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복 정경세(鄭經世. 1563~1639)는 1563년(명종 18년) 오늘날의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나 南人의 중심 인물이자 대학자요. 문신으로 본 저본은 우복선생문집(愚伏先生文集)으로 本集 20卷 10冊, 別集 12卷 6冊 등 全16冊 완질본으로 本集 권말에 ‘崇禎紀元後四甲辰(1844)仲夏愚山書院重刊’이라는 刊記, 別集 권말에 上之三十六年己亥(1899)后孫夏默謹書가 있다. <크기> 22.5×31.8cm이다.
[참고]
《우복선생문집(愚伏先生文集)》은 선조(宣祖)에서 인조(仁祖)대에 걸쳐 영남(嶺南) 남인(南人)의 중심 인물로 활약한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시문집(詩文集)이다. 본서는 대학자이자 관료였던 저자의 명성대로 내용이 풍부하고 자료적 가치도 높다.
우복선생문집의 원집(原集)은 효종(孝宗) 8년(1657)에 초간되었는데 본서는 헌종(憲宗) 10년(1844)에 간행된 중간본이다.
광무(光武) 3년(1899)에는 후손 정하묵(鄭夏默)에 의해 12권 6책의 별집(別集)이 보록, 간행되어 원집과 합집되어 유통되었다.
정경세의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門人)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유성룡의 학맥을 계승하였으며 예학(禮學)과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선조(宣祖) 19년(1586) 24세로 알성과(謁聖科)에 합격한 후 승문원(承文院)의 부정자(副正字)가 되었고 곧 사관(史官)으로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로 재임할 때 선정을 펼쳐 이름이 났지만 스승 유성룡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에 처해졌고 선조 22년(1589) 기축옥사(己丑獄事)와 관련하여 파직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상주(尙州)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光海君)의 구언소(求言疏)에 응하여 당시의 정국을 비판하다가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는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면서 주요 정책결정에 참여하였다.
특히 예학에 밝아 원종추숭(元宗追崇) 등의 전례(典禮)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자문역할을 맡았고 예학에 있어서는 이황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 남인이면서도 이기론(理氣論) 등 성리설(性理說)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유사한 점이 많았으며 노론(老論)의 인물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저서로는 문집과 함께 『사문록(思問錄)』, 『주문작해(朱文酌海)』, 『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다.
본서는 총 20권 10책으로 되어있는데 서(序)나 발(跋)은 없다. 권1 처음에 세부항목까지 소개한 전체 목록이 기재되어 있는데 각 권별로 수록내용을 살펴보면, 권1에는 『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의 사(辭) 1편과 『제종정명언후(題從政名言後)』등 시(詩) 80수, 권2에는 「제룡인양벽정(題龍仁漾碧亭)」 등 시 83수가 연대순으로 실려있다.
권3은 청(淸)의 대두와 그로인한 외교적 문제에 대해 明에 올린 『진위주문(陳慰奏文)』, 『청복등주구로주문주문(請復登州舊路奏文奏文)』의 주문(奏文) 2편과 『부윤 영의정 유성룡사직교서(不允領議政柳成龍辭職敎書)』, 『복절사의급수성신사수령역전진망장졸자손제직면천효유교서(伏節死義及守城身死守令力戰陣亡將卒子孫除職免賤曉喩敎書)』 등 교서(敎書) 7편, 『정사강일광회첩(正使姜日廣回帖)』, 『도독회첩(都督回帖)』등 자첩(咨帖) 8편, 『옥당청자강차(玉堂請自强箚)』, 『청종사오현문묘소(請從祀五賢文廟疏)』 등 소차(疏箚) 4편으로 되어있는데 임진왜란 및 전후대책에 대한 글이 많다.
권4에서 권7까지는 소차(疏箚)로서 『옥당론한재차(玉堂論旱災箚)』, 『의상례차(議喪禮箚)』, 『논답로서차(論答虜書箚)』, 『걸복수종군소걸해직귀장망자소(乞復讐從軍疏乞解職歸葬亡子疏)』, 『출사후사직소(出仕後辭職疏)』 등 총 88편인데, 권4와 권5는 임란에 대한 것과 상례(喪禮) 관련 내용이 많으며 권6과 권7은 사직을 청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권8은 『교하치경의(交河置京議)』, 『호패량전의(號牌量田議)』 등 의(議) 3편과 『사묘속호박고전례계(私廟屬號博考前例啓)』, 『청거혼조소상선묘조자계(請去昏朝所上宣廟祖字啓)』 등 계사(啓辭) 14편, 『상양경리호문(上楊經理鎬文)』 등 정문(呈文) 8편으로 되어있다.
교하천도(交河遷都) 논의와 호패(號牌)와 양전(量田), 내노(內奴)의 부호(復戶) 등 정책론이 주류를 이룬다. 권9에서 권13에는 263편의 서(書)가 실려있다.
권9는 『상서애선생(上西厓先生)』, 권10은 『답장지국(答張持國)』, 권11은 『답임탁이문목(答任卓爾問目)』, 권12는 『답정인보문목(答鄭仁輔問目)』, 권13은 『여상중거접사자(與庠中居接士子)』로 각각 시작되는데 유성룡(柳成龍), 이원익(李元翼), 이덕형(李德馨), 장현광(張顯光), 김장생(金長生) 등 당대의 명유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시사(時事), 문학(文學), 예의(禮儀), 성리(性理) 등 다방면에 걸친 논의를 접할 수 있다.
특히 김장생과는 예학에 대한 심도깊은 토의를 하고 있다. 권14에는 『우암설(愚巖說)』, 『고사촬요고오(攷事撮要考誤)』, 『금사계경서의문변론(金沙溪經書疑問辨論)』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잡저(雜著) 29편이 실려있다.
권15의 내용은 『낙사합계서(洛社合(<계>벤벼)序)』, 『종사묘정집례계첩서(從祀廟庭執禮契帖序)』등 序 8편, 『일묵재기(一默齋記)』 등 記 3편, 『흥양이씨가첩발(興陽李氏家牒跋)』, 『서무이지후(書武夷志後)』, 『서음부경최후(書陰符經崔後)』, 『서지봉채신잡록후(書芝峯采新雜錄後)』, 『서기고봉답구암서후(書奇高峯答龜岩書後)』 등 跋 20편이다.
권16은 표(表), 전(箋), 계(啓), 격(檄) 등의 형식으로 된 『사황제강칙면유표(謝皇帝降勅勉諭表)』, 『사사아마마장전(謝賜兒馬馬粧箋)』, 『상김초유성일계계(上金招諭誠一啓棨)』, 『모량격(募糧檄)』 등 공문서(公文書) 22편과 『도남서원묘상량문(道南書院廟上樑文)』 등 상량문(上樑文) 3편, 『병산서원향사축문(屛山書院享祀祝文)』 외 축문(祝文) 7편, 『황조진향제문(皇朝進香祭文)』, 『제수군엄사문(祭水軍(<엄>비구름일)死文)』 등의 제문(祭文) 31편으로 되어있다.
권17은 『의정부좌찬성권공신도비명(議政府左贊成權公神道碑銘)』와 같은 비명(碑銘) 7편, 권18은 『통정대부호조참의한공묘갈명(通政大夫戶曹參議韓公墓碣銘)』 등 묘갈명(墓碣銘) 10편과 『고려안렴사신공묘표(高麗按廉使申公墓表)』 등의 묘표(墓表) 7편, 권19에는 『목릉지(穆陵誌)』 등 묘지(墓誌) 7편이 들어있다. 권20은 행상(行狀)으로 부친 정여관(鄭汝寬)을 필두로 유성룡(柳成龍), 이덕형(李德馨) 등 4인의 행장이 실려있다.
권말에는 ‘崇禎紀元後四甲辰(1844)仲夏愚山書院重刊’이라는 간기(刊記)가 부기되어 있어 간행연도와 간행지를 알 수 있다. (김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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