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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제4권 / 묘갈(墓碣)
세마(洗馬) 이공(李公) 묘갈명
이(利)와 욕(欲)이 사람의 마음을 수렁에 빠뜨린 지가 오래되었다. 어느 정도 자중자애할 줄 아는 선비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줄줄이 이욕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다. 오직 내외경중(內外輕重)의 구분을 알아서 이욕에서 깨끗이 벗어난 경우를 나는 자가 산립(山立)이며, 호가 노파(蘆坡)인 성산(星山) 이공(李公) 휘 흘(屹)에게서 보았다.
무엇을 내(內)라고 하는가? 나에게 있는 양귀(良貴)가 바로 그것이다. 무엇을 외(外)라고 하는가? 남에게 있는 부귀(富貴)와 이달(利達)이 바로 그것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문사(文詞)로 당대에 이름이 났다. 한 번만에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사마시(司馬試)에도 합격을 하였다.
따라서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는 것이 마치 지푸라기를 줍듯이 쉬운 일이었을 텐데도 늙은 어버이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부친의 허락을 받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어버이 봉양하는 일에 전념하여 기뻐하는 안색과 맛있는 음식을 구비하여 드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어버이로 하여금 자식의 관록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게 하였으니, 온 집안에 자효(慈孝)하는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이것이 내면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선(善)을 실천하는 데에는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처럼 용감하고 이익과 명예에 대해서는 마치 겁쟁이처럼 피해 물러났으며 문달(聞達)을 추구하지도 않고 성세(聲勢)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빈궁한 데에 거처하면서 마음을 지켜서 식량이 자주 떨어져도 걱정하지 않았으며 남의 부귀를 마치 하찮은 물건처럼 보아서 조금도 부러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오로지 담박(澹泊)함으로 그 마음을 수양하고 산수(山水)로 그 정취를 즐기면서 일찍이 ‘삼공(三公)으로도 이 강산과 바꾸지 않겠다[三公不換此江山].’라는 부(賦)를 지어 그 뜻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 일찍이 감회를 읊기를,
처신하는 것도 처세하는 것도 꾀가 모자라고 / 處身處世謀殊拙
이익이다 명성이다 계획을 세운 바 없도다 / 求利求名計亦疏
어떤 사람이 와서 앞날의 일을 묻거들랑 / 有人來問前途事
웃으며 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가리키리라 / 笑指浮雲過太虛
하였으니, 이것이 외면을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먼저 그 대원칙을 세웠기 때문에 몸을 단속하거나 향당에 처신하거나 벗을 만나는 문제를 한 가지라도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 성품은 온화하면서도 굳세며 그 행동은 중후하면서도 절도가 있었고 그 말은 어눌하였으나 그 마음은 민첩하였으며, 외모는 수수하였으나 내면은 분명하였다. 성격이 활달하여 일 처리를 과감하게 하였으며, 모나는 짓을 하지 않았고 구차하게 영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나는 항상 ‘공(公)’ 자를 손바닥 위에 써 보면서 마음 쓸 때나 일 처리 할 때에 생각을 언제나 여기에 두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마음이 공평한 자는 자신만 옳고 남은 그르다고 여기는 마음이 없으며 오직 의리에 합당한가의 여부만 따질 뿐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자신을 위한 뒤에 남을 위할 수 있으며 사리를 통달한 뒤에 일을 처리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어떤 유생이 붕당(朋黨)에 관한 논의(論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이는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가 사람을 향해 투기하는 것과 같아서 매우 우스운 일이다.” 하였다. 남의 좋은 점을 보면 난초(蘭草)가 있는 곳에 나아가듯이 하고, 남의 나쁜 점을 들으면 뱀이나 전갈을 피하듯이 하였다. 평소에는 공손한 모습으로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의리를 판단하고 시비를 밝히는 데에 이르면 단호하여 범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성격이 책 보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줄지 않았으며, 입에는 읊조리는 것이 끊이지 않았고 손에는 책을 놓지 않았다. 경전(經傳)과 자사(子史)를 두루 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보고 나면 반드시 다 기억하였다. 선현(先賢)의 잠명(箴銘)과 도서(圖書)를 직접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책상에 두고 이르기를, “배우는 자가 여기에서 진실로 마음으로 터득하고 몸으로 행할 수 있다면 일생 동안 받아 쓸 수 있는 것이 다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특히 사람들을 잘 가르쳐서 한집안의 자손과 향당의 자제들까지 재능에 따라서 지도하여 성취한 바가 많았으니 어쩌면 그렇게 말과 행실이 아름답고 잘 갖추어졌는가. 대개 근본이 맑고 취사가 분명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그 근원을 만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선유(先儒)가 이른바, “명예와 이끗의 관문을 터득하면 바로 거기가 조금 쉴 수 있는 곳이다.” 하였는데, 공이 이 말에 가깝다 하겠다.
공의 아들이 공의 장례(葬禮)를 마친 뒤에 편지와 행장을 보내어 나에게 갈명(碣銘)을 부탁하면서 이르기를, “나의 아버지를 아는 분으로 공만 한 분이 없으니, 갈명을 사양하지 말고 지어 달라.” 하였다.
내가 받아서 읽어 보다가 다 읽기도 전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어서 그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세계(世系)는 성산(星山)에서 나왔고, 고려 벽진장군(碧珍將軍) 총언(怱言)의 후손이었다. 16세를 지나서 휘 약동(約東)은 벼슬이 자헌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고, 시호는 평정공(平靖公)이며 청백리(淸白吏)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공의 5세조이다.
그 아들 휘 승원(承原)은 절충장군을 지냈으며, 증조(曾祖) 휘 유량(有良)은 충무위 부호군(忠武衛副護軍)을 지냈다. 조(祖) 휘 통(通)은 충순위(忠順衛)를 지냈고, 이분이 충무위 부사과 휘 하생(賀生)을 낳았는데,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아들이 재주를 간직하고도 과거(科擧)를 보지 않겠다는 말을 들어주었으니 그 지조가 청렴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다.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는 광평군(廣平君) 휘 능(能)의 후손으로, 해남 현감(海南縣監) 휘 순조(順祖)가 대부(大父)이며,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 휘 사훈(士訓)이 아버지이다. 공은 가정(嘉靖) 정사년(1557, 명종12) 6월 3일 신해일에 태어나고 천계(天啓) 정묘년(1627, 인조5) 2월 20일 정사일에 졸하니, 향년 71세이다.
장례는 이해 3월 17일 갑신일에 노파(蘆坡)에 있는 신좌을향(辛坐乙向)의 언덕에 치렀는데, 여기는 공이 만년에 자리를 잡아 놓은 곳이다. 공이 중직대부(中直大夫)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겸 춘추관편수관(春秋官編修官)인 연안(延安) 이구인(李求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회일(會一)인데 진사였고, 2남은 양일(養一)이다. 모두 문장으로 명망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다. 3남은 심일(審一)이다. 장녀는 진사 성박(成鑮)에게 시집가고, 2녀는 사인(士人) 조임도(趙任道)에게 시집갔다. 회일은 상산 김씨(尙山金氏)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된 양지(㔦之)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수억(壽檍)과 수강(壽橿)이며, 장녀는 신동망(辛東望)에게 시집가고, 2녀는 정견(鄭枅)에게 시집가고, 3녀는 어리다. 양일의 초취(初娶)는 학생 박창도(朴昌道)의 딸이며, 재취(再娶)는 주부(主簿) 김수(金洙)의 딸인데 모두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수강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심일은 사인(士人) 정이례(鄭以禮)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수역(壽櫟)이며, 딸은 모두 어리다. 성박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한영(瀚永), 해영(澥永), 탑영(漯永), □영(□永)이며, 딸은 안몽진(安夢稹)에게 시집갔다. 조임도는 몇 명의 아들과 몇 명의 딸을 두었다.
아, 공의 아들 심일(審一)이, 나더러 공을 안다고 말한 것은 저의 아버지의 속마음을 진정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건대, 내가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해 온 지가 벌써 몇 해가 되었는데도 힘이 없어 공의 이름을 추천하는 글에다가 싣지 못하였으니, 현인의 진로를 가로막은 죄를 피할 수 있겠는가.
금년 봄에 혼란한 강도(江都)에 갔다가 서전(西銓)의 벼슬을 하게 되었으므로 비로소 공을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의망하여 다행스럽게도 은혜로운 제수를 받았다. 이것을 나의 친구들은 탐탁지 않게 여길 일이지만 또 노병이 심한 탓에 필시 나올 수 없을 줄을 알고 오직 나의 죄를 조금 모면하는 것으로 다행스럽게 여기려 하였는데, 얼마 후 공의 부음을 들었으니 나의 애통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아, 내가 차마 명을 쓸 수 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큰 그릇을 내리시니 / 天畀公器
호련같이 아름답도다 / 瑚璉之美
공이 능히 그것을 받아서 / 公能受言
감히 떨어뜨리지 않았네 / 不敢失墜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경하여 / 入孝出悌
그 근본을 배양하고 / 養其根也
부지런히 책을 읽고 선을 좋아하여 / 劬書樂善
밖으로 빛을 더하였네 / 發其文也
더럽혀질 것을 두려워하여 / 恐其汚也
영달은 생각지도 않고 / 絶慕榮利
흠이 될까 두려워서 / 恐其瑕也
편히 운명을 받아들였네 / 安受命義
이와 같은 보배를 가졌는데 / 有寶如斯
어찌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는가 / 胡不以試
이름을 감추고 자취를 감추고 / 藏名賁跡
백수로 구학에 묻혔다네 / 白首丘壑
공에게는 즐겁겠지만 / 在公則樂
당세를 위해서는 애석하여라 / 爲時可惜
노파의 언덕 / 蘆坡之崗
용천가에 / 龍川在傍
공이 자리를 잡았으니 / 公玆宅之
만세토록 손상됨이 없으리라 / 萬世無傷
ⓒ 한국고전번역원 | 조동영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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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洗馬李公墓碣銘
利欲之陷溺人心久矣。士之稍知自好者。亦不免相率而落於坑塹。惟能知內外輕重之分。而洒然獨脫者。吾於星山李公諱屹。字山立。蘆坡其號者。見矣。何謂內。在我之良貴。是也。何謂外。在人之富貴利達。是也。公自早歲。以文詞名於時。一擧而魁鄕解。中司馬。其於決科第拾靑紫。宜若拾芥。而以親老不欲離側。承家嚴諾。遂廢擧業。收蹤返服。專意養親。怡悅之色。滫瀡之養。靡不備至。使其親不欲以祿養。而惟以養其志爲樂。一家慈孝之風。藹然盈溢。茲非重乎內者歟。公於爲善。勇若賁, 育 。於利與名畏避。退處如怯夫然。不求聞達。不趨聲勢。居窮守約。不以屢空爲憂。見人富貴。如視土芥。無一毫歆羨之意。惟以沖澹養其心。山水娛其趣。嘗作三公不換此江山賦。以見其志。又嘗詠懷曰。處身處世謀殊拙。求利求名計亦疏。有人來問前途事。笑指浮雲過太虛。玆非輕乎外者歟。惟其先立其大者。故凡所以持其身。處乎鄕。接乎朋友者。無一不可對人言者。其性和而毅。其行厚而方。其言訥而其心敏。其外朴而其內明。城府洞豁。處事勇斷。不爲崖岸。不喜苟合。嘗曰。吾常以公字。指畫掌上。處心行事。念念在此。又曰。心平者。無是己非人之心。惟求義理之當否。又曰。爲己而後。可以及人。達理而後。可以處事。嘗見一儒生好爲朋黨之論。曰。是未嫁處子。向人妬忌。極好笑也。見人之善。如就芝蘭。聞人之惡。如避蛇蝎。平居恂恂若無甚可否。至於判義理明是非。截然有不可犯者。性喜觀書。老而不衰。口不絶吟。手不停披。經傳子史。無不周覽。覽必強記。手書先賢箴銘圖書爲一卷。置諸几案曰。學者於此。誠能心得而體行之。一生受用不窮矣。尤善敎人。自一家子孫曁鄕黨子弟。無不隨才誘導。多所成就。何其言行之懿且備也。蓋其本源澄澈。取舍分明。故無往而不逢其源。先儒所謂透得名利關。方是小歇處者。公其庶幾乎。公之孤葬公訖。卽以書若狀。徵銘於余曰。知吾父宜莫如公。銘其勿辭。余受而讀。讀未了。泫然以悲。仍按其狀。公系出星山。高麗碧珍將軍悤言之後。歷十六世。有諱約東。官至資憲大夫知中樞府事。贈諡平靖公。封淸白吏。是公五世祖也。其子諱承元。折衝將軍。曾祖諱有良。忠武衛副護軍。祖諱通忠順衛。寔生忠武衛副司果諱賀生。卽公之考也。能聽其子懷才廢擧。其志操廉靜可想。其配廣州李氏。廣平君諱能之後也。海南縣監諱順祖。其大父也。忠武衛副司直諱士訓。其考也。公生於嘉靖丁巳六月三十日辛亥。卒於天啓丁卯二月二十日丁巳。去生之年七十一歲。葬得是年之三月十七日甲申。原卜蘆坡辛坐乙向之岡。寔公之晩年卜築地也。公娶中直大夫,宗簿寺僉正兼春秋館編修官延安李求仁之女。生三男二女 。長曰會一。進士。次曰養一。俱有文名。不幸早世。次曰審一。女長適進士成鑮。次適士人趙任道。會一娶尙山金氏。贈戶曹參判㔦之之女。生二男三女。男曰壽檍。曰壽橿。女長適辛東望。次適鄭枅。次幼。養一初娶學生朴昌道女。再娶主簿金洙女。俱無子。取兄子壽橿爲後。審一娶士人鄭以禮女。生一男二女。男曰壽櫟。女皆幼。成鑮有四男一女。男曰瀚永。曰澥永。曰漯永。曰▣永。女適安夢稹。趙任道有幾子幾女。嗚呼。公子審一。謂我知公眞知乃公心者也。顧余竊祿于朝。有年于茲。無氣力 。未能以公名載薦書。蔽賢之罪。其可辭乎。今年春。赴難江都。忝入西銓。始以公擬翊衛司洗馬。幸蒙恩除。此非吾友所屑。且也老病甚。知其必不能出。而惟以小贖吾罪爲幸。俄聞公訃。余痛曷窮。嗚呼。吾尙忍銘也夫。銘曰。天畀公器。瑚璉之美。公能受言。不敢失墜。入孝出悌。養其根也。劬書樂善。發其文也。恐其汚也。絶慕榮利。恐其瑕也。安受命義。有寶如斯。胡不以試。藏名賁跡。白首丘壑。在公則樂。爲時可惜。蘆坡之岡。龍川在傍。公茲宅之。萬世無傷。<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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