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육상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28년 만에 최악의 성적을 내고 말았다. 더욱이 남자마라톤에선 기대했던 5연패 달성에 실패해 팬들을 실망시켰다. 이번 호엔 아시안게임 육상경기를 소개하고 다음 호에는 침체를 맞고 있는 한국육상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산뜻한 출발, 남자경보 20Km 은메달 김현섭
도하아시안게임 육상경기는 12월7일 오전 8시10분(현지시간) 남자 경보 20km를 시작으로 45개 메달의 주인공을 가리게 됐다. 일 년 평균 강수량이 100mm에 미치지 못한다는 열사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경기 내내 코니쉬 해변도로에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펼쳐진 경보경기에서 김현섭 선수(삼성전자)는 아시안게임 경보사상 최초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세계 3위인 중국의 한유쳉을 따라잡기는 어려웠지만 일본의 두 선수를 막판에 따돌리며 극적으로 은메달을 획득해 그 기쁨은 더욱 컸다. 김현섭 선수는 6km 지점을 지나면서 1번의 DQ(Disqualification) Call을 받은 후 선두에서 20여 미터 이상 쳐지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13km를 지나면서 3위인 일본의 야마자키 유키를 따라잡았고 마지막 1km를 남겨 두곤 2위인 역시 일본의 모리오카 코이치로를 제치며 극적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종반에 스피드를 올리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DQ Call을 받아 실격을 걱정하기도 했지만 많은 국제대회에 출전하며 단 한 차례의 실격도 되지 않았던 노련한 경험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主 : 경보는 3번의 DQ Call을 받으면 실격처리 된다. 3명의 심판으로부터 각 1번씩 DQ Call을 받으면 실격으로, 경기도중에 경기장에서 나오게 된다.) 이 은메달은 아시안게임에서 수없이 많이 나오는 금메달로 인해 평가절하 될 수도 있지만 굉장한 의미를 지닌 메달이다. 육상의 전략종목으로서 경보를 육성한지 10여 년 만에 아시안게임에서 나온 첫 메달이기 때문이다.
특히 기술종목의 특성상 국제대회의 경험이 절실한 경보종목에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은 소속사와 폴란드 출신의 보단 수석코치, 대표팀 이민호코치 등의 노력의 결실이어서 그 의미는 더욱 크다. 김현섭 선수는 2004년 주니어 세계육상선수권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이후 시니어 무대 데뷔 해인 2005년 유니버시아드대회 은메달,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은메달을 획득했고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대회인 아시안게임에서도 은메달을 목에 걸어 아시아 정상권의 선수임을 증명했다. 이제는 세계정상권인 중국을 넘어서 올림픽과 세계육상선수권에서도 입상을 할 수 있는 선수로의 성장이 과제로 떠올랐다. 올해 나이가 21세인 만큼 앞으로 그의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너무나 아름다운 육상경기장. 칼리파 스타디움
육상경기가 펼쳐진 칼리파 스타디움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관과 최신식 시설을 갖춘 경기장 이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많은 육상 스타디움을 방문해 보았지만 칼리파 스타디움 만한 경기장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개, 폐막식에 전광판으로 사용된 스크린이나 공중 묘기를 연출하기 위한 연결선 등 부가적인 시설들이 경기장 본래의 건물과 어울려 예술적으로 배치가 되어 있어 경기장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했다. 막강 오일달러(실제로 카타르는 석유보다는 천연가스 생산량이 세계 2위인 나라다)를 무기로 경기장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것이 이런 훌륭한 경기장을 만들게 한 것이지만 당장 올림픽 경기를 치르기에도 무리가 없는 시설이었다.
아쉬운 점은 시설 이외의 다른 요소들은 낙제점이었다는 점이다. 인도, 네팔, 스리랑카 등의 외국인 노동자들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들의 무관심과 불친절, 대중교통 수단의 전무(실제로 경기장 이동 시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교통편 문제였다), 텅 빈 경기장과 자국선수들도 응원하지 않는 썰렁한 관중 분위기 등은 문제점이 아닐 수 없었다. 육상 경기장의 관중석은 카타르 사람들 대신 인도와 스리랑카 노동자들로 가득 찼고 경기력과는 관계없이 그 들 국가의 선수가 호명되면 우렁찬 함성이 나오고 다른 나라의 세계적 선수가 나와도 썰렁한 모습은 선진국에서 보아 온 육상경기장의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마치 이 곳이 카타르가 아닌 스리랑카나 인도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기대했던 종목들의 부진
육상 첫날 첫 경기에서 목표로 했던 은메달을 획득해 사기가 올라 있던 한국 육상 대표팀은 막상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되자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남자 100m 한국 기록 경신에 도전한다던 전덕형(충남대)은 예선에서 주저 앉았고 남자 해머던지기, 여자 포환던지기, 여자 창던지기에서는 메달에 2% 부족한 4위를 연속으로 기록해 투척 코칭스태프의 애를 태우기도 했다.
첫날 메달 이후 이틀 연속 메달 소식이 없던 한국팀에 대회 4일째 드디어 메달 소식이 전해졌다. 여자 100m 허들경기에서 이연경(울산시청) 선수가 한국기록인 13초23을 기록하며 동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인 대회 5일째에는 남자 10종 경기에서 김건우(포항시청) 선수가 동메달을 추가했다.
육상경기 종료를 하루 남겨둔 가운데 한국은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로 당초 목표로 했던 금3,은3,동3의 목표 달성이 어려워 졌다. 당초 금메달을 바라봤던 남자마라톤과 은메달을 기대했던 여자멀리뛰기와 남자허들 등에서 메달권 밖으로 밀리며 한국 임원진들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중장거리 종목에서 오일달러를 앞세운 중동국가들의 약진으로 전통의 강호이던 일본과 중국도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으니 한국도 이들 종목에서 하위권을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올 시즌 여자 5000m, 10000m, 하프마라톤에서 11차례 본인기록을 경신하며 동메달을 노렸던 박호선(삼성전자) 선수에겐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다. 10000m 경기에선 세계정상권의 후쿠시 가요코(일본)를 바짝 뒤쫓다 오버페이스를 했고, 5000m 경기를 앞두고는 감기가 걸리는 등 컨디션 조절이 쉽지 않아 모두 6위에 머물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번 아시안게임 육상경기는 전체적으로 기록이 흉작이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결승 경기가 온도가 15도 내외로 급격히 떨어지는 6시 이후에 실시되 선수들이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은 것이 큰 원인으로 분석됐다. 다행히도 한국은 대회 마지막 날 남자 창던지기에서 박재명(태백시청)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해 첫 애국가를 울릴 수 있었지만 확실한 금이라던 남자 세단뛰기의 김덕현(조선대) 선수가 동메달에 머물러 아쉬움을 더했다. 이로써 한국은 금1,은1,동3으로 육상종목 순위 10위를 기록했다. 1982년 뉴델리대회 이후 최악의 성적이었다. 이는 인도와 태국에도 뒤지는 성적이어서 그 충격은 더욱 컸다. 하지만 더욱 큰 충격은 대회 5연패에 도전했던 남자마라톤의 참패였다.
남자마라톤 5연패 실패
여자마라톤은 중국이나 일본, 북한과의 실력차가 있으므로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남자마라톤의 경우는 목표가 당당히 금메달이었다.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이후 4개 대회 연속 금메달을 획득했으니 무모한 계획도 아니었다. 하지만 러닝라이프 11월호 “도하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 5연패 도전”의 기사에서 필자가 예상했듯이 남자마라톤의 우승은 압도적 차이로 케냐출신의 카타르 선수인 무바락 하산 샤미에게 돌아갔다. 기록은 2시간12분44초.
2005년 헬싱키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마라톤 코스처럼 10km 코스를 4회 순환하는 도하아시안게임 코스는 매우 평탄했다. 하지만 출발 이후 5km를 지나면서부터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인지, 아니면 기록경쟁이 아닌 순위경쟁인 종합대회의 특성 때문인지 20km까지의 경기는 5km 당 16분40초 대의 여자 페이스로 진행됐다.
느린 페이스가 답답했는지 필리핀 선수가 잠시 홀로 선두로 치고 나가기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않았다. 한국의 대표선수인 김이용(체육진흥공단)선수는 이미 이 페이스에도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하프지점을 지나며 무바락 하산 샤미가 14분53초로 페이스를 빠르게 올리자 그것으로 경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잠시 일본의 이리후네 사토시와 바레인의 야신 카말(역시 케냐 출신) 선수가 따라 붙었지만 역부족 이었다. 오히려 후반 2위 다툼을 벌였던 일본의 오사키 사토시와 바레인의 야신 카말의 경기가 더 흥미로울 정도였다.
한국마라톤의 미래를 이끌어 갈 선두주자인 지영준(코오롱)선수는 20km를 넘어 샤미가 속력을 높이자 이내 선두권에서 모습을 감췄다. 지영준선수는 올해 19년만에 5000m 한국기록을 경신할 정도로 스피드에 있어서는 국내최고의 선수였음에도 20km까지의 느린 페이스 중, 단 한 번의 14분50초대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했다.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따라가지 못할 페이스는 아니었기에 아쉬움은 더욱 컸다.
본인이 경기 후 믹스트 존에서 실력차이로 패했다고 언론에 인터뷰를 했지만 훈련이나 컨디션 조절에 문제가 있었던 듯싶다. 초반부터 힘들어 하던 김이용 선수는 2시간27분11초로 19명의 완주선수 중 14위, 지영준은 2시간19분35초로 7위였다.
이번 대회의 메달획득 실패의 의미는 단순히 아시안게임 5연패 실패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지 않아 충격파가 클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이봉주 이외에 국내 최고의 선수인 김이용과 지영준을 파견하고도 아시안게임 3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또한 이번에 우승한 샤미 선수가 아직 메이저 마라톤 대회나 올림픽, 세계육상선수권에서 상위권에 들지도 못했던 속칭 에이스급 선수도 아니었고 일본도 2진급 선수들 이어서 그 보다 훨씬 강한 선수가 즐비한 다른 아프리카 선수들이나 일본선수들과 경쟁해 올림픽 등에서 메달을 따내기란 더욱 힘들어 보인다.
언론에선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뾰족한 대책이 없어 보인다. 여하튼 이번 아시안게임은 남자마라톤의 5연패 실패와 트랙, 필드 종목에서의 부진 등이 겹쳐 한국 육상의 도약을 위한 큰 과제를 안겨 준 대회로 기록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