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인간을 읽다김삿갓의 방랑이 멈춘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입력 2023.06.13. 19:05양기생 기자
[마을과 인간을 읽다]③화순 구암마을
돈 없는 이, 배를 주리는 이 등
고달프고 답답한 삶을 살아갔던
민초들의 애환을 시로 풀어내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서럽게
풀어낸 글은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위안으로
방랑 시인 김삿갓이 반한 화순 적벽의 풍경.
[마을과 인간을 읽다]③화순 구암마을
일찍 알던 서당을 이내 와보니 書堂乃早知
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房中皆尊物
학생은 모두 열 명도 못 되고 生徒諸未十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구나. 先生來不謁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
어느 저녁 무렵, 시인은 제법 유명한 서당에 이른 듯하다. 땅거미는 일찍 내려오고 사위는 어두워 하룻밤 묶어가길 청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한 모양이다. 그는 특유의 음담으로 서당 사람들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이 시는 소리 나는 대로 읽어야 제맛이 난다.
김삿갓은 과거 시험에서 자신의 조부를 비판하는 내용을 써서 급제했다가 이 사실을 뒤늦게 안다. 그래서 자신을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여기고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선다. 사람들은 김삿갓 하면 세태를 풍자하고 사회 부조리를 고발한 시인으로 먼저 기억한다. 하지만 풍자와 조롱의 바탕에는 언제나 방랑과 허무가 짙게 베여있다.
박인희가 가냘픈 목소리로 ‘방랑자’를 부르는 모습이나, 이치현의 ‘집시 여인’을 듣고 있으면 절로 노래에 빠져든다. 가사처럼 우리는 모두 정착과 방랑, 가난과 부귀, 빈궁과 안락, 생과 사 사이를, 그네처럼 오가는 나그네인지 모른다. 깊고 넓음의 작은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누가 더 정착하고 방랑하느냐는 거기서 거기다.
방랑은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고달픈 일이다. 하루 이틀은 멋지지만, 정처 없이 떠돌다 보면 걷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돈 없는 방랑은 더욱 그렇다.
전(錢)」이란 시는 돈을 “천하를 주유하며 어디서나 환영받고(周遊天下皆歡迎) 살리고 죽이는 것도 마음대로 한다.(生能死捨死能生)”고 노래하고 있다. 자유롭고자 했던 그도 평생 돈 문제만은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김삿갓은 남쪽으로 무작정 발길을 걷다가 옥구에 도달한 모양이다. 그곳 김 진사 집을 찾아가서 하룻밤 묵기를 청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돈 두 푼을 주며 객을 밀어냈다.
옥구 김 진사가 沃溝金進士
내게 돈 두 푼을 주네. 與我二分錢
죽어 없어지면 이런 일 없으련만 一死都無事
육신이 살아 있어 평생 한이로구나 平生恨有身 -옥구김진사(沃溝金進士)-
나그네에게 구차한 것이 입이다. 입은 음풍농월의 아름다운 시구를 쏟아내기도 하지만 시장하면 가장 천박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항상 고결하고자 하나 또한 가장 비루하기도 하니 입구 자 세 개를 합해야 품(品), 품격 품위가 드러난다. 그래서 주려본 시대 사람들은 그의 시를 공감하고 그의 삶을 안타까워한다.
삶이 고달프거나 답답하면 그를 만나러 가거나 잠시 그를 닮고자 길을 나선다. 마을 앞이나 뒷산 어디든 바람 불고 나무가 흔들리고 하늘은 푸르다. 거기 산에도 바람에도 그가 있어 그를 만나서 인생 수업 좀 듣고 돌아오면 가슴이 후련해진다.
동복 가는 길은 딱 그런 곳이다. 누구나 며칠 머물거나 숨어 살고 싶기 맞춤인, 산과 물이 얽히고설켜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막힌 곳, 적당한 들판이 있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인심이 나그네를 붙잡고 걸음을 멈추라고 유혹한다.
연둔리 숲
우리들의 몸에는 동복호나 광주호 같은 호수가 있어서 본능적으로 물을 찾는다. 구암리에는 김삿갓 마음을 단숨에 앗아간 무엇이 있었던 것 같다. 하나는 자연이고 다른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람일 것이다. 멋진 경치야 어딘들 멋지지 않았을까. 삿갓을 사로잡은 것은 어쩜 인심, 곧 먹거리와 잠잘 곳이 아니었을까. 수없이 굶고, 궁벽하게 노숙했던 그에게 동복 땅은 고민을 일시에 해결해줄 수 있는 여태 찾던 낙원이나 샹그릴라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말년 인생 대부분인 6여 년을 화순에 머물다 숨을 거뒀다.
구암마을 앞으로 동복천이 흐른다. 동에는 시루봉, 서쪽은 작살봉이 마을을 껴안고 있다. 산들은 놋종골, 매방굴, 덕골, 오가정굴, 맷골, 북당골, 초봉굴 방죽굴 등 많은 골짜기를 품고, 마을 주변으로는 바위와 방죽들이 잘 어우러졌다. 그 물들이 흘러내려 달천을 이루고 적벽강으로 흘러든다.
마을 앞 연둔리가 자라 형국의 화산이어서 연둔리에서는 숲정이를, 구암리에서는 조산을 마을 수구막이로 가꿨다. 크지 않는 마을은 고샅마다 돌담들이 정겹다. 초입에는 김삿갓이 운명한 압해정씨 기와집이 있고 곳곳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뒷산에는 김삿갓이 구암 임씨 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주산마을 분지재를 넘어오다 운명했다 초분지가 있다.
김삿갓 초분지
촌로들은 파종에 분주하고 김삿갓에 대해 시큰둥하다. 김삿갓 시인의 삶을 무척 닮았다. 줏대 있게, 소신껏 사는 그의 삶이 주민들에게도 시나브로 베인 모양이다.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시인의 일생을 한 폭의 글로 잘 담아낸 시비가 보인다. 과보림사(過寶林寺)다.
하늘에 달린 궁달을 어찌 쉬 구하리 窮達在天豈易求
유유자적 사는 게 내가 좋아하는 삶 從吾所好任悠悠
고향 집 바라보니 구름은 아득한 천 리 家鄕北望雲千里
물거품처럼 남녘땅 떠도는 이내 신세 身勢南遊海一漚
술잔을 빗자루 삼아 시름을 쓸어 내고 掃去愁城盃作箒
달을 낚시 삼아 시구를 낚아 올리네 釣來詩句月爲鉤
보림사를 보고 나서 또 용천사에 이르니 寶林看盡龍泉又
속세 떠난 발길이 비구승과 한가지일세. 物外閑跡共比丘
김삿갓 시
김삿갓은 장흥 보림사를 지나 함평 용천사에 들렀다. 이리저리 떠돌다 보니 일도 고달픈데 늙기까지 하니 삶이 더욱 고단했을 게다. 나이 먹는 서러움과 외로움을 이렇게 읊었다.
오복 중에 누가 수명을 으뜸이라 하는가 五福誰云一曰壽
친구들은 모두 황천으로 가고 舊交皆是歸山客
근력이 다 떨어져 앓는 소리만 나오네 筋力衰耗聲似痛 -노음(老吟)-
김삿갓 시
누구나 늙고 병들면 자기 누울 자리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난고는 누구보다 감수성이 뛰어나고 여린 시인이다. 속으로 감추고 또 감춘 일부러 등진 고향을 기어이 꺼내고 만다. 풍찬노숙할 때마다 더욱 간절했을 터, 잊으려고 몸부림칠수록 꿈에서 더욱 불쑥불쑥 나타났을 고향 집, 그는 사향(思鄕)은 물론 다음 자탄(自嘆)에 이렇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嗟乎天地間男兒 슬프다! 세상 사람들이여
知我平生者有誰 평생 나를 알아줄 이 누구랴.
萍水三千里浪跡 삼천리 나그네 인생 발자취 어지럽고
琴書四十年虛詞 노래와 글로 보낸 사십 년 모두 헛것일세.
靑雲難力致非願 청운의 꿈은 바라지도 않거니와
白髮惟公道不悲 백발도 정해진 이치려니 슬퍼하지 않으리라.
驚罷還鄕夢起坐 고향 가던 꿈을 꾸다 놀라 일어나니
三更越鳥聲南枝 삼경에 월조 울음 남쪽 가지에서 들리네. -자탄(自嘆)-
김삿갓, 우리 몸 안에 어디로 방랑하고자 하는 욕구가 꿈틀댄다면 우리가 바로 김삿갓이다. 허무나 고독을 벗고 초자연과 동화되고 싶은 욕망, 어디 며칠 간이나마 지치도록 떠돌고 밤에 별을 보고 끝없는 강변을 걷고 싶은 바람이 김삿갓만의 꿈은 아닐 것이다. 마음 헛헛할 때는 구암리가 좋다. 거기 어느 강변에서 그를 만나 그를 위로하고 또 나를 위로받으면 어떨까. 삶은 그렇고 그런 거라고… /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