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시[富川市]
역사
이 지역에서 구석기나 신석기유물이 발견된 바는 없으나 한강유역에 신석기유적이 다수 분포하고 있고, 삼한시대에는 이 지역이 마한의 우휴모탁국(優休牟啄國)이 있었다는 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도 신석기시대부터는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천시는 대부분의 시·군과 달리 전통시대의 행정치소가 위치한 곳이 아니며, 일개 자연마을 내지 면지역으로부터 성장 발전했기 때문에 이렇다 할 역사적인 변천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천지역에 속했던 부평의 내력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부평은 고구려시대에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 칭했는데, 757년(경덕왕 16)에 장제군으로 개칭되어 한주(漢州)에 소속되었다. 940년(태조 23)에 수주(樹州)로 개칭되었고, 995년(성종 14)에 단련사(團鍊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되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를 두었다. 1150년(의종 4)에는 안남도호부로 승격되었는데, 안남이란 계양산(桂陽山)의 별칭인 안남산에서 따온 것이다.
1215년(고종 2)에는 다시 계양산의 이름을 따서 계양도호부로 개칭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에는 길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1310년(충선왕 2)에 부평부로 개명, 강등되었으며, 금주·동성·통진·공암·김포·수안의 6개 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1413년(태종 13)에 부평도호부로 개칭되었다.
조선조에 와서 도호부로 내려오던 부평이 1895년(고종 32)에 군으로 강등되어 인천부에 속했다가 1896년에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1899년 경인선철도가 부설됨에 따라 부천지역에 소사역이 설치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인천부는 개항장에 한정되고, 그 나머지 지역과 부평부 그리고 남양군의 영흥면·대부면과 강화군의 신도·시도·모도·장봉도 등을 통합, 부천군이 신설되었다. 이때부터 부천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부평과 인천을 합하여 만든 지명이다. 지금의 부천지역이 부평군 당시는 석천면(石川面)·수탄면(水呑面)·옥산면(玉山面) 지역이던 것이 부천군이 신설되면서 이들 지역이 통합되어 계남면(桂南面)이 되었다. 1931년에 이르러 계남면이 소사면으로 개칭되었고, 1941년에는 소사읍으로 승격되었다. 소사는 복숭아로 유명한데, 수원의 딸기, 안양의 포도와 함께 경기삼미(京畿三味)로도 알려져 왔다. 소사에 복숭아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1903년경에 일본인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시험 재배한 때부터라고 한다.
1957년부터 이곳 범박동 일대에 ‘대한예수교부흥협회’라고 하는 종교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총 43만 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주택·공장·공공시설 등을 건설하여 1만 여 명이 입주했는데, 이곳을 신앙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63년에 소사읍의 7개 리와 오정면의 2개 리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고 작약도가 인천시로 편입되었다. 1973년에 부천군이 폐지되고 소사읍 일원을 중심으로 부천시가 신설되면서 과거 부천군의 소래면을 시흥군으로, 오정면·계양면은 김포군으로, 영종면·북도면·용유면·덕적면·영흥면·대부면은 각각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다. 그 뒤 1975년에 오정면과 소래읍의 일부지역이 다시 부천시에 편입되었다. 1979년에 원미동으로 시청사가 이전되고, 1988년 남구·중구가 설치되었다. 1993년에는 오정구가 설치되었으며, 중구는 원미구로, 남구는 소사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6년 7월 소사구, 오정구, 원미구가 폐지되고 동 기능이 강화된 10개의 행정복지센터가 신설되었다. 2019년 7월 1일 36개 행정동이 10개 행정동으로 개편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6-0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