 하고, 속칭 빈대도 붙어가며 살아가던 시절이었다.
어느 해 초가을, 그 친구와 나의 여자친구가 수업도 빠지고 사라졌다.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하필이면 내 생일날 내 여자친구와 어디를 간 것일까? 수업을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오니 그와 내 여자친구가 생일상을 거하게 차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일케이크는 없었지만, 이런저런 반찬이 푸짐한 밥상에 소주 한 병 곁들인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밥상에 올라온 것은 새우튀김, 우렁이 무침, 초고추장을 뿌린 돌나물과 씀바귀 무침이었다. 우렁이 무침은 자취방 옆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서 잡은 것이고, 돌나물은 화장실 뒤편에서 무성하게 자라던 것을 해온 것이며, 씀바귀는 논두렁에서 생일상 차리려고 뜯어온 것이라 했다. 300원 가량하던 소주도 겨우 샀다면서 새우튀김은 어떻게 만들었느냐 물었더니 그냥 웃기만 한다. 새우치고는 조금 작다 생각하며 튀김가루가 잔뜩 묻은 새우튀김을 집어들었다. 맛은 새우 맛이었다. 그런데 약간 이상하다. 다리가 있다. 더 살펴보니 비늘 같은 날개도 있다.
“다리가 있네? 날개도 있어? 이게 뭐냐?”
“요즘 새우는 날개하고 다리가 있다. 그거 메뚜기다.”
그랬다. 벼메뚜기였다. 생일상을 차리긴 해야겠는데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었단다. 그래서 자취방 옆에 있는 웅덩이에 있는 우렁이라도 잡아 우렁이 무침을 해주려 했는데, 메뚜기들이 날더라나. 그래서 그냥 튀겨서 술안주나 하려고 했는데, 밀가루와 튀김가루가 보이더라나. 그래서 벼메뚜기에 밀가루를 발라 튀김가루를 묻혀 튀길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튀긴 후 여자친구가 두 눈 꽉 감고 먹어보았더니만 새우 맛이 나더란다. 그래서 ‘새우튀김’이라고 속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날 받은 생일상, 그 이후 그때처럼 맛난 밥상을 받아본 적이 없다. 내 생애에 또 이런 밥상을 대할 수 있을까?
*제3자의 입장에서 쓴 글입니다. 3자는 중학교때부터 친구인 목사님이고, 그는 바로 접니다. 마눌님의 요청으로 상품에 눈이 멀어 쓴 글입니다. 마눌님 말 잘 들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