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서원 묘정비(龍山書院 廟庭碑)
강원도 동해시 쇄운동 202 – 1. (효자로 583)
전면 :
龍山書院 廟庭碑
좌측면 :
선생이란 대우주(大宇宙)의 섭리(攝理)와 인생(人生)의 강상(綱常)을 고구(考究)하여 대동천하(大同天下)를 이루고자하는 하늘의 특사(特使)이다. 우리 동방(東方)에도 이러한 스승이 오셨으니 구천(龜川)선생이 그분이시다.
선생은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육촌(六村)의 수장(首長)이며 사로국(斯盧國)을 창업(創業)한 알평공(謁平公)의 원대손(遠代孫)이고 임란(壬亂)에 종사생민(宗社生民)을 건진 문충공(文忠公) 백사(白沙) 휘(諱) 항복(恒福)의 증손(曾孫)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 증(贈) 좌찬성(左贊成) 휘(諱) 시술(時術)과 참판(參判) 휘(諱) 홍영(洪霙)의 따님 사이에서 인조(仁祖) 임오(壬午) 1642년 중자(仲子)로 탄생(誕生)하였다. 휘는 세필(世弼)이요 자는 군보(君輔)이고 호는 구천(龜川)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다.
효종(孝宗) 을해(乙亥) 1659년에 송우재(宋尤齋) 시열(時烈)의 폄박(窆薄)을 소백(疏白)한 일로 현묘(顯廟)의 진노(震怒)를 사서 영광(榮光)으로 유배(流配)되어 숙종(肅宗) 무오(戊午) 1678년에 풀렸고 누천(累薦)된 뒤에 용안현감(龍安縣監)으로 갔다가 흉년(凶年)을 당하여 현민(縣民)을 정성(精誠)으로 구휼(救恤)하고 학교(學校)를 일으켜 대소학(大小學)을 친수(親授)하였다.
뒤에 군수(郡守) · 목사(牧使) · 부사(府使)에 누진(累進)되면서 전후(前後) 구배(九拜)를 받았으나 불취(不就)하고 숙종(肅宗) 계미(癸未) 1703년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월임(越任)하였다. 척주(陟州)에는 대령이동(大嶺以東)의 빈해(濱海)로 돌리어 사람들이 복순(僕淳)하였으므로 선생은 우선(于先)
후면 :
요역(徭役)을 줄이고 부세(賦稅)를 감(減)하며 스스로 녹봉(祿俸)을 내놓아 척주(陟州)의 북방(北方) 용산지(龍山址)에 서실(書室)을 신축(新築)하고 21조(二十一條)의 학규(學規)를 지어 참봉(參奉) 최세량(崔世亮)을 도훈장(導訓長)으로 임명(任命)하여 친강(親講)하기 1년(一年)만에 사린(四隣)에서 현송(絃誦)의 향(鄕)이라 칭송(稱頌)하였다.
숙종(肅宗) 을유(乙酉) 1705년에 선생의 은혜(恩惠)에 보답(報答)하고자 동지(同志) 8인(八人)이 모곡계(募穀契)를 창계(創契)하였으며 기후(其後) 28인(二十八人)으로 증원(增員)되어 엄격(嚴格)한 계규하(契規下)에 운용관리(運用管理) 미저(微底)로 서당창건(書堂創建)의 기틀을 굳게 다졌으며 발전(發展)에 큰 몫을 하였다.
동년(同年) 선생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 승배(陞拜)되어 상경(上京)하니 학자(學者)들이 회모(懷慕)의 정을 이기지 못하여 화사(畫師) 주재해(奏再奚)에게 請託하여 선생의 진상(眞像)을 그려다가 생사당(生祠堂)에 모시고 향화(香火)를 올렸고 흥학비(興學碑)를 세웠으며 숙종(肅宗) 을해(乙亥) 1719년 원사(院祠) 삼간(三間)을 증축(增築)하여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용산서원(龍山書院)이라 제액(題額)하였다.
뒤에 선생의 계남(季男) 강원안찰사(江原按察使) 형좌(衡佐)와 외손(外孫) 영남절도사(嶺南節度使) 박문수(朴文秀)가 많은 부조(扶助)를 하였고 장남(長男)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 태좌(台佐)가 전답(田畓) 수결(數結)과 원노(院奴) 두명(二人)을 공여(供與)하였다.
서원은 일취발전(日就發展)하여 사우(祠宇) 1동(一棟)과 동 서재(東西齋) 2동(二棟)· 강학당(講學堂)· 1동(一棟)· 비각(碑閣)· 신삼문(神三門)· 원장(垣墻) 등의 시설(施設)과 전답(田畓)도 60필지(六十筆地)에 이르렀으나 고종(高宗) 무진(戊辰) 1868년 대원군(大院君)의 서원(書院) 철폐령(撤廢令) 때 삼척향교(三陟鄕校)로 이부(移付)되었으며 갑오(甲午) 1954년에 구지(舊址)에 설단(設壇)하고 공을 제향(祭享)하였으며 삼년(三年) 후에 서원을 재건(再建)하고 춘추(春秋)로 제향(祭享)한다.
1966년 용산사(龍山祠) 1동(一棟)과 동 서재(東西齋) 2동(二棟)을 재건(再建)하여 삭망일(朔望日)에 분향(焚香)과 매년(每年) 삼월(三月) 삼진일(三辰日)에 다례제(茶禮祭)를 봉행(奉行)한다. 선생은 삼척을 떠난 뒤 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와 공형조참판(工刑曺參判)을 역임(歷任)하고 영조(英祖) 을미(乙未) 1775년에 왕조례(王朝禮) 일서(一書)로 포유(褒諭)되어 시호는 문경 증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선생의 장자(長子) 태좌(台佐)는 좌상(左相)에 이르고 장손(長孫) 종성(宗城)은 영상(領相)에 올랐다. 선생의 교학(敎學)은 삼대지교(三代至敎)로 풍속(風俗)을 선화(善化)하고 인민(人民)을 정숙(貞淑)께 하는 것이어서 입어예(立於禮) 민어학(敏於學) 독어인륜(篤於人倫)이었고 부자(父子)됨과 군신(君臣)됨의 도(道)였으며 일언이폐(一言以蔽)하면 치예(治禮)와 서질(敍秩)의 근원(根源)을 구명(究明)하는 것이므로 경전(經典)의 오의(奧義)와 공안국정현(孔安國鄭玄) 등의 전소(箋疏)에 박통(博通)하고 당대(當代)의 예론자(禮論者)들의 종장(宗長)으로 받들었던 것이다.
아!
지금처럼 방향(方向)을 잃고 헤매는 때에 선생과 같이 고매(高邁)한 스승이 계신다면 치자(治者)는 근검(勤儉)하기를 애쓰고,
생민(生民)은 분수(分數)를 지킬 것이니 이 아니 청평세계(淸平世界)인가.
시대가 혼탁(混濁)할수록 더욱 숭모(崇慕)의 정이 사무치는 도다.
귀양(歸養)살이 후진 삶 속에 도학(道學)을 전하였고,
대기근(大飢饉) 구휼(救恤)하며 학문(學問)을 교수(敎授)했네,
삼척 궁벽(窮僻)한 땅 박순(樸淳)한 향인(鄕人)들에게 녹봉(祿俸)을 다 받쳐 서실(書室) 짓고 훈도(訓陶)했네,
스승이 가신 뒤에 사모(思慕)의 정(情) 사무쳐서 임의 진상(眞像) 걸어놓고 생제사(生祭祀)를 올렸었고
300년(三百年) 긴 세월(歲月) 한결같은 경모(敬慕)의 뜻 예학(禮學)의 종장(宗長)에게 있어야 할 제자(弟子)였네.......
우측면 :
西紀 二千一四年 三月 日
瓢巖學術院長 哲學博士 李相斐(이상비) 謹撰
龍山書院 文敬公 龜川先生追慕會 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