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이주(吳履周)
[생졸년] 1684년(숙종 10)~1709년(숙종 35) / 향년 25세
조선 중기 사인(士人). 자는 계직(季直)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오사겸(吳士謙)이고, 조부는 오숙(吳䎘)이다. 부친 오두인(吳斗寅)과 모친 민성휘(閔聖徽)의 딸 여흥민씨(驪興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이숙(李䎘)의 딸 우봉이씨(牛峰李氏)이다.
6세 때인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서인(西人)이 실각하였을 때 부친이 인현왕후 민씨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국문을 받고 경기도 파주(坡州)로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성해서 부친이 처했던 상황을 알고는 늘 상복(喪服)을 입고 다녔으며, 후상(後喪)이 훼손되지 않도록 행동을 삼갔다. 또 여러 형들을 부친처럼 공경하며 화목하게 지냈다.
사물을 접할 때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사람을 사귈 때는 인품을 살피며 사귀었다. 또 모든 언행을 법도에 따라 한결같이 하였으며, 지은 문장(文章)은 순수하고 우아하였으나, 26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2녀를 두었다.
묘는 경기도 양성(陽城) 천덕산(天德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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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 오공 묘지명(姑母夫吳公墓誌銘) - 도암 이재(李縡)
공의 휘는 이주(履周)이고 자는 계직(季直)이다. 부친은 양곡(陽谷) 충정공(忠貞公) 휘 두인(斗寅)이고, 모친은 정경부인 상주 황씨(尙州黃氏)이다. 그 배위 유인(孺人) 이씨(李氏)는 우리 조부 우의정 휘 숙(䎘)의 막내딸이다.
숭정(崇禎) 후 갑자년(甲子年, 1684, 숙종 10)은 충정공이 회갑이 되는 해인데 공이 이때 태어났으니, 가장 어린 데다 자신을 몹시 닮아 충정공이 매우 사랑하였다. 벗들이 모두 시를 지어 기쁨을 표하였는데 의정공도 이 가운데 있었다. 6년이 지나 충정공이 화를 당하자 공은 어린나이에도 이미 슬피 사모할 줄 알았다. 종신토록 채색 옷을 입지 않고 남의 연회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기일(忌日)이면 처음 상을 당했을 때처럼 통곡하였다.
유인은 공보다 세 살 어리다. 유인도 의정공의 회갑 이듬해에 태어났는데, 그 이듬해에 의정공이 세상을 떠났다. 장성하자 배필을 택하여 공에게 시집왔다. 내 나이 7, 8세쯤에 충정공이 자신의 막내딸을 위해 우리 조부와 함께 나와의 혼인을 약속했는데, 두 집안이 화고(禍故)를 겪은 뒤에 비로소 장가들었다.
그때 공을 보니 재기 발랄한 소년으로, 황 부인(黃夫人)의 곁에선 화락한 모습이었고 여러 형님을 섬길 적엔 지극히 공경하고 조심스러웠다. 물러나 친족에게 들으니 모두 말하기를,
“오씨 집안에 인재가 있다.”
하였다.
공이 우리 집안에 장가들었을 때 공의 손윗누이인 내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황 부인이 우리 고모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온순함이 어찌 이리도 내 딸과 같은가.”
하였다.
또 일찍이 공과 유인을 어루만지며 내게 말하기를,
“이는 나의 훌륭한 아들과 며느리이니, 미망인이 죽어도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704, 숙종 30)에 황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지나치게 슬퍼하여 피를 토하더니 갈수록 심해져 기축년(己丑年, 1709, 숙종 35) 3월 22일에 끝내 세상을 떠났다. 10년 뒤에 유인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아! 슬프다.
공은 문예를 일찍 성취하여 16세에 향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격식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회시(會試)에선 낙방하였다. 공은 인품이 단정하고 중후하며 온화하고 고상하여 몸가짐이 처녀와 같았다. 교류한 이들은 대부분 이름이 알려진 선비였는데, 유인 또한 이들을 접대하는데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은 사람들과 모여 있을 때 허물없이 장난치거나 웃지 않았으며 정성스러운 뜻이 은연중에 미더웠다. 성품이 또 자애롭고 신실하여 남의 잘못을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이 세상을 떠나자 친척과 벗들이 모두 슬피 곡하였다. 유인이 세상을 떠난 날은 7월 1일로, 공의 무덤을 열어 양성(陽城) 천덕(天德)의 기슭에 합장하였으니 충정공의 무덤과 가깝다.
슬하에 딸 둘을 두었다. 장녀는 사인(士人) 이양중(李養重)에게 출가하였다. 막내는 공이 죽은 뒤에 태어났는데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공의 넷째 형 진주(晉周) 명중(明仲)이 자신의 어린 아들 범대(範大)를 공의 후사로 삼은 것이 지금 몇 해 되었다.
공은 일찍이 나를 형으로 대하였고 나는 공을 고모부라 불렀으니 정의가 막역하였다. 공의 둘째 형 도위공(都尉公)이 내게 공의 묘지를 부탁했으나 몹시 슬퍼 글을 지을 수 없었다. 지금 도위공 무덤의 묘목이 이미 무성하게 자랐고 작년에 명중마저 세상을 떠났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4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인사의 변천이 무궁하여 나만 홀로 남았는데 나 또한 노쇠하니, 인간 세상에 대해 어떤 마음이겠는가. 마침내 눈물을 거두고 공을 위해 이와 같이 서술한다. 그 세계(世系)와 세덕(世德)은 충정공의 신도비에 갖추어 있기에 다시 상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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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註解]
[주01] 고모부 오공 묘지 :
이 글은 오이주(吳履周, 1684~1709)의 묘지이다. 오이주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직(季直)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