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군 충무공 만운 정충신 묘(錦南君 忠武公 晚雲 鄭忠信 墓)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981-1.
贈崇政大夫判敦寧府事行碣誠奮威出氣效力桭武功臣正憲大夫平安道兵馬節度使
증숭정대부판돈녕부사행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정헌대부평안도병마절도사
八道副元帥錦南君鄭公贈諡忠武公墓 貞敬夫人河陽許氏祔左
팔도부원수금남군정공증시충무공묘 정경부인하양허씨부좌
贈崇政大夫判敦寧府事兼判義禁府事行碣誠奮威出氣效力桭武功臣正憲大夫錦南君
증숭정대부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행갈성분위출기효력진무공신정헌대부금남군
八道副元帥五衛都摠府都摠管諡忠武錦城鄭公忠信之墓 貞敬夫人河陽許氏祔左
팔도부원수오위도총부도총관시충무금성정공충신지묘 정경부인하양허씨부좌
만운 정충신 재취 정경부인 남원양씨 묘(晚雲 鄭忠信 再娶 貞敬夫人 南原 梁氏 墓)
정경부인 남원양씨지묘(貞敬夫人南原梁氏之墓)
정경부인 남원양씨지묘(貞敬夫人南原梁氏之墓)
금성정씨 금남군 충무공 만운 정충신(錦南君 忠武公 晚雲 鄭忠信, 1576~1636)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晚雲),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아버지는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정윤(鄭綸)이고, 어머니는 노비 신분이라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서 노비가 되는 노비종모법에 따라서 노비가 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권율(權慄, 1537~1599) 휘하에서 종군하였는데, 나이는 어렸지만 민첩하고 영리하여 권율의 신임을 받았으며 적지를 정찰하고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권율(權慄)이 왜병과 싸워 얻은 많은 전과와 작전계획 등을 왕에게 보고하는 장계를 의주의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자청하고는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여 장계를 전달하였다.
행재소에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주선으로 학문을 배우게 되면서 무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602년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여진족의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608년 조산보만호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고, 1614년(광해군6년) 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
이괄의 난 때 황주,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겼고 정묘호란 때 부원수가 되고,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데 반대하여 유배되었다.
1618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스승인 이항복(李恒福)이 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동행했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출병하였으나 후금에 대패하는 일이 일어나자 여진족의 정황에 밝았던 그가 다시 등용되었다.
1621년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를 정비하였고, 후금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고 조선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였다.
이후 안주목사겸 방어사가 되었을 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나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이듬해 절친했던 이괄(李适) 장군이 난이 일으키자, 한때 의심을 받기도 하였지만 도원수 장만(張晩, 1566~1629)의 휘하에서 전부대장으로 나서 이괄(李适)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섰다.
황주와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겨서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어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지고,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가 되었다.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 요양하였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과 단교하려는데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반대하며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여 당진에 유배되고, 후에 장연에 이배된 뒤 풀려났다. 이듬해 포도대장·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3월 그가 우려한 것과 같이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주전론이 득세하여 청과 단교하는 사신을 보냈고 후일 병자호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636년 병이 심해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에 진력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1636년 5월 사망하였다.
왕이 내시로 하여금 호상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禭衣)로 하게 했으며, 관청에서 의로써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했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해박하고, 청렴하기로도 이름이 높았다. 광주의 경렬사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만운집》, 저서에 스승 이항복의 유배일지를 기록한《백사북천일록》, 《금남집》 등이 있다.
그는 무술에 뛰어났으며 천문·지리·의학·복서에도 밝았다. 광주광역시의 옛 전남도청 앞에서 유동 4거리 가는 길인 금남로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시호는 이순신(李舜臣), 김응하(金應河), 김시민(金時敏)처럼 충무(忠武)이다. 시호는 충무공(忠武公), 군호는 금남군(錦南君)이며, 고려의 명장 정지(鄭地)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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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운 정충신 가계도(晚雲 鄭忠信 家界圖)
11대조 금성군 정성(錦城君 鄭盛)=금성정씨 시조
9대조 고려 명장 경열공 퇴암 정지(景烈公 退庵 鄭地)
고조부 현령 정원종(鄭元宗)
증조부 임피현령 증 공조참의 정천(鄭荐)
조부 증 호조참판 정석주(鄭錫柱)
부친 좌수 금천군 정윤(錦川君 鄭倫)
모친 증 정경부인 영천이씨, 정산현감 이인조(李仁祚)의 따님
금남군 충무공 만운 정충신(錦南君 忠武公 晚雲 鄭忠信, 1576~1636)
초배 정경부인 하양허씨, 첨지중추부사 허제(許悌)의 따님, 无后
재취 정경부인 남원양씨, 동지중추부사 양장수(梁長壽)의 따님
장남 장악원주부 정반(鄭䃑)
차남 죽산도호부사 금평군 정빙(錦平君 鄭砯), 장남의 지병으로 승종(承宗)이 가계를 잇다.
삼남 상주목사 정민(鄭砇)
출처>벽암 두루연가>구름에 달 by 碧巖 2023. 7. 11. 2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